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사흘 동안 내렸어요. 강아지 똥은 온 몸이 비에 맞아 잘디잘게 부서졌어요. 부서진 채 땅 속으로 스며들어가 민들레 뿌리로 모여 들었어요. 줄기를 타고 올라가 꽃봉오리를 맺었어요. 봄이 한창인 어느 날 민들레 싹은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을 피웠어요. 향긋한 꽃 냄새가 바람을 타고 퍼져 나갔어요. 방긋방긋 웃는 꽃송이엔 귀여운 강아지 똥의 눈물겨운 사랑이 가득 어려 있었어요.’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린 권정생의 동화 <강아지 똥>의 끝부분이다. 가장 낮은 곳에 버려진 강아지 똥이 가장 높은 곳으로 승천하는 과정이다. 작가에게 첫 작품은 평생을 간다더니, <강아지 똥>은 이 세상에 왔다가 아름다운 여행을 마치고 떠난 그의 한 생을 응축해 놓은 느낌을 준다. 권정생, 하면 순한 얼굴과 아름다운 글, 그러나 그 앞에 늘 가난과 병마가 어른거린다.
그는 1937년 일본 도쿄 시부야 뒷골목에서 5남2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누나로부터 예수 이야기를 처음 듣고 평생 예수를 믿고 살았다. 거리 청소부였던 아버지가 따로 팔려고 쌓아둔 낡은 책 더미 사이에서 <이솝이야기>, <행복한 왕자>, <빨간 양초와 인어> 같은 동화책을 보며 홀로 글을 익혔다. 그의 동화 <슬픈 나막신>은 그 무렵 이야기다.
해방 이듬해 두 형을 일본에 남기고 가족은 귀국했다. 갈 곳이 없어 뿔뿔이 흩어져 살다가 1947년 안동 일직면 조탑리 농막에 모여 소작을 부치고 살았다. 그는 일본과 청송에서 소학교를 조금 다녔는데, 12세에 일직초등학교에 다시 입학했다. 그 와중에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대구로 피난 갔다 돌아와 17세에 초등학교를 1등으로 졸업한다. 중학교 학비를 마련하려고 나무를 해서 내다팔아 암탉을 1백 마리 넘게 키웠는데 전염병이 돌아 다 죽어버렸다. 19세, 부산에서 재봉기 상회 점원으로 일했다. 헌책방에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죄와 벌>, <레미제라블> 등을 사서 읽고 포장지에 글을 썼다. 이 때의 이야기가 동화 <별똥별>에 녹아있다. 그 무렵 결핵을 앓기 시작한다. 1년을 혼자 버티다가 늑막염에 폐결핵이 겹쳤다. 어머니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왔을 때 결핵은 폐에서 신장으로, 방광으로 전이되어 온 몸이 망가져 있었다.
‘어머니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나름대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뒤꼍 뽕나무 아래서 밤마다 몰래 기도하시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산과 들로 나가서 약초를 캐 오시고 메뚜기를 잡아 오셨다. 뱀도 잡아 오시고, 개구리도 잡아 오셨다. 아마 어머니가 잡아오신 개구리만 해도 수천마리가 넘었을 것이다. 벌레 한 마리도 죽이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시며, 생명 가진 것을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시던 어머니가 그 많은 개구리를 어떻게 잡아 껍질을 벗기셨는지, 지금도 생각하면 가엽으시다.’ 그의 자전적 산문 <오물처럼 뒹굴면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28세(1964년), 아들은 병세가 호전되어 틈틈이 써 두었던 동시 98편을 모아 동시집 <삼베치마>를 손수 만든다. 어머니는 그해 가을 쓰러져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동생을 결혼시켜 가계를 잇게 하려고 “어디 좀 있다 오라” 한다. 권정생은 4월에 집을 나와 대구, 김천, 상주, 점촌, 문경 등지를 거지로 떠돌며 걸식 연명했다. ‘상주지방, 마을 앞에 우물이 있고 늙은 소나무가 있는 외딴 집 노부부의 정다운 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 <복사꽃 외딴집>이란 동화를 썼다. 열흘 동안 매일 아침 찾아갔지만 한 번도 얼굴을 찌푸리지 않고 깡통에 밥을 꾹꾹 눌러 담아 준 점촌 조그만 식당 집 아주머니, 가로수 밑에 쓰러져 있을 때 두레박에 물을 길어 헐레벌떡 달려와 먹여주시던 그 할머니의 얼굴도…’(<오물처럼 뒹굴면서> 중에서)
결핵은 고환에까지 퍼졌다. 병든 몸으로 집에 돌아온 그를 동생이 울며 맞이한다. 그해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다. 30세, 일본 사는 형이 돈을 보내줘 한쪽 콩팥을 떼어내는 수술을 했다. 이어 방광도 들어내고 소변주머니를 달고 다녔다. 의사는 2년, 간호사는 6개월을 넘기지 못하리라 했다. 32세, 동네 일직교회 문간방으로 들어갔다. 교회 종지기로 살았다. 외풍이 심해 겨울이 되면 귀에 동상이 걸렸다가 봄이 되면 나았다.
1969년은 그의 삶에 작은 빛이 들어오는 해다. 월간 ‘기독교교육’ 제1회 기독교 아동문학현상모집에서 <강아지 똥>이 당선되었다. 상금 1만원을 받아서 쌀을 한 말 사고, 새끼 염소 한 쌍을 사서 길렀다. 1971년 대구매일 신춘문예에 <아기양의 그림자 딸랑이>가 가작으로 입선되었다. ‘1972년 12월28일, 나는 감기가 덮쳐 아침도 먹지 못한 채 누워있었다. 전날 눈이 내렸고, 그날도 잔뜩 흐린 날씨가 몹시 추웠다. 집배원이 문을 벌컥 열면서 “아재씨, 전보 왔니더”하면서 종이쪽지를 던져줬다. 결핵환자에게는 어떤 것이든 흥분은 금물이다. 그런데도 나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흥분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날 밤 심한 각혈을 했다.’(산문 <나의 동화이야기> 중에서). 그 날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무명저고리와 엄마>가 당선되었다고 통보받은 날이다.
2년 뒤인 1974년 첫 동화집 <강아지 똥>이 세상에 나왔다. 이듬해 제1회 한국아동문학상을 수상했다. 1982년부터 월간 ‘새가정’에 장편동화 <몽실 언니>를 5년간 연재했다. <몽실 언니>는 청소년 권장도서가 되었고, TV 드라마로 방영되었으며, 일본에서 번역 출간되기도 했고, 50만부 이상이 팔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는 작가로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 동네 빌뱅이 언덕 작은 오두막집에서 평생을 검약하게 살았다. 1995년 새싹회 새싹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됐을 때 “우리 아동문학이 과연 어린이들을 위해 무엇을 했기에 이런 상을 주고받습니까?”라면서 수상을 거부했다. 2003년 <강아지 똥>이 클레이 애니메이션으로 출품되어 ‘도쿄 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다. 2007년 그는 끝내 결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대구 가톨릭대학병원에서 71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이 세상 그 어느 나라에도/ 애국 애족자가 없다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 젊은이들은 나라를 위해/ 동족을 위해/ 총을 메고 전쟁터로 가지 않을테고/ 대포도 안 만들테고/ 탱크도 안 만들테고/ 핵무기도 안 만들테고…어머니들은 자식을 전쟁으로/ 잃지 않아도 될테고/ 젊은이들은/ 꽃을 사랑하고/ 연인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무지개를 사랑하고…’ 그의 시 <애국자가 없는 세상>의 부분이다. 그는 작가이며 평화주의자, 반전주의자, 생태주의자로도 평가 받지만 이 시는 그의 아나키스트 같은 일면도 보여준다.
그는 140편의 단편동화, 5편의 장편동화, 5편의 소년소설, 100편이 넘는 동시와 동요, 80여 편의 옛이야기를 재창작하고, 150여 편에 이르는 산문을 남겼다. 그리고 그의 사후 2014년, 그가 다녔던 일직초등학교가 폐교된 자리에 ‘권정생 동화나라’라는 이름으로 그가 꿈꾸었던 아이들의 작은 세상을 만들어 놓았다.
죽기 2년 전 미리 쓴 유언장에 이런 대목이 있다. ‘만약에 죽은 뒤 다시 환생을 할 수 있다면 건강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태어나서 25살 때 22살이나 23살쯤 되는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싶다. 벌벌 떨지 않고 잘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환생했을 때도 세상에는 얼간이 같은 폭군 지도자가 있을 테고 여전히 전쟁을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환생은 생각해 봐서 그만둘 수도 있다.’
그의 생에 여인은 어머니뿐이었다. 마지막 유언은 “어머니… 어머니 아아, 어머니…”였다고 한다.
◆ 이광이 작가
언론계와 공직에서 일했다. 인(仁)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애인(愛人)이라고 답한 논어 구절을 좋아한다. 사진 찍고, 글 쓰는 일이 주업이다. 탈모로 호가 반승(半僧)이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과 인문서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