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내 곁에 선 순간
그 눈빛이 너무 좋아
어제는 울었지만
오늘은 당신 땜에
내일은 행복할 거야
얼굴도 아니 멋도 아니 아니
부드러운 사랑만이 필요했어요
지나간 세월 모두 잊어버리게
당신 없인 아무것도
이젠 할 수 없어
사랑밖엔 난 몰라
무심히 버려진 날 위해
울어주던 단 한 사람
커다란 어깨 위에 기대고 싶은
꿈을 당신은 깨지 말아요
이날을 언제나 기다려왔어요
서러운 세월만큼 안아주세요
그리움 바람처럼 사라질까 봐
사랑하다 헤어지면 다시
보고 싶고
당신이 너무 좋아
(1987년, 작사·작곡·노래 심수봉)
이 가사는 꽤 통속적이다. 시적(詩的) 정취나 고상한 표현은 없다. ‘그냥’ 당신이 좋다는 얘기다. 세상에 버려진 내가 당신을 만나서 행복하고 그 어깨에 기대고 싶으니 지나간 서러운 세월만큼 안아달라는 거다. 이제는 당신 없인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는 고백이다.
그런데 이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 정말 많다. 노래방에서 중년의 애창곡 10위 안에 든다. 이상하게 나이 먹어가며 점점 좋아지는 노래다. 이 노래를 쓰고 만들고 부른 심수봉도 자기 노래 중 가장 애착이 가는 곡이라고 했다.
사실 대중가요가 문학적 가사를 요구할 이유는 없다. 이 연재물의 제목은 ‘시가 된 노래’로,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난 노랫말을 입힌 가요를 다루어 왔다. 그래서 이 노래의 선택은 좀 의외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변명은 이렇다. 애초에는 한 몸이었던 시와 노래의 공통적 사명이 있다면 그건 영혼의 위안이라고 하겠다. 그럼 문학적으로 조탁된 가사만이 지치고 허전한 마음을 달래줄까. 어쩌면 위대한 시 열 줄이 B급 정서의 통속적인 가사 한 줄을 이기지 못할지 모른다. 시는 정적이지만 노래는 동적이다. 가수의 음색과 리듬이 입혀진다. 그래서 가사는 글로 읽히는 게 아니라 온몸으로 허공에 불려지는 것이다. 시집을 읽고 눈시울 붉히긴 어려워도 노래 하나에 우리는 눈물을 흘린다.
‘사랑밖에 난 몰라’ 가사는 혼잣말이다. 구어체라서 귀에 바로 들어온다. 해석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이 노래 가사의 백미는 ‘당신 없인 아무것도 이젠 할 수 없어. 사랑밖에 난 몰라’다. 사랑하는 이의 귓속에 속삭이는 말 같다. 이 말처럼 나를 다 벗어던진, 모든 여타의 것을 다 포기해버린 사랑 타령이 있을까.
사랑은 눈을 뜨게도 하지만 눈을 멀게도 한다. 대체로 사랑할 땐 눈이 멀고 헤어질 때면 비로소 눈을 뜬다. 사랑에 빠졌을 때 당신이 부재하면 난 정지 상태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OO밖에 난 몰라’는 아이의 어법이다. 아이는 좋아하는 것만 옆에 있으면 행복하다. 그것이 눈앞에서 사라지면 울어버린다. 사랑의 원형질은 그렇게 아이처럼 단순한 거다.
“사랑밖에 난 몰라”는 “당신을 사랑해”와 다르다. “나를 버리면 안 되는 거 알지?”라는 의중이 담겨있다. “사랑해”라는 말보다 백 배 무섭다. 어쩌면 투정이자 협박이다. 대중가요 제목으로서 백지영의 ‘총 맞은 것처럼’과 같이 강렬하다. ‘당신만을 사랑해’라고 제목을 달았다면 이 노래는 이만큼 사랑받지 못했을지 모른다. 사랑받고 싶은 여자의 마음, 사랑하는 남자에게 모든 것을 거는 여자의 마음을 정말 단순 솔직 절박하게 표현한 한 줄이다. 좋은 이유도 그렇다. 얼굴도 아니고 멋도 아니고 그냥 부드러운 사랑이면 된다. 날 위해 울어주고 커다란 어깨만 내주면 된다.
이쯤에서 이 영화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임순례 감독의 2001년 수작 ‘와이키키 브라더스’다. 이 영화를 본 사람이 이 노래를 듣는다면 자동적으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오버랩되면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일 거다.
지방 소도시의 카바레와 행사를 전전하는 한물 간 밴드, 미래라고는 없는 상처 받고 비루한 아웃사이더들의 이야기다. 노래 ‘사랑밖에 난 몰라’는 이 영화의 그 유명한 엔딩 장면에서 불린다.
고교 시절부터 밴드를 하며 음악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가득 찼던 성우(이얼, 작년에 사망)는 실패한 인간이다. 고향 수안보 온천에 내려와 와이키키 호텔 나이트클럽에서 밴드 리더로, 또는 룸살롱 출장 1인 밴드로 온갖 수모를 겪으며 살아간다. 성우는 이곳에서 여고 밴드 싱어였던 첫사랑 인희(오지혜)를 만난다. 인희도 꿈을 잃고 남편과 사별한 후 트럭 야채 장사를 하며 억척스러운 아낙으로 살고 있다. 궁핍의 나락에 빠진 밴드 팀원들은 사고를 치거나 떠나고 설 무대가 없는 성우는 인희를 데리고 여수로 내려간다.
여수의 한 퇴락한 카바레. 어두운 무대. 성우의 기타 반주에 인희가 무대에 올랐다. 여고 밴드 시절 발랄하게 ‘I love rock&roll’을 불러대던 소녀가 트롯 ‘사랑밖엔 난 몰라’를 부른다. 새빨간 립스틱, 가슴이 파인 반짝이 드레스, 카바레 가수 스타일의 관능적 몸짓…. 애잔한 모습이다.
노래 막간에 인희는 성우를 지긋이 바라본다. 사랑스러운 눈빛이다. 성우는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행복하게 미소짓는다. 카메라가 뒤로 빠지면서 화면이 홀 전체를 비춘다. 밀착한 남녀들, 껴안고 블루스를 추는 중년의 남녀들. “사랑하다 헤어지면 다시~ 보고 싶고 당신이 너무 좋아” 노래는 끝을 향해 가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인희가 한 곡을 온전히 부르는 롱테이크다.
많은 이들이 한국 영화 최고의 라스트 신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얼마나 쓸쓸하면서 아름다운지 모르겠다. 먹먹함이 목구멍까지 차오른다. 삶이란 정녕 이런 것인가. 고단하고 남루하지만 계속할 수밖에 없는 삶. 그 속에서 한순간 스쳐가는 사랑.
노래 ‘사랑밖에 난 몰라’는 이 엔딩 장면으로 결코 벗을 수 없는 비감과 애상의 옷을 입었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빈속에 쏟아붓는 깡소주’라는 평과 함께 이 영화에 만점을 주었다.
심수봉(68)은 출중한 싱어송라이터이자 ‘트로트 발라드’라는 장르를 꽃 피운 아티스트다. 특유의 비음은 ‘사랑밖에 난 몰라’의 정서와 어울린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 노래에 대해 “인생의 모든 해답은 사랑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길 수 있고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답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1994년 그가 펴낸 고백 수기의 제목도 ‘사랑밖엔 난 몰라’였다. 이 노래는 1987년 나온 그의 세 번째 앨범에 실렸다.
심수봉이 없었더라면 우리 사회는 그만큼 허전했을 것이다. ‘그때 그 사람’,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미워요’, ‘당신은 누구시길래’, ‘여자이니까’, ‘비나리’, ‘백만 송이 장미’가 있어서 우린 쓸쓸하기도 하고 쓸쓸하지 않기도 하다.
◆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언론과 글쓰기를 강의했고, 언론중재위원과 신문윤리위원을 지냈다. hkb82107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