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일어나는 많은 일은 보는 관점에서 따라 그 진위가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거꾸로’ 보거나, ‘비틀어서’ 보면 그때까지 알던 세상과 다른 사실이 발견되기도 한다. 그 순간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이 거짓이 되고, 거짓으로 알던 것이 진실로 뒤바뀐다.
미술작품 중에도 보는 관점, 방향, 각도에 따라 처음 봤을 때와 전혀 다른 이미지가 드러나는 그림들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15세기 르네상스 미술은 진실다움을 추구했다. 정확한 묘사와 명확한 의미를 지닌 이미지를 통해 눈에 보이는 것을 믿게 만드는 그림을 그렸다.
한마디로 ‘보이는 것이 진실’임을 전파했다. 그러나 16세기 마니에리스모 시대나 17세기 바로크 시대에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인식이 생기면서,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른 이미지가 인식되는 형식의 그림이 등장한다.
예컨대 보던 그림을 거꾸로 보면 생각하지 못한 이미지로 변환되는 경우이다. 풍경이 사람의 형상으로 보이기도 하고, 사람 형상이 다른 사물로 보이기도 한다. 특정한 이야기를 전하는데 집중했던 틀에서 벗어나 이면에 감추어진, 혹은 상대적인 의미나 이미지가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음을 제시한다.
거꾸로 보기
거꾸로 보거나 돌려 보면 전혀 다른 이미지가 나타나는 그림을 즐겨 그린 화가로 주세페 아르침볼도 (Giuseppe Arcimboldo, 1527~93)가 있다. 이탈리아의 화가로 뛰어난 그림 솜씨 덕분에 황제(페르디난도 1세, 막시밀리안 2세, 루돌프 2세)에게 발탁되어 궁정화가로 활약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미술애호가들도 재치 있는 해학과 풍자로 가득한 아르침볼도의 그림을 좋아했다. 그의 그림이 당대 인기를 얻었던 비결은 꽃, 동물, 어류, 과일, 채소 등 온갖 사물을 기발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기상천외한 화면을 구성한데 있다.
그가 그린 그림을 보자. 싱그럽고 탐스러운 과일과 채소 등이 바구니와 그릇에 가득 담겨있다. 과일이나 채소들이 마치 붙어있는 듯 연결된 구성이 눈에 띈다. 자연의 풍요를 상징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식탁을 풍성하게 메울만한 양이다.
주세페 아르침볼도 <FruitBasket> <Vegetables>1590 |
그림을 한동안 감상했다면, 이번엔 두 그림을 거꾸로 보자. 그러면 생각하지 못한 형상이 나타난다. 순식간에 과일바구니와 채소 그릇이 사람의 얼굴로 변했다. 과일과 채소를 그린 정물화 인줄 알았던 그림이 인간의 얼굴을 그린 초상화가 되었다.
전혀 예기치 못한 반전이다. 현실에서는 마주할 수 없는 얼굴이지만, 독특한 구성으로 인간의 형상을 그린 아이디어가 놀랍다. 거꾸로 봐야 알 수 있는 형상을 위해서는 사전에 철저한 계산이 필요했을 것이다.
실제 그림을 보면 어떤 과일을 어느 위치에 어떻게 배치할까 고민한 흔적이 느껴진다. 자연사물을 의인화한 화가의 의도는 결국 단순 과일바구니나 채소그릇보다 얼굴형상의 이미지를 오랫동안 기억에 남게 하는 효과를 냈다.
아르침볼도의 <The Cook>이란 작품도 같은 맥락이다. 은빛 쟁반에 놓인 여러 고기(닭과 돼지처럼 보인다)가 쌓여있다. 만찬에 놓일 음식인 듯 고기가 쟁반이 넘칠 정도로 가득하다. 이 그림 역시 거꾸로 보면 새로운 형상이 드러난다. 기괴한 생김새의 사내가 관람자를 쳐다보는 얼굴이 나타난다.
마치 배를 채우기 위해 육식을 탐하는 자를 비웃는 듯. 그래서일까 <The Cook> 그림은 식욕을 떨어뜨릴 만큼 섬?하다. 만약 작가의 의도가 여기에 있었다면 성공한 셈이다.
주세페 아르침볼도 |
숨은 그림찾기
아르침볼도의 그림처럼 뒤집어보거나 돌려보지 않아도 하나의 그림 안에 또 다른 이미지가 있는 그림이 있다. 어떤 특정한 하나의 상(像)이 전혀 다른 이미지로 인식되는 그림이다.
서로 다른 퍼즐이 숨겨진 형식으로 이른바 '숨은 그림(Vexierbild)'이라 불린다. 이런 형식의 그림은 하나의 사물로 다른 사물을 떠올리게 하는 변환 효과로 호기심과 흥미를 유발한다.
동판화로 유명한 르네상스의 거장 뒤러(Albrecht Durer, 1471-1528)의 그림이 여기에 속한다. 그의 그림은 사실적인 그림으로 유명하다. 특히 호기심을 자극하는 그림이 많은데 1495년에 그린 수채화 아르코의 풍경(View of Arco)도 그렇다.
올리브와 포도원이 펼쳐진 곳을 지나 가파른 산허리를 요새로 만든 아르코의 풍경이 펼쳐진 그림이다. 뒤러에 의해서 각색되어 본래의 풍경과는 다르다. 여기에는 드라마틱한 느낌을 부여하려한 작가 의도가 숨어있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르코의 풍경보다 요새를 감싸는 암벽 왼쪽에 살며시 숨어있는 찡그리는 남자(scowling man)의 얼굴이 보인다.
알프레히트 뒤러 <아르코의 풍경>.1495년 |
남자의 옆얼굴이 암벽의 전체 높이로 조각된 듯 그려져 있다. 뾰족한 코와 수염으로 보이는 형태(노인 형상에 가깝다)가 유독 눈에 띈다. 뒤러는 남자의 옆얼굴을 은연중 돋보이게 하려고 주변의 다른 바위보다 표면을 밝게 처리했다.
처음에 발견하기 어려울 뿐 한번 인식되기 시작하면 남자의 얼굴은 오랫동안 잔상으로 남는다.(사실 이러한 비슷한 경험은 꼭 그림이 아니더라도 현실에서 종종 마주한다. 용을 닮았다는 용두암, 여인의 누워있는 얼굴을 닮았다는 산등선, 특정 동물이나 사람의 형상을 닮은 자연 등) 궁극에 화가의 붓끝에서 특정한 형상을 닮거나 연상시키는 풍경은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에 변화를 주기도 한다. 자연의 신비로움과 거기에 얽힌 신화까지 듣게 되면 처음 대했던 자연풍경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
H. 번의 <그리스의 섬에서 바이런의 정신>, 1830년경 |
다음의 예시 그림도 이런 맥락에서 접근 가능한 그림이다. 조금만 정신을 집중하면 자연과 하나가 된 듯한 남자의 옆얼굴이 나타난다. 암벽들이 얼굴형상을 만들고, 나뭇잎은 눈썹과 눈이 되었다. 오른쪽 암벽에 기울어져 자란 한 그루 나무는 머리카락이 되었다.
이 그림은 1830년경에 그려진 H. 번의 <그리스의 섬에서 바이런의 정신>이란 그림이다. 제목이 말해주듯 그림 속 형상은 그리스를 너무도 사랑했던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의 얼굴이다. 그리스의 독립을 위해 참전했다가 그곳에서 죽은(말라리에 걸림) 시인의 정신을 자연과 합일된 모습으로 그렸다. 누구보다 그리스를 사랑했던 시인을 모습이 자연만큼 거대하게 다가온다.
인생은 ‘수수께끼 풀기’, 혹은 ‘숨은그림찾기’라고 말할 수 있다. 살아가는 동안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을 스스로 해결하거나 또 해결방안을 모색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것이 자신이 찾는 것, 혹은 알고 있었던 것과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는 것을 깨닫기도 한다. 그 순간 세상이 달라 보인다. 이는 없던 세상이 아니라. 미처 발견하지 못하거나 노력하지 않아서 몰랐던, 혹은 감추어졌던 세상이다.
숨겨진 세상이든 감추어진 진실이든 그것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은 결국 자신에게 달렸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맞고 틀리다’, ‘옳고 그르다’를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다른 차이와 다름을 발견하고 인정해가는 것을 배우는 것에 있다. 이를 위해서는 이제까지 보는 방법과 다른, 새롭게 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눈을 크게 뜨고 익숙하게 보았던, 혹은 보지 않았던 것들에 관심을 기울여보자. 거꾸로 보고, 비틀어 보고, 돌려서도 보자. 그러다보면 지금까지 보았던 것과 다른 새로운 세상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 참고문헌 및 추천도서 : 진중권 지음『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휴머니스트, 2005.
◆ 변종필 미술평론가
문학박사로 2008년 미술평론가협회 미술평론공모 당선, 200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에 당선됐다. 경희대 국제캠퍼스 객원교수, 박물관·미술관국고사업평가위원(2008~2016), ANCI연구소 부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관장으로 재직 중이며 미술평론가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