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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또 얼마나 어렵게 사랑을 해야 하는가

[시가 된 노래, 노래가 된 시] (45) 조동진, 나뭇잎 사이로

2024.09.25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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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진(1947~2017)의 노래는 담담하다. 무심하다. 그의 삶이 그랬던 것처럼 욕심이 없다. 한국 대중가요사에 이런 ‘시인’이 존재했다는 건 참으로 다행스럽다.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

나뭇잎 사이로 파란 가로등
그 불빛 아래로 너의 야윈 얼굴
지붕들 사이로 좁다란 하늘
그 하늘 아래로 사람들 물결
여름은 벌써 가 버렸나
거리엔 어느새 서늘한 바람
계절은 이렇게 쉽게 오가는데
우린 또 얼마나 어렵게 사랑해야 하는지

나뭇잎 사이로 여린 별 하나
그 별빛 아래로 너의 작은 꿈이
어둠은 벌써 밀려 왔나
거리엔 어느새 정다운 불빛
그 빛은 언제나 눈앞에 있는데
우린 또 얼마나 먼 길을 돌아가야 하는지
나뭇잎 사이로 파란 가로등
그 불빛 아래로 너의 야윈 얼굴 

(1980년, 조동진 작사·작곡·노래, 2집)

노래의 배경에 맞는 계절에 조용히 그의 노래를 듣는다. 유난히 길고 독했던 폭염도 가셨다. 계절은 아무리 견고한 척 굴어도 결국은 이렇게 물러서고야 만다.  

사랑은 그렇지 않다고 우기지 말 일이다. 영원히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힘겹다. 무성했던 나뭇잎이 하나둘 떨어지듯 너와 나도 때가 오면 작별해야 할지 모른다. 우린 또 얼마나 어렵게 사랑을 시작해야 하는가.

어둠이 밀려와 거리엔 언제나처럼 정다운 불빛이 켜졌다. 하지만 삶은 언제나처럼이 아니다. 이승의 삶은 얼마나 먼 길을 돌고 돌아가야 그 끝이 보일 것인가. 나뭇잎 사이로 여린 별이 보인다. 너에겐 작은 꿈이 있었지. 파란 가로등 불빛 아래 너의 얼굴은 야위었다.

고독을 모르는 자는 이 노래를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사랑의 정체를 모르는 자는 이 노래를 들으며 눈물방울을 떨굴 자격이 없다.

노랫말은 감상과 과잉을 다 털어냈다. 세월의 무상함을, 사랑의 덧없음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저 나뭇잎 사이로 투영되는 것들을 통해 촉감하고 예감할 뿐이다. 노래는 맑은 기타의 울림 속에서 한편의 시화(詩畵)처럼 다가온다. 

조동진(1947~2017)의 노래는 담담하다. 무심하다. 그의 삶이 그랬던 것처럼 욕심이 없다. 

한국 대중가요사에 이런 ‘시인’이 존재했다는 건 참으로 다행스럽다. 누구는 그를 한국의 밥 딜런이니 레너드 코헨이라고도 했다.      

그의 노래엔 포크 가수들이 자주 드러내던 저항적 이미지와 이데올로기가 전혀 없다. 그저 세상을, 자연을, 세월을 담담하고 겸손하게 관조할 뿐이다. 70년대 포크의 3대 가수로 꼽히는 김민기(‘아침이슬’, 시류에 의해 저항의 상징이 되었지만)나 한대수(‘물 좀 주소’), 양병집이 저항을 택했다면 조동진은 진정한 자연주의자, 창작주의자로 한국 포크의 영적(spiritual) 서정성을 드높인 뮤지션이다.

‘제비꽃’이 실린 조동진 3집 앨범(1985년). 흑백 바탕에 자주색 제비꽃 한 송이가 그려져있다.(사진=네이버 지식백과)
‘제비꽃’이 실린 조동진 3집 앨범(1985년). 흑백 바탕에 자주색 제비꽃 한 송이가 그려져있다.(사진=네이버 지식백과)

그가 남긴 또 다른 명곡 ‘제비꽃’(1985년, 3집 타이틀곡)이다. 

“내가 처음 너를 만났을 땐 너는 작은 소녀였고/머리엔 제비꽃/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아주 멀리 새처럼 날고 싶어/내가 다시 너를 만났을 땐 너는 많이 야위었고/이마에 땀방울/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아주 작은 일에도 눈물이 나와/내가 마지막 너를 보았을 땐 너는 아주 평화롭고 창너머 먼 눈길/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아주 한밤중에도 깨어있고 싶어” 

황순원의 짧은 소설 ‘소나기’가 오버랩된다.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소박하고 작은 꽃에서 삶과 죽음의 이미지를 이토록 나지막하면서도 비극적으로 환치했는지 눈물이 날 정도다. 아마도 불치의 병을 앓고 있던 소녀는 꿈과 자유(새처럼 날고 싶은), 현실과 슬픔(아주 작은 일에도 눈물이 나는), 절망과 달관(아주 한밤중에도 깨어있고 싶어)으로 변해간 이승에 짧게 머물렀다. 떠나는 소녀의 머리에도 제비꽃이 꽂혔을까.  

조동진은 주변에 있는 작고 아름답고 것에서 의미를 건져올리는 음유시인이다. 시인 안도현은 ‘제비꽃은 허리를 낮출 줄 아는 사람에게만 보인다’고 했다. (‘제비꽃에 대하여’에서).  

고은의 짧은 시에 붙인 노래 ‘작은 배’ (1979년, 1집). 조동진은 스스로를 떠나고 싶지만 너무 작아서 떠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을까. 

“배가 있었네/작은 배가 있었네/아주 작은 배가 있었네/작은 배로는 떠날 수 없네/아주 멀리 떠날 수 없네”

같은 1집의 타이틀곡 ‘행복한 사람’에서는 묻는다. 얼마나 많은 힘든 이들이 이 노래를 듣고 위안과 용기를 얻었을까. 

“울고 있나요 당신은 울고 있나요/아아~그러나 당신은 행복한 사람/아직도 남은 별 찾을 수 있는/그렇게 아름다운 두 눈이 있으니/외로운가요 당신은 외로운가요/아아~ 그러나 당신은 행복한 사람/아직도 바람결 느낄 수 있는 그렇게 아름다운 그 마음 있으니”                                             

제주에 칩거하다 2016년 21년 만에 낸 마지막 6집 앨범(2017년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음반상’과 ‘최우수 팝 음반상’ 수상)의 타이틀곡 ‘나무가 되어’는 굳이 노래로 듣지 않고 시로 읽어도 된다. 

“나는 거기 다가갈 수 없으니/그대 너무 멀리 있지 않기를/나는 별빛 내린 나무가 되어/이전처럼 움직일 수가 없어/나는 다시 돌이킬 수 없으니/그대 너무 외면하지 않기를/나는 하늘 가린 나무가 되어/예전처럼 노래할 수도 없어/..../나는 이제 따라갈 수 없으니/그대 홀로 떠나갈 수 있기를/나는 비에 젖은 나무가 되어/예전처럼 외로움조차 없어”

우리는 그동안 조동진에게 아주 많이 인색했다. 동시대의 아티스트들에 비해 그에 대한 평가는 정당하지 못했다. 올해 하늘의 별이 된 김민기(전편 기술)는 젊은이들에게도 잘 알려졌지만 80~90년대 포크음악의 지존이었던 조동진 석 자는 여전히 낯설다. 그는 평생 ‘대중적’이지 않은 인간이었다. TV 출연도, 콘서트도 별로 하지 않았다.

시류를 타지 못해서였을까, 광장에서 불리지 않아서였을까, 금지곡이 없어서였을까. 

가사와 멜로디에서 관조적이고 명상적인 깊이로 치자면 그는 김민기보다 그윽하다. 김민기는 때로 공장이나 기지촌 같은 현실세계의 곡을 썼고 이어 연극과 뮤지컬에 평생을 바쳤지만, 조동진은 평생을 현실과 동떨어진 위치에서 그저 맑고 순수하고 고독하게 언더의 음악세계를 견지해온 아티스트였다. 

두 뮤지션이 세상의 전면에 나서지 않은 것은 같은데, 전자는 그래도 연극 무대의 ‘뒷것’으로 존재했지만, 후자는 평생 ‘아랫것’(언더그라운드)으로 있다가 2017년 여름날 70세 나이로 앨범 6집만을 단촐하게 남기고 홀연히 떠났다. 

조동진은 2017년 8월 28일 하늘로 떠났다. 이미 몸에 퍼진 방광암을 늦게 발견했다. 그는 9월 16일로 예정된 콘서트 ‘조동진 꿈의 작업 2017-우리 같이 있을 동안에’를 준비 중이었다. 마치 끝을 예견한 듯했다. 후배 가수들은 콘서트를 취소하지 않고 그 제목 그대로, 그 날짜에 공연을 했다. 존경과 감사, 추모를 담은 헌정 공연이 되었다.(사진=음반기획사 ‘푸른곰팡이’ 제공)
조동진은 2017년 8월 28일 하늘로 떠났다. 이미 몸에 퍼진 방광암을 늦게 발견했다. 그는 9월 16일로 예정된 콘서트 ‘조동진 꿈의 작업 2017-우리 같이 있을 동안에’를 준비 중이었다. 마치 끝을 예견한 듯했다. 후배 가수들은 콘서트를 취소하지 않고 그 제목 그대로, 그 날짜에 공연을 했다. 존경과 감사, 추모를 담은 헌정 공연이 되었다.(사진=음반기획사 ‘푸른곰팡이’ 제공)

하지만 일단의 가수들에게 조동진이라는 이름은 ‘대부’로 불렸듯 절대적이었다. 조동진의 음악 아우라 속에는 지금도 사랑받는 수많은 가수들이 포진해 있었고, 그들은 조동진의 음악적 수혜(프로듀싱)와 영감을 받았다. 

조동진은 당시 유명했든 유명하지 않았든 포크를 하는 가수들이 집결한 음악공동체 ‘하나음악’의 정신적 지주이자 스승이었다. 사람들은 그 집단을 그냥 ‘조동진 사단’이라고 했다. 그의 서초동 집은 당시 언더그라운드 포크 가수들의 사랑방이기도 했다. 

그 인물들의 면면을 보자. 조동익(동생, 싱어송라이터), 이병우(기타리스트), 장필순, 김광석, 조규찬, 유희열, 하덕규(시인과 촌장), 전인권(들국화), 이주호(해바라기), 김현식, 한영애, 이소라, 윤종신, 김현철, 박기영, 김장훈, 함춘호, 정원영(연주자, 싱어송라이터) 등이다. 

조동진은 하나음악을 세우기 전 당대 최고의 음반기획사 ‘동아기획’에서 맏형 노릇을 했는데 거기 있던 뮤지션들이 그 후에도 직간접으로 조동진과 함께 했다. 조동진은 1989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유재하 음악경연대회’의 첫 주최자이기도 했을 만큼 후배들을 키우는 데 열성적이었다.

1947년 경남 고성군에서 태어난 조동진의 가계에는 예인의 피가 흐른다. 그의 아버지는 음악을 전공했다가 영화감독이 된 조긍하(1919~1982)다. 조긍하는 ‘황진이’(1957년, 도금봉 데뷔작), ‘과부’(1960년, 신영균 데뷔작), ‘육체의 길’(1959년, 김승호-김지미) 등 한국 영화사에 남은 작품을 만들었다. 조동진의 동생은 평생 함께 음악을 해온 아티스트 조동익(장필순과 결혼)이고 여동생 조동희도 음악을 한다.

조동진은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중퇴하고 5인조 그룹사운드 ‘쉐그린’을 결성해 미8군에서 음악활동을 시작했다가 1979년 32세 늦은 나이에 훗날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선정된 솔로 1집 앨범을 발표했다. 예술의전당은 1994년 한국 대중가수 최초로 조동진에게 문을 열어 그의 작가주의를 예우했다. 그는 1996년 5집 앨범 발표 이후 제주에서 칩거했고 2017년 방광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음악평론가 김작가는 “조동진은 한국 대중음악계 모더니즘의 창시자다.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대중음악의 세련미를 완성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1980~1990년대 대중음악계는 조동진을 빼고는 성립하기 어렵다”고 평했다.


한기봉

◆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언론과 글쓰기를 강의했고, 언론중재위원과 신문윤리위원을 지냈다. hkb8210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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