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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의 결혼식 소묘

2020.09.07 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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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결혼식을 5일 앞둔 선배한테 전화가 왔다. 그렇잖아도 결혼식을 강행하는지 취소했는지 궁금하던 차였다. 지인과 친구 자제의 결혼식이 9월에만 3건 있었는데 다 취소한다는 연락이 왔었다. 그런데 취소 통보가 아니고 오지 말라는 부탁이었다.

“어쨌든 그냥 치르려고 하네. 그런데 예식홀 안에 50명 이내만 들어갈 수 있어서 예식 진행자들 빼고 나면 양측 각각 15명밖에 못 들어가네. 그리고 점심 식사도 대접 못하게 됐고, 만에 하나 감염도 걱정되니 오지 말게나.”

청첩해놓고 오지 말라는 전화는 생전 처음이다. 이럴 때는 뭐라고 대답해야 현명할까, 잠시 고민했다. 그럼 안 갈 테니 계좌 번호나 보내달라고 하는 건 너무 의리 없는 짓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과거 내 첫 직장에서 나를 가르친 사수였는데, 간만에 얼굴이나 뵈러 가겠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말하니 좋아하는 눈치였다. 청첩장을 돌린 이들에게 이런 불편한 전화를 일일이 해야 하는 혼주의 마음이 짐작이 갔다. 그때만 해도 코로나는 진정 국면이었고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는 예상하지 못했으니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지난 일요일, 지하철을 타고 서울 강남구의 한 예식장에 갔다. 호텔 예식장은 아니었다. 주차장 입구에 ‘청첩장 확인’이라는 안내판이 붙어있다. 요새 우편으로 청첩장 돌리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혼주와 악수하러 가기까지의 과정은 지난했다. 예식장 유리문에는 ‘마스크 미착용시 입장 불가’라고 빨간 글씨로 크게 쓴 안내문 밑에 ‘정부정책에 따라 입장 인원을 50명으로 제한하니 직원 통제에 협조 바랍니다’라고 붙어있다. 이럴 때 ‘협조’라는 단어는 ‘복종’이라는 단어의 완곡한 표현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혼주는 저 안쪽에 서있고 발열 체크, 출입 확인 데스크 가 앞을 가로막는다. 사람들이 줄을 서있다. 코로나 시대에는 어디를 가든 좀 일찍 출발해야 낭패를 안 본다. 예식장은 나이 든 하객이 많아서 그런지 아직도 QR코드를 찍을 줄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수기로 작성하는 줄만 길다. 나는 가볍게 QR코드로 체크인하고 손 세정제를 듬뿍 뿌리고 들어갔다.

혼주인 선배는 발이 넓은 분인데다 방송 시사프로그램에도 고정출연하는 언론계 출신이라서 아무리 코로나 시국이라지만 하객이 미어터질 줄 알았다. 그런데 의외였다. 식장은 제법 한산했고 화환만 줄을 이었다. 혼주와 악수를 나누려다 얼굴을 순간 못 알아채면 미안해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마스크를 잠시 내렸다. 마스크에 장갑을 낀 혼주와 인사하는 건 내 평생 처음이었다. 선배는 고마워하면서 미안해했다.     

한 사람이 대표로 축의금 봉투 여러 개를 가져온 사람이 많았다. 방명록에 이름을 쓰는 데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봉투를 내밀고나니 답례품을 보내드릴 테니 집주소를 별도 노트에 써달라고 한다. 그렇잖아도 밥도 안 주는데 어찌 답례하는지 궁금했던 바다. 궁금한 건 물어야 직성이 풀린다. 와인 두 병을 보낼 거라고 한다. 괜찮다. 자주 먹는 예식 뷔페 음식보다 차라리 실속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축의금만 인편에 전한 사람이 많은데 일일이 전화를 해서 집 주소를 파악하려면 힘이 들겠다는 남 걱정까지 해줬다.

홀을 잠시 들여다봤다. 넓은 홀에 원탁을 드문드문 배치하고 의자 수도 줄였다. 신랑신부도 마스크를 쓰고 식을 치러야 하는지 궁금해서 물어봤다. 그날의 두 주인공은 벗고 있어도 된다고 한다. 그럼 주례는? 궁금해서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 정부 지침을 찾아봤다. 마스크는 신랑·신부에 한해서만 예외가 적용되고 단체 기념사진 촬영 시에는 모두 써야 한다고 돼있다.

한국의 경조사는 일종의 사교장이다. 하객이든 조문객이든, 혼주와 상주의 학연 지연 직장연을 중심으로 형성된 인맥끼리 자연스럽게 모여 안부를 확인하고 인사하고 관계를 다지는 기회다. 이날 과거 직장 선후배를 여럿 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먼저 차라도 한 잔, 술이나 한 잔 하자는 말을 꺼낸 이는 없었다. 다들 그냥 봉투 내밀고 인사하고 각자 갈 길을 갔다.

배가 고팠다. 어차피 밥을 못 줄 거라면 이제는 예식을 식사 시간을 피해서 하는 게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가는 길은 왠지 쓸쓸했고 우울했다. 일요일이기도 했지만 서울 강남 번화가에는 사람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유난히 문을 닫은 상점들도 많이 보였다. 지하철도 텅 비었다.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가까이 오지 말고 옷부터 벗어 세탁기에 돌리고 빨리 목욕하라고 한다. 이제 당분간은 예식장에 가지 말아야지 다짐했다. 2020년 9월 6일 서울의 한나절이었다.

신랑 신부는 오늘 밤 꿈꾸던 인도양이나 태평양의 파라다이스 대신 서울 시내나 부산이나 제주도의 호텔에서 첫날밤을 맞이하리라. 이동의 제약이 많으니 주로 방안에서 지내게 될 테고 허니문 사진도 남길 만한 게 별로 없겠다.
이들이 10년 후, 20년, 아니 40년 후쯤 이날의 결혼식을 자식에게 어떻게 회상할까. 자식은 주례 선생님, 양쪽의 할아버지 할머니, 손님들이 모두 하얀 마스크를 쓴 걸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그때는 코로나19라는 나쁜 전염병이 있었단다. 체온이 정상인 사람들만  돌아다닐 수 있었고 모두들 어디서든 마스크를 써야 했단다. 모두들 힘들어했지만 그래도 잘 버텨내서 너희들을 이렇게 키웠잖니. 너희는 상상할 수 없는 시절의 이야기란다.”

그때는 마스크가 과거의 유품이기를, 이런 결혼식이 잠시 2020년 한 때의 삽화로 기억되길 진정 바란다. 오늘 가약을 맺은 이 땅 모든 신랑신부의 백년해로를 빌며.

한기봉

◆ 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언론과 글쓰기를 강의했고, 언론중재위원을 지냈다. hkb8210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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