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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네랄리페 정원에 흐르는 남국의 멜랑콜리

[정태남의 클래식 여행] 스페인/그라나다(Granada)

2019.04.30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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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위치한 이베리아 반도는 까마득한 옛날 로마제국의 속주 히스파니아(Hispania)였다. 5세기에 접어들면서 로마제국이 쇠퇴하자 고트족이 히스파니아를 침입하여 왕국을 세웠고, 711년에는 북부 아프리카의 무어인들이 침공하여 고트왕국을 무너뜨리고는 이베리아 반도 북부를 제외한 영토에 이슬람 왕조를 건설했다.

이베리아 반도 북쪽으로 쫓겨난 기독교 세력은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기나 긴 ‘국토회복’ 전쟁에 돌입하여 마침내 1492년 이슬람의 마지막 보루 그라나다를 함락함으로써 국토회복을 완수했다.

이슬람 왕조의 여름 별장 헤네랄리페.
이슬람 왕조의 여름 별장 헤네랄리페.

그라나다 시가지를 수호신처럼 내려다보고 있는 알함브라 궁전은 이베리아 반도에 남아있는 이슬람 건축의 백미이다. 알함브라 궁전을 나와 사이프러스 나무가 늘어선 길을 따라 산으로 오르고 있는데, 한 미국인 노부부가 다가와 ‘제너럴리페이’가 어디냐 묻는다.

‘리페이’라는 장군의 동상이라도 찾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스페인에 그런 이름은 없다. 그러다가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노부부는 헤네랄리페(Generalife)를 영어식으로 읽었던 것이다. 표준 스페인어에서 모음 e나 i 앞의 g는 목구멍 뒤쪽에서 나오는 격한 ‘ㅎ’소리이다.

헤네랄리페는 알함브라 궁전이 바로 아래 내려 보이는 산 중턱에 세워진 이슬람 왕조의 여름별장이었다. 이곳은 정감이 흐르는 아담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절묘한 공간들의 배치, 품위 있는 선, 확 트인 조망, 물소리는 이곳의 매력이다.

어둠이 찾아오기 시작하면 멀리 알바이신 지역에서 불빛이 켜진다. 알바이신 지역은 옛날 무어인들과 유대인들이 터전을 잡고 살던 곳이다. 어둠이 깃든 헤네랄리페에서 들리는 정원의 물소리는 마누엘 데 파야(Manuel de Falla 1876~1946)의 대표작인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스페인 정원의 밤>을 연상하게 한다.

파야는 스페인의 음악을 국제적인 수준으로 올려놓은 스페인 음악가들 중 한 사람이다. 그는 1909년에 이 곡을 처음 구상했고 1915년에 완성하여 이듬해에 마드리드에서 초연했다. 이 곡에서는 멜랑콜리가 흐르면서도 프랑스 인상주의 음악의 분위기가 물씬 느껴진다. 파야는 1907년부터 년까지 7년 동안 파리에 체류하면서 드뷔시, 라벨, 뒤카 등 인상주의 음악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물이 중심을 이루는 헤네랄리페의 분수 정원.
물이 중심을 이루는 헤네랄리페의 분수 정원.

스페인 국민주의 음악을 이끌고 나가던 핵심 인물인 페드렐, 알베니스, 그라나도스는 모두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하는 카탈루냐 지방 사람들이었다. 파야는 안달루시아의 항구도시 카디스에서 태어났는데 그도 사실 따지고 보면 안달루시아 혈통은 아니다. 왜냐면 그의 아버지는 중동부해안의 발렌시아 사람이고 어머니는 카탈루냐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달루시아에서 성장한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더 깊숙이 안달루시아 음악의 토속적인 본질에 다다를 수 있었던 것 같다.

<스페인 정원의 밤>은 ‘헤네랄리페에서’, ‘멀리 들리는 춤곡’, ‘코르도바 산맥의 정원들에서’ 세 곡으로 구성된 일종의 3악장의 피아노 협주곡이다. 그런데 두 번째 곡의 제목은 정원과는 관계없다. 아마 알바이신 지역에서 들리는 집시들의 플라멩코 춤곡이 헤네랄리페로 메아리쳐 들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또 세 번째 곡에서 언급한 정원들은 실제로 정확히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전통적인 부활절 음악과 집시 음악이 혼합되어 있는 것을 보면 실존하는 정원의 인상을 그리려고 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니까 <스페인 정원의 밤>에서 헤네랄리페 정원만 실제로 존재하는 정원인 셈이다.

알함브라 성채아래 마누엘 데 파야가 살던 집.
알함브라 성채아래 마누엘 데 파야가 살던 집.

파야는 파리생활을 마친 후 마드리드에서 활동하다가 1920년에는 아예 그라나다로 이주하여 터전을 잡았고 이곳에서 안달루시아의 민중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Federico García Lorca 1898-1936)와 함께 안달루시아의 민속음악을 재발견하고 정제해내는데 힘을 쏟았다. 하지만 고뇌의 시간이 다가왔다.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다. 쿠데타의 주역 프랑코 장군은 좌익성향의 시인 로르카의 작품을 금지했고 그런 와중에 로르카는 어디론가 끌려갔다. 파야는 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프랑코 장군에게 탄원했지만 로르카는 그해 8월 19일 그라나다 근교에서 총살당하고 말았다. 동료의 비극적인 최후는 파야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스페인 내전은 1939년 봄 프랑코 장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영어의 ‘장군’ 제너럴(general)은 스페인어에서는 똑같은 철자이지만 발음은 ‘헤네랄’이다. 프랑코 장군은 ‘헤네랄’ 정도가 아니라 ‘위대한 장군’, ‘최고의 장군’이란 뜻으로 헤네랄리시모(Generalisimo)로 불렸다.

프랑코가 정권을 잡자 파야는 아예 짐을 싸고 조국을 등지고 머나먼 아르헨티나로 이주해 버렸다. 프랑코는 그에게 상당한 금액의 연금을 제의하고 조국으로 돌아오라고 여러 번 요청했다. 하지만 파야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먼 이국땅에서 7년을 보내고 1946년 11월 14일, 70회 생일을 며칠 앞두고 숨을 거두었는데, 마지막 순간까지 ‘헤네랄리시모’란 말은 듣기조차 싫었던 모양이다. 그가 끝까지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싶었던 것은 ‘헤네랄리페’가 아니었을까?

정태남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분야 외에도 음악·미술·언어·역사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하고, 유럽과 국내를 오가며 강연과 저술 활동도 하고 있다.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외에도 여러 저서를 펴냈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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