“나폴리를 봐라, 그리고는 죽어라”는 말이 있듯이 나폴리는 예로부터 아름다운 항구도시로 손꼽힌다. 물론 요즘 그 명성은 여러 가지 사회적인 문제로 좀 시들어졌지만, 그래도 나폴리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황홀한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이 풍경을 잘 감상할 수 있는 곳은 나폴리 시내 중심에서 서쪽으로 좀 떨어진 바다에 면한 포질리포 지역이다. 포질리포 지역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조성된 테라스에서는 눈부신 지중해의 태양을 머금은 탁 트인 바다와 멀리 베수비오 화산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베수비오 화산이 멀리 보이는 마레키아로의 바다. 왼쪽 건물의 창가에는 카네이션이 놓여져 있고 그 아래에는 노래비가 있다. |
포질리포는 그리스어 파우실뤼폰(Pausilypon)에서 유래된 지명으로 ‘위험, 또는 고통이 끝나는 곳’이란 뜻이다. 이런 이름이 붙여진 이유는 이 곳에서 내려다보는 나폴리의 풍경이 모든 위험이나 고통을 잊게 할 정도로 장관이기 때문이었으리라. 이 곳에서 멀리 나폴리 앞바다를 지나는 배들을 바라보니 까마득한 오디세우스 이야기가 떠오른다.
트로이아 전쟁이 끝난 다음 오디세우스는 부하들과 귀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지중해를 한참 방랑하면서 별의별 모험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지금의 나폴리 앞바다를 지나게 되는데 그 곳에는 노래를 기가 막히게 잘 부르는 파르테노페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파르테노페의 노래를 듣는 자는 누구나 넋을 잃고 그만 바다에 빠져죽게 된다는 것. 오디세우스는 그 노래를 정말 한번 듣고 싶었는지 노 젓는 부하들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도록 모두 밀랍으로 귀를 틀어막도록 하고 자신의 몸은 돛대에 밧줄로 꽁꽁 묶도록 했다.
오디세우스 일행이 탄 배가 지나가자 파르테노페는 어김없이 유혹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노래를 듣는 순간 오디세우스는 혼이 빠진 듯 온 몸이 뒤틀리기 시작했지만 다행히 몸이 돛대에 묶여 있어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었다. 물론 파르테노페는 자존심이 상했겠지만.
카네이션이 놓여진 마레키아로의 창문. 그 아래에는 <마레키아레> 노래비가 있다. |
파르테노페의 또 다른 이름은 그리스어로는 세이렌(Seiren), 라틴어와 이탈리아어로는 시레나(Sirena)이다. 시레나는 영어로 넘어가서는 ‘사이렌’이 되는데 경찰차나 앰뷸런스의 ‘사이렌’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다.
어쨌든 이러한 전설에서 보듯 나폴리는 그리스의 문화적 전통이 깊게 배어있는 도시이다.
사실 이 곳은 원래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주해서 개척한 ‘새로운 도시’, 그리스어로 ‘네아 폴리스’(Nea Polis)였다. ‘나폴리’라는 지명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다.
나폴리라면 요리로 유명한데 그 풍부한 전통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또한 나폴리라면 음악애호가들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도시이다. 사실 이 곳처럼 그토록 많은 유명한 노래들이 탄생한 도시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 이러한 노래의 전통은 어떻게 보면 파르테노페의 신화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유명한 나폴리의 노래 중에서 포질리포 지역 서쪽의 작은 어항이 제목이 된 곳이 있다. 어항의 이름은 이탈리아 표준어로는 마레키아로(Marechiaro), 직역하면 ‘맑은(chiaro) 바다(mare)’라는 뜻이다.
옛날 로마인들은 ‘잔잔한 바다’라는 뜻으로 이 곳을 마르 플라눔(Mar planum)이라고 했다. 어쨌든 이곳의 바다는 맑고 잔잔하다. 한편 마레키아로는 나폴리 토박이 방언으로 Marechiare라고 하고 ‘마레키아르’에 가깝게 발음하는데, 국내 음악출판물에서는 <마레키아레>라고 표기되어 있다.
마레키아로에서는 멀리 베수비오 화산, 소렌토 반도, 카프리 섬까지 보인다. 또 바다에 접한 건물 창가에는 항상 빨간 카네이션이 꽂혀있고 그 아래는 <마레키아레> 노래비로 장식되어 있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사랑의 노래에는 창문이 자주 등장한다. 그것도 그냥 창문이 아니라 열릴 듯 말 듯한 창문이다.
창문은 사랑하는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방해물이기도 하며 사랑을 전달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창문은 보여주는 것보다는 더 감춘다. 그리고 창문은 사랑의 욕망을 낳게 하고 마음의 상처를 주기도 하며 사랑을 약속하게 하면서도 지속되지 못하게 한다. 닫힌 창문 아래에서 한줄기의 희망이나 또는 괴로움은 노래로 바뀐다.
지중해가 펼쳐져 보이는 마레키아로 레스토랑. |
나폴리의 향토시인 살바토레 디 쟈코모는 카네이션이 항상 놓여져 있는 이 창문 아래에서 솟아오르는 사랑의 감정을 시에 담았고 그가 쓴 시에 작곡가 파올로 토스티는 1886년에 곡을 붙였다.
이렇게 탄생한 사랑의 노래 <마르키아레>는 웬만한 성악가라면 한번 쯤 불러보고 싶은 노래가 될 정도로 세계적인 명곡이 되었다. 아울러 가난한 어부들이 살던 작은 어항 마레키아로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마레키아로는 특히 1960년대에 이탈리아의 유명 연예인들이 즐겨 드나들던 낭만적인 장소로 각광 받았다. 현재 이 곳 바닷가에는 해산물 레스토랑이 더러 있는데 지중해의 낭만적 분위기 속에서 그야말로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정도로 입맛을 유혹한다.
바다 위로 달이 떠오르고 <마레키아레> 노래가 어디선가 흘러나오면 더욱 더 그렇다. 마치 유혹하는 파르테노페의 노래처럼.
◆ 정태남 건축사
이탈리아 건축사이며 범건축(BAUM architects)의 파트너이다. 건축 분야 외에도 음악, 미술, 언어, 역사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하고, 유럽과 국내를 오가며 강연과 저술 활동도 하고 있다.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로마역사의 길을 걷다>,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이탈리아 도시기행> 외에도 여러 저서를 펴냈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