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로나의 포르타 누오바 역에서 나와 약 1.5킬로미터 되는 길을 따라 가다가 중세의 도시성벽 안으로 들어서면 성벽에 붙어있는 문구가 눈에 띈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중 3막 3장의 구절 ‘베로나의 성벽 바깥에는 세상이 없고, 연옥과 고문이 있는 곳, 바로 지옥이 있을 뿐입니다’이다.
베로나 구시가지와 로마제국시대의 원형극장 아레나가 보이는 브라 광장. |
성벽 안쪽 ‘세상’에는 널따란 브라 광장(Piazza Brà) 너머로 베로나의 구가지가 펼쳐지고 브라 광장 안쪽에는 콜로세움처럼 생긴 원형극장 아레나(Arena)가 시야를 사로잡는다. 베로나에는 고대 로마의 유적이 비교적 많이 남아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아레나이다. 최근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이 원형경기장은 기원후 14년에서 54년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니까 로마의 콜로세움보다 25년 이상 앞선다.
아레나는 콜로세움의 1/2 정도인 대략 3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이다. 옛날 이곳에서 벌어지던 검투사 시합은 최고의 볼거리였다. 이곳에서 울려 퍼지던 피의 함성은 끊임이 없었고 경기장 바닥에 깔아놓은 모래는 검투사들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들곤 했다.
아레나(arena)란 바로 ‘모래’를 뜻하는데 ‘원형경기장’이란 뜻으로 굳어져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이 아레나는 로마제국이 멸망한 다음에는 폐허의 길에 접어들어 중세에는 사형장, 기사들 간의 결투장, 창녀굴 등으로 전락했다.
연속되는 아치로 이루어진 원형경기장 아레나의 외벽. |
1700년대에는 투견과 투우장, 그리고 우(牛)시장 등으로 사용되다가 가끔은 연극 공연 무대가 되기도 했다. 그 후에는 오로지 고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의 연구대상으로만 관심을 끌 정도의 폐허로만 남아 있다가, 지금은 수준 높은 야외 오페라 공연장으로도 전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원형경기장은 신기하게도 음향이 뛰어나다. 관중석 위쪽에 있으면 아래 멀리서 사람들이 말하는 이야기가 귓전에 생생하게 그대로 전달된다. 그러고 보니 1970년 이곳에서 비제(G. Bizet)의 오페라 <카르멘>을 공연할 때 있었던 일이 머리에 떠오른다.
이 오페라를 실내에서 공연할 때는 말을 무대에 올려놓기 힘들지만 아레나와 같이 넓은 야외무대에서는 가능하다. 이 공연에는 말이 무려 38마리나 무대에 등장했다. 1·2·3막이 모두 무난히 지나가고 4막이 올랐다.
검투사 출입구에서 본 경기장. |
에스카미요를 선두로 투우사의 행렬이 지나가는데 갑자기 마지막 말이 제멋대로 ‘궤도’를 이탈해 오케스트라 박스 쪽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닌가?
이때 마침 지휘자가 지휘봉을 높이 치켜들자 말은 깜짝 놀라 오케스트라 박스 안으로 뛰어내렸다.
악기 부서지는 소리, 연주자들의 비명 소리에 오케스트라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불의의 사고를 지켜본 관중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리고는 다음 순간을 조심스럽게 기다렸다.
지휘자는 지휘봉을 내리고 오케스트라 박스에 떨어진 투우사를 신경질적으로 노려보더니 조그만 목소리로 상스런 욕설을 마구 퍼부어 댔다.
그런데 지휘자는 아레나의 음향이 너무나도 뛰어나 아주 미세한 소리까지도 관중석으로 잘 전달된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있었다. 여름밤의 정적을 뚫고 무대로부터 듣기에 민망스런 욕설이 들려오자 관중들은 모두 그만 일제히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이처럼 음향이 뛰어난 아레나가 오늘날처럼 야외오페라의 전당으로 탈바꿈한 것은 20세기 초반의 일이었다. 베로나 시정부는 아레나의 유적을 야외 오페라 공연장으로 사용하자는 베로나 태생의 성악가 제나텔로 부부의 제안을 받아들여 1913년 베르디 탄생 100주년을 맞아 8월 10일에 <아이다>를 무대에 올렸다.
이 오페라가 여름 밤하늘 아래 젊은 건축가 파주올리가 디자인한 환상적인 무대 위에서 펼쳐지자 여러 나라에서 몰려든 수천 명의 관중들은 실내 무대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분위기에 압도되어 마법에 걸린 듯 넋을 잃고 있었다. 관중석에는 푸치니, 마스카니, 보이토, 일리카 등 이탈리아 오페라계의 거장들과 고르키, 카프카 등 유럽문화계의 유명 인사들도 앉아 있었다.
뛰어난 음향을 자랑하는 아레나 내부. |
이 ‘세기의 공연’ 이래로 ‘아레나는 곧 야외 오페라 극장’, ‘야외오페라는 곧 베로나’라는 이미지가 굳어져서 해마다 여름이 되면 전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베로나로 끌어들이고 있다. 특히 독일 사람들은 오페라 공연을 보러 관광버스를 대절해 마치 게르만 민족이동을 연상할 정도로 대거 남하한다.
그런데 이러한 ‘대박신화’는 이탈리아가 오페라의 나라이고 이곳 사람들이 오페라를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일까? 실은 이탈리아 사람들 중에서 일생에 단 한번이라도 오페라를 봤다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즉 본고장에서도 오페라는 저변이 생각보다 넓지 않다는 뜻이다.
하지만 수준 높은 종합예술인 오페라는 어떻게 공연하느냐에 따라 저변을 크게 확대할 수 있으며 또 새로운 형태의 문화산업으로도 부상할 수 있는 잠재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레나의 성공신화는 ‘무엇’도 중요하지만 ‘어떻게’도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새삼 느끼게 해준다.
물론 이러한 성공신화 뒤에는 ‘베로나’라는 도시가 지닌 사람들을 이끄는 여러 가지 요소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중 무엇보다도 먼저 베로나가 로미오와 줄리엣의 고향이라는 사실 말이다.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분야 외에도 음악·미술·언어·역사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하고, 유럽과 국내를 오가며 강연과 저술 활동도 하고 있다.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외에도 여러 저서를 펴냈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