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 영화평론가 |
최고 권위 영화제에서 일등상 수상은 그것만으로 충분히 기념비적이지만, 이 낭보에 다른 해석을 더한다 해도 유난은 아닐 것이다.
올해는 최초의 한국영화 ‘의리적 구토’(1919년)가 가 개봉한 지 백년이 되는 ‘한국영화 100주년 ’이기 때문이다.
‘한국영화 100년’이라는 이정표는 어쩌면 ‘지각의 역사’라는 궤적 안에서 살필 수 있다.
영화를 만드는 것은 영화인들의 몫이지만, 그 역사를 지속하게 하는 원동력은 관객들의 ‘영화에 대한 사랑’이다. 즉, 지난 100년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대중적 입장에서 다시 고려되어야 한다.
이에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초기의 영화들, 1910년 후반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 ‘잃어버린 필름’에 관해 생각하며 한국영화 전반을 다시 검토해 보고자 한다.
1919년 10월 27일 최초의 한국 영화 ‘의리적 구토’가 개봉했다. 사진은 매일신보 1919년 10월 28일자 ‘의리적 구토’ 개봉 광고.(출처=위키백과) |
한국영화사의 첫 번째 퍼즐은 ‘의리적 구토’가 지니고 있다.
이 영화를 연출한 김도산 감독은 1918년 처음 ‘의리적 구투(鬪)’란 연극을 대중들에 소개한 후 이듬해 7월 다시 비슷한 제목인 ‘의리적 구토(討)’로 같은 연극을 선보였다.
따라서 두 제목은 동일한 작품을 가리킨다. 어떻게 불러도 상관없지만, 일반적으로 최초의 영화는 ‘의리적 구토’라고 소개된다.
연극과 영화가 더해진 ‘연쇄극’의 형태로 ‘의리적 구토’가 처음 상영된 날은 1919년 10월 27일이다. 후에 이날은 한국인이 만들고 투자한 최초의 영화가 공식 상영된 날이라서 ‘영화의 날’로 지정된다.
연쇄극 ‘의리적 구토’는 부유한 집의 아들 송산이 집안의 재산을 탐내며 흉계를 꾸미는 계모 때문에 고심하다가 결국 정의의 칼을 빼든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현재 대본이나 사진 자료 등은 남아있지 않다.
이 작품이 영화인지 아닌지에 대한 의견 또한 분분했다. 연극 한 신이 끝나면 무대 위로 흰 포장이 내려와 스크린에 사운드 없는 무빙픽처가 영사되는 식으로 극은 진행되었고, 영사 장면과 연극 내용은 심지어 서로 연결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공연은 에이도푸시콘*의 후예로서 집약된 ‘시네마의 속성’을 모두 지니고 있다. 환영적인 실제의 이미지가 갇힌 공간에서 관객들에게 ‘영사’되는 순간, 분명히 시네마는 완성된다.
* 에이도푸시콘(Eidophusikon) : 화가이자 무대 장식가인 필립 제임스 드 루테르부르가 1781년에 만든 미니극장. 그림이 조명과 음악에 맞춰 바뀌는 일종의 이미지 관람장소였다. (편집자 주)
‘의리적 구토’에 활용된 활동사진은 연극이 보여주지 못한 한강철교와 장춘단, 청량리, 영도교, 남대문 정거장, 뚝섬, 살곶이다리, 전차, 기차, 자동차, 노량진 등의 실제 장소를 촬영해 극적 볼거리를 제공했다.
한편 ‘현존하는 최고(古)의 토키영화’인 ‘미몽’(1936년)은 초기영화 목록에서 유독 돋보이는 작품이다.
1930년대 영화문법과 일제강점기 시대의 신여성 및 근대성에 대한 담론을 엿볼 수 있는 양주남 감독의 ‘미몽’. (사진=저작권자(c)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복원 상태가 훌륭한 데다, 내적 완성도 역시 뛰어난 이 영화의 부제는 ‘죽음의 자장가’다. 딸과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들을 만나는 여주인공은 ‘새장 속의 새’로 비유되는데, 갇힌 새가 자유의 대가로 얻는 것은 예상처럼 비극적이다.
1950년대의 또 다른 명작 ‘자유부인’(1956년)과 비교할 때 ‘미몽’의 스토리는 동일한 신파극 부류에서도 특별히 처연하다.
‘자유부인’이 잘못을 뉘우치고 가정으로 돌아가는 결말로 정리되는 데 반해, ‘미몽’은 스스로 누린 자유의 대가로 죽음을 택한다는 불행한 결말로 마무리된다.
이밖에 나운규의 사라진 걸작 ‘아리랑’(1926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무성영화 ‘청춘의 십자로 ’(1934년), 영화적 기교가 뛰어난 ‘반도의 봄’(1941년) 등 1940년대 중반 조선영화의 목록은 아름답고 인상적인 작품을 다수 수록하고 있다.
물론 이 작품들을 하나의 틀 안에서 논의하긴 어렵다. 다만 일제강점기의 유아기적 한국영화가 대담하고 정교한 생산력을 보이면서 이 시기에 성장했다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이후 시대적 검열의 갈퀴는 교묘하고도 통속적인 방식으로 한국적인 스타일을 양산했고, 소설 등 타 문화와의 교류는 한국영화 곳곳에 흔적을 남겼다.
요컨대 ‘한국적 리얼리즘’이라 불리는 일제시대 신파극은 스펙타클의 활용에 있어서 용감하게 변모했고, ‘근대의 개방성’을 드러내는 문화적 지표로 영화에 스며들었다.
이처럼 한국영화 100년의 역사는 초기의 개방적인 시기를 거쳐 조금은 과도기적이고 의심스러운 시간을 보낸 후 지금의 황금기에 이른다. 그렇지만 해방 이후 과도기의 영화 목록을 보면 꽤나 다양한 거장들을 배출했다는 점에서 놀랍다.
‘기생충’이 차지한 황금빛 훈장은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신상옥, 김수용, 이만희 등 수많은 감독들이 거친 ‘예술적 검증’ 단계가 잉태한 결과물인지 모른다.
한편 1960년대 ‘한국영화 르네상스’ 시기의 대표작은 단연 ‘하녀’(1960년)를 꼽을 수 있다. 김기영 감독은 어떤 다른 연출가보다 촬영기법 개선에 고심했으며, 계급 문제를 현실적으로 서사에 투영시켰다.
김기영 감독 특유의 스타일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하녀 삼부작’ 중 첫 번째 영화인 ‘하녀’. (사진=저작권자(c)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구성에 있어서 ‘하녀’의 경이로운 점은 특히 여성 캐릭터에서 부각된다. 주인공 하녀는 한국영화사에서 유래 없이 어둡게 채색되는데, 한 마디로 ‘비뚤어진 인간’의 표상이 이 영화의 중심에 놓인다.
한국영화의 장르적 색채는 ‘하녀’를 거치며 기존보다 훨씬 짙어지고, 관객들이 느끼는 기이한 감정도 고조된다.
또한 대중과 소통하는 방법으로 ‘장르’의 유용성 역시 이 시기 더욱 강화된다. ‘중산층’ 계층이 현대영화의 새로운 주제로 떠오른 것도 당대의 성과다.
1980년대 이후 전적으로 ‘산업화의 자장’ 안에서 한국영화는 지속적으로 발전했다. 상업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이 시기의 한국영화는 ‘성공적’이라 평할 만하다.
이를테면 강제규 감독의 ‘쉬리’(1998년)가 이룬 620만 관객 확보가 대표적 산업화의 성공 사례다. 물론 ‘쉬리’ 이전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1993년)가 이룬 국제적 성취와 ‘최초의 100만 관객 동원’이란 지표 역시 2000년대 황금기의 서막처럼 보인다.
1990년대에 들어서 박찬욱, 이창동, 홍상수 등 독보적 작가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한국영화의 세계적 위상은 격상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봉준호 감독의 칸영화제 수상은 다시금 돌이킬 필요가 있다.
봉준호 감독이 제72회 칸영화제에서 영화 ‘기생충’으로 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AP,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그렇다면 ‘기생충’의 한국영화사적 의미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 작품의 전형성 그리고 보편성은 지극히 한국영화의 틀 안에 머무른다. 바꾸어 말해 한국의 관객들보다 외국의 관객들이 훨씬 이 영화를 새롭다고 느낀다.
‘기생충’은 특화된 상품으로서가 아니라 문화적 다양성을 지향하는 개성적인 영화로 평가 받을 수 있는 작품이다. 장르물이지만 그런 면에서는 장르적이지 않다. 다만 김기영 영화처럼 봉준호 영화는 스펙타클을 담보로 영화를 제작한다.
‘기생충’을 전적으로 ‘한국영화적’이라고 단언하긴 어렵다. 그렇지만 한국영화의 역사 안에서 이 작품은 자연스레 두각을 드러낸다.
조용하고 어두우면서도 장르적인 사실성, 한국영화의 리얼리즘이 정교하게 압축된 영화가 '기생충'이라 말한다면 너무 거친 정리가 될까. 한편으로 ‘기생충’에서는 계층적이고 침침하고 사실적인 블랙코미디로, 서구식이 아닌 한국 특유의 쓴맛이 느껴진다.
1919년 ‘의리적 구토’에서 시작된 한국의 리얼리즘적 색채는 이처럼 개성적이고 개방적인 양상으로 스며들었다.
바야흐로 한국영화가 100주년을 맞이하며 새로운 출발점에 접어들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