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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정녕 당신을 잊어주리라

[시가 된 노래, 노래가 된 시] ⑬임주리, <립스틱 짙게 바르고>

2022.03.15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

내일이면 잊으리 꼭 잊으리
립스틱 짙게 바르고
사랑이란 길지가 않더라
영원하지도 않더라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고 마는
나팔꽃보다 짧은 사랑아
속절없는 사랑아
마지막 선물 잊어 주리라
립스틱 짙게 바르고
별이 지고 이 밤도 가고 나면
내 정녕 당신을 잊어 주리라
(1987년, 양인자 작사, 김희갑 작곡)


사랑을 잃은 여성들이 눈물 흘리며 또는 이를 악물고 불렀으리라. 노래 부른다고 떠나간 이가 돌아오랴마는 실연의 아픔은 달랬으리라. 노래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 까짓 거, 깨끗이 잊으마. 사랑이 뭐 별거야? 세상에 절반은 남자인데, 이 사랑 떠나고 나면 또 다른 사랑이 찾아올지 모르는데. 잊는 게 아니라 잊어주는 거야. 내가 베푸는 거야. 이 사랑의 주인은 나거든.”

“그런데 ‘그냥’은 잊지 않아. ‘꼭’ 잊을 거야. 아니 ‘정녕’ 잊어줄 거야. 우리 사랑만은 나팔꽃이 아닐 줄 알았지. 밤에 달맞이꽃으로 다시 피어날 거라고 생각했지.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자던 알뜰한 그 맹세? 다 속절없는 기약이었어. 봄날이 가고 나면 그뿐. 뜨거운 여름이 오겠지. 사랑이 끝난다고 이 세상도 끝나고 날 위해 빛나던 모든 것도 그 빛을 잃어버릴까?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 그게 사랑이라고? 아니야, 난 더는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노래하지 않을 거야. 다시 또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을 하면 되지. 꽃잎은 시들어도 슬퍼하지 말자. 때가 되면 다시 피어날 거니까.”

“네가 준 마지막 선물도 한강에 버릴 거야, 아니 불태워 버릴 거야. 그리고 난 별이 지고 이 밤이 가고 나면 세상으로 나갈 거야. 립스틱 짙게 바르고, 거울 앞에 서서 너를 만나러 갈 때 보다 더 촉촉하고 붉디붉게 칠하고, 입술을 삐죽거리고, 턱을 치켜들고, 핸드백을 허공에 빙빙 휘두르며,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더 멋진 남자를 찾아, 더 영원한 사랑을 찾아 나갈 거야.”

인생의 총합은 사랑과 이별의 후일담이다. 자서전은 그 독후감이다.

수많은 대중가요가 사랑의 기쁨과 이별의 슬픔을 노래했다. 그런데 이 노래는 다르다. 사랑은 나팔꽃보다 짧다는 걸 깨닫고 이별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것도 주체적으로. 

그 극복은 ‘립스틱을 바르는 행위’로 상징된다. 그건 여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여자가 거울 앞에서 립스틱을 바르는 모습은 도발적이거나 비장하거나 둘 중 하나다. 여자에게 차인 뭇 사내들은 흐린 담배 연기 속에 독한 소주나 들이킬 터다.

립스틱은 ‘여심’과 동의어다. 우리 엄마들 시절에는 립스틱이라는 가볍고 세련된 말도 없었다. 그냥 ‘루주’(rouge, 프랑스어로 ‘붉은’)였고 ‘입술연지’였고 ‘구찌베니’였다. 그건 특별한 날에만 ‘칠하는’ 것이었다. 엄마가 화사한 봄날, 루주를 짙게 칠하고 짧은 치마를 입고 외출하는 날, 표정은 예사롭지 않다. 무슨 일이 터질 것만 같았다. 엄마가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소녀들은 화장대 앞에 앉아 립스틱을 바르는 엄마를 바라보며 여자가 되어갔다. 첫사랑이 눈부시게 시작되던 날 입술을 폈다 오므렸다 수줍게 발라보기도 하고, 갑작스런 이별의 통보에 사정없이 빡빡 지우기도 했다.

임주리가 1987년에 발표한 ‘립스틱 짙게 바르고’는 70, 80년대 수많은 대중가요 히트곡을 만들어낸 김희갑(작곡)-양인자(작사) 부부의 작품이다. ‘킬리만자로의 표범’ 같은 실험적이고 서사적인 가사를 써댄 작가 양인자가 아니면 나오기 힘든, 무엇보다 제목이 매우 파격적이었다. (특이한 노래 제목으로 보자면 ‘총 맞은 것처럼’(작사·작곡 방시혁, 백지영 노래)과 쌍벽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립스틱이 총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 애잔하고 처연한 곡조와 가사는 영락없는 신파 트로트다. 그런데도 그저 그런 신파로 취급되지 않고 세월이 흘러도 노래방 중년 여성의 베스트 텐으로 살아남은 건 바로 ‘립스틱’이라는 한 단어가 지닌 상징성 때문이다.

여자들은 사랑을 하기 위해, 사랑을 잊기 위해 립스틱을 바른다. 립스틱은 사랑과 이별의 증표다. 키스 마크는 러브레터다. 립스틱은 세속의 사랑처럼 아무 때나 쉽게 바를 수도 있지만 쉽게 지워지지도 않는다. 입술은 유두나 귀두처럼 껍질이라는 포장이 없는 신체 부위다. 자기 속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정분이 난 남녀는 입을 맞춘다. 그 속을 감추는 게 립스틱이다. 여성의 심경 변화를 유추할 수 있는 두 가지는 헤어스타일과 립스틱이다. 머리를 숏커트하고 등장했을 때, 화장을 않던 여자가 짓붉은 립스틱을 바르고 나타났을 때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돈다.

이 노래 다음 해에 강애리자(밴드 ‘작은별 가족’ 일원)가 부른 ‘분홍 립스틱’(강인구 작사작곡)이란 노래가 있었다. 꽤 유행했다. “사랑은 눈부시게 시작됐지만/이제는 지워진 분홍립스틱/.../오늘 밤만은 그댈 위해서/분홍의 립스틱을 바르겠어요/그대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분홍의 입술 자욱 새기겠어요”라며 노래한다. 미련인가, 애증인가. 

립스틱의 또 다른 얼굴은 ‘유혹’과 ‘도발’이다. 남성의 셔츠깃에 묻은 립스틱 자국은 치정의 흔적이요, 와인글래스에 선명히 찍힌 입술은 유혹의 시그널이다. 여성이 모델로 나오는 광고에 맨 입술은 없다. 색깔은 짙을수록 고혹적이다. 핑크보다는 레드, 브라운보다는 코랄이 사내의 눈길을 침탈한다. 여자는 기분에 따라, 상대에 따라 색깔로 마술을 부린다. 마치 조향사처럼.

이하이는 노래 ‘빨간 립스틱’(2021년)에서 “오늘 밤은 이 분위기에 취해/아무런 생각 없이/.../내 맘을 흔들어봐/빨간 립스틱 진하게 바르고/이 밤이 지나가기 전에/.../우리 하나 될 때까지”라고 도발한다.

이 노래는 당대 최고 인기를 누리던 이은하에게 예약된 노래였다고 한다. 임주리가 우연히 김희갑 부부 집에 놀러갔다가 피아노 건반 위에 놓인 이 악보를 보고 너무 마음에 들어서 자기한테 달라고 졸라서 주인이 바뀌었다. 가수만 바뀐 게 아니라 무명에 가까웠던 가수의 운명도 바꾸었다.

노래는 발표 당시에는 히트하지 못했다. ‘립스틱을 왜 짙게 바르냐’, ‘가사가 야하다’ 등의 이유로 적극적 홍보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6년이 지난 1993년 MBC 66부작 드라마 ‘엄마의 바다’(김정수 극본)에서 주인공 김혜자가 이 노래를 불렀다. 그 순간 역주행이 가요계를 강타했다. 돌연한 가장의 죽음으로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한 가족을 이끌기 위해 나약한 여자에서 강한 어머니로 변모해가는 김혜자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홈멜로 드라마였다. ‘립스틱 짙게 바르고’는 당당하게 세상에 맞서는 여주인공의 결연한 의지였다.

1987년에 나온 임주리의 앨범 재킷. 사이드B의 맨 앞에 ‘립스틱 짙게 바르고’가 있었다. 이 노래는 6년 후 MBC 드라마 ‘엄마의 바다’에서 주인공 김혜자가 부르면서 역주행이 시작됐다.
1987년에 나온 임주리의 앨범 재킷. 사이드B의 맨 앞에 ‘립스틱 짙게 바르고’가 있었다. 이 노래는 6년 후 MBC 드라마 ‘엄마의 바다’에서 주인공 김혜자가 부르면서 역주행이 시작됐다.

가요계를 미련 없이 떠나 미국에 살던 임주리는 급거 귀국하고 하루아침에 최고 인기가수 반열에 오른다. 쉽고 특이한 가사는 1994년 KBS ‘한국 노랫말 대상’을 받았다.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임주리도 출연했다. 노래가 대박나면서 립스틱 판매율이 30%나 올랐다. 임주리에겐 립스틱 선물이 쏟아졌고 공연장에서는 립스틱이 뿌려졌다. 임주리는 기세를 타서 화장품 사업에 진출했으나 사업과 노래는 소질이 달랐다.

임주리는 외아들이 가수가 되는 걸 바라지 않았지만 DNA는 어쩔 수가 없었다. 아들은 ‘재하’라는 이름의 트로트 가수로 활동하다 2021년 2월 KBS ‘트롯 전국체전’에서 준우승을 하며 엄마처럼 단박에 이름을 알렸다. 엄마의 이 노래를 불러 우승 후보 1순위로 떠오르며 엄청난 조회 수를 기록했다. 그 후 모자는 이 프로그램 스페셜 무대에서 이 노래를 함께 부르며 눈시울을 적셨다.

임주리는 “그땐 모든 게 힘들었다. 만약 이 곡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도 나와 재하는 미국에서 이름 없이 살고 있었을 것이다”고 했다.

2021년 3월 임주리-재하 모녀가 KBS ‘트롯전국체전’ 스페셜 무대에서 ‘립스틱 짙게 바르고’를 부르고 있다. (유튜브 캡처)
2021년 3월 임주리-재하 모녀가 KBS ‘트롯전국체전’ 스페셜 무대에서 ‘립스틱 짙게 바르고’를 부르고 있다. (유튜브 캡처)

지금의 청춘들에게 이 노래는 가슴에 와닿지 않을지 모른다. 그냥 엄마의 영원한 18번이다. 이제 립스틱은 흔한 화장품이다. 1만~2만 원 안팎에 수많은 브랜드가 있고 명품도 5만~10만 원이면 산다. 80년대만 해도 해외여행의 단골 선물은 샤넬, 입생로랑, 구찌, 게를랭 립스틱이었다. 젊은 여성들은 오늘도 지하철 안에서 입술을 내밀며 립스틱 뚜껑을 연다. 

립스틱을 바르지 않고는 외출하지 않았다는 코코 사넬은 말했다.
“립스틱은 여자의 가장 중요한 무기다.”
 
[립스틱의 역사]
                
립스틱은 인류의 긴 역사와 함께 하며 부침을 겪었다. 고대부터 여성들은 입술에 화장을 하고 싶은 욕구가 강했다.

황토나 유지, 안료, 동식물 등을 사용한 여성의 입술화장은 5000년 전 고대 이집트에서부터 있었다. 클레오파트라는 붉은 입술로 시저를, 안토니우스를 유혹했다. 빨간 성분을 지닌 벌레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중세는 립스틱이 악마의 상징으로 취급받던 시대였다. 16세기 영국을 강대국으로 만든 엘리자베스 여왕1세는 립스틱 애호가였다. 밀랍과 붉은 식물성 염료로 만들었다. 유럽 상류층 남성들도 립스틱을 발랐다. 그러다 1800년대 립스틱은 매춘부의 표식으로 비하됐다.

지금의 스틱 형태는 1871년 프랑스 게를랭사가 만들었다. 금속통 속에 슬라이딩 튜브를 넣어 바르기 좋은 지금 형태의 립스틱은 1915년 미국의 발명가 모리스 레비라는 사람에 의해 탄생했다.
 
립스틱은 사회경제적 의미도 내포한다. 짧은 치마 길이와 함께 불경기의 상징이 됐다. ‘립스틱 효과(Lipstick Effect)’라는 용어는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 때처럼 불경기가 닥치면 가격은 싸지만 화려하고 만족도는 높은 기호품의 판매량이 증가한다는 소비심리를 일컫는 말이다. 화장품 회사인 에스티 로더는 이 둘의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립스틱 지수(Lipstick Index)’를 발표한다. 립스틱 판매량으로 경기를 가늠하는 것이다.

립스틱은 탈브라와 함께 여성해방의 상징이기도 했다. 1912년 일단의 여성들은 뉴욕에서 열린 여성 참정권 촉구 시위에서 입술에 립스틱을 짙게 바르고 거리를 행진하며 여성의 권리를 외쳤다.

20세기에 들어와 대중문화가 발전하면서 메이크업은 연예계나 음지 여성들의 전유물이라는 편견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1933년 패션바이블 ‘보그’는 립스틱은 여성을 위한 가장 중요한 화장품이라고 선언했다. 립스틱의 유행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영화와 로큰롤이었다. 코로나 시대를 맞아 립스틱 산업은 마스크의 기세에 눌려 있지만 마스크를 벗는 날, 립스틱은 화려한 부활을 꿈꾼다.

한기봉

◆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언론과 글쓰기를 강의했고, 언론중재위원과 신문윤리위원을 지냈다. hkb8210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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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정책브리핑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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