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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의 ‘북캉스’

2021.07.15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

“평생 일종의 부끄러움을 남몰래 간직하면서 살아왔다. 명색이 불문학자, 그것도 현대 불문학 전공자로 통해온 내가 프루스트를 통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년이 되자 나는 이 부끄러움과 뻔뻔함을 어느 정도나마 해소하지 않고는 자괴심 때문에 편히 눈을 감을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시달리게 되었다.”

학술원 회원인 정명환(92) 서울대 불문과 명예교수가 얼마 전에 한 말이다. 그에게 부끄러움을 준 책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난해한 현대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다. 정 교수는 병상에 있으면서도 2016년부터 이 소설 독해를 시작해 최근 ‘프루스트를 읽다’라는 책을 펴냈다.

그의 고백을 들으니 나도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학자는 되지 못했지만 나도 불문학 전공자인데 그 책 못 읽었다. 그뿐이랴. 세계문학의 고전 중 백미로 평가받는, 문학사의 맨 앞줄에 있는 소설 중 읽지 못한 작품들이 제법 있다. 글에 인용하면서 읽은 척했고 아는 척했지만 다 거짓이었다.

특히 대하소설이 그렇다. 많은 작가들이 ‘인생의 책’으로 꼽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아직 통독하지 못했다는 건 오래 묻어온 부끄러움이다. 읽어야지 생각만 한 게 수십 년이 흘렀다. 영화로는 봤어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리나’도 소싯적에 읽다가 중단한 거 같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오딧세이’는 읽을 엄두를 못 냈고, 괴테의 ‘파우스트’나 단테의 ‘신곡’은 어렵고 지루할 거 같아서 첫 장 펼치기를 망설여왔다. 박경리의 ‘토지’나 조정래의 ‘아리랑’ 같은 대하소설은 욕심을 내 전집을 샀지만 책장만 차지해 남에게 주어버린 지 오래다.  

세계 고전문학이란 게 사실 그렇다. 작가와 제목과 내용과 문학적 평가는 학창 시절 수업에서, 남의 글을 통해, 때론 다이제스트를 통해 알 만큼 알아서 마치 읽은 것만 같은 착각을 준다. 의식의 흐름을 좇은, ‘20세기 최고의 소설’이니 ‘소설의 극한’이라 불리는 그 난해하고 방대한(국내선 6~10권 세트로 나왔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어도 마지막 장까지 다 읽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뒤늦게 온 장마전선이 의외로 일찍 물러갈 거라고 한다. 어쨌든 바캉스 시즌이 온다. 그런데 갈 곳은 다 막혀있다. 한 가족이 손 잡고 대문을 나서기 어렵다. 어차피 올해도 작년처럼 ‘집콕’ ‘방콕’ 해야 할 신세다. 이왕 이리 된 마당에 넷플릭스 공포영화 뒤적이지 말고 평생 처음 한 번 제대로 된 ‘북캉스’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북캉스’는 동서양에 역사가 있다. 조선의 임금들이 신하에게 하사한 건 사약(賜藥)만이 아니었다. 독서 휴가도 내렸다. 촉망받는 젊은 문신들에게 1~3개월, 길게는 3년까지 강제로 휴가를 줘서 책읽기에 전념토록 한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다. 일종의 독서안식년이다. 세종부터 영조까지 300년 이상 계속돼 48차례에 320명이 휴가를 명받았다고 한다.

세종은 신하들이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서울 옥수동 한강 변에 ‘동호당’이라는 독서당을 지었는데, 옥수동에서 약수동 고개를 넘어가는 ‘독서당길’ 연원이 여기서 유래됐다. 집현적 학자인 성삼문 신숙주부터 서거정 등 조선의 걸출한 학자들은 대개 사가문신 출신이었다.

19세기 대영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빅토리아 여왕은 신하들에게 3년에 한 달 동안 셰익스피어 책 5권을 읽고 독후감을 써내게 하는 유급 휴가를 주었다. ‘셰익스피어 베케이션’이라고 했다.

다독가도 되지 못하는 주제에 예전에 독서에 대해 강의할 기회가 있어 독서에 대한 경구를 찾아본 적이 있다. 가장 좋아했던 말이다. “책은 도끼다.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다.”(프란츠 카프카)

첫 장을 펼치는 순간 변화는 이미 시작된다고 한다. 독서가 뇌기능을 활성화한다는 건 과학적으로 수없이 증명된 사실이다. 책을 읽는 사람은 매일매일이 새롭고 주변의 것이 달라 보인다. 안 읽는 사람은 어제와 오늘이 같다. 사람을 절대 배신하지 않는 가장 확실한 것은 책이다.

지구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산다고 한다. 책을 읽는 사람과 안 읽는 사람이다. 미국의 억만장자 워렌 버핏은 깨어 있는 시간의 3분의 1을 독서에 투자했다. 처칠은 70년 간 잠자기 전 30분간 독서했다. 에디슨은 학교에서 공부 못한 문제아로 쫓겨났지만 디트로이트 도서관의 책을 다 읽어버렸다. 스티브 잡스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한 것은 스시와 책이었다.

그런데 베스트셀러보다는 인문고전이나 대문호의 소설을 읽으라는 게 작가나 독서애호가들의 공통적인 조언이다. 고전은 수백 년 살아남고 인정받은 지혜와 사상의 보고다. 고전을 읽는다는 건 역사의 천재와 일대일로 대화하는 것이다. 인문학의 위기를 언급하며 누가 말했다. 인문학을 한다고 밥이 나오진 않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밥맛이 좋아진다고.

이번 기회에 미루고 미루던 도스토예프스키를 통독할까 싶다. 마침 그의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다. 그만큼 인생과 인간이란 수수께끼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사색한 작가는 드물다. 각각 두 권으로 엮어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나 ‘죄와 벌’을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려볼까. 코로나가 저만치 달아나려나.

한기봉

◆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언론과 글쓰기를 강의했고, 언론중재위원과 신문윤리위원을 지냈다. hkb8210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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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정책브리핑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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