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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컬 기행

제천 배론성지와 산야(山野) 곤드레밥

[로컬 기행] 100가지 지역문화 -로컬100 탐방 - 신앙이 깃든 소박한 맛 ‘곤드레밥’

2025.01.06 이윤희 방송작가, 로컬문화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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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 년 전, 배론의 사람들도 이리 드셨을까? 풀떼기 겨우 입에 칠하는 정도였겠지만 산야의 거친 생명력이 그들의 생을 구원했겠지. 2025년의 시작, 배론성지에서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한해의 안녕과 모두의 평화, 그리고 무탈을 빈다.
이윤희 방송작가, 로컬문화 전문가
이윤희 방송작가, 로컬문화 전문가

로컬100(지역문화매력100선)에 대한 글을 쓰겠다고 생각한 뒤, 전국 지도를 펼쳐두고 나름 이번엔 어딜 찾아갈지 행복한 고민을 한다.

좁은 땅덩어리지만 이토록이나 많은 축제와 문화유산이 가득한 나라라니! 국민발굴단의 추천을 받은 후보 461개 중 100개를 엄선하기까지, 그 얼마나 고심이 깊었을지 잠깐 가늠해 본다. 연말연시를 맞아 특별한 목적지를 고심하던 내 눈에 띈 것은 ‘배론성지’다.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익히 알려진 성지순례 포인트 배론성지가 로컬100에 올랐다니 흥미롭다.

경기도 양평군의 용문사, 경북 청도의 운문사 등 수천 년 역사를 지닌 불교 유적이 손에 꼽히는 건 이상하지 않으나, 명동성당이나 당진의 솔뫼성지 등 하고 많은 천주교 유적 중에서 왜 하필 배론성지가 이름을 올렸는지 궁금했다.

궁금하면 직접 들여다보아야 하는 법! 세찬 칼바람을 뚫고 청풍명월의 땅, 충북 제천으로 향한다.

북으로는 강원도 원주와 영월을 경계 삼은 제천시는 좌우로는 단양과 충주, 아래로는 경북 문경을 이웃한 충북의 중심이다.

월악산을 비롯해 금수산, 비봉산 등 이름 대면 알만한 산들이 에두르고 드넓은 호반 ‘충주호’가 펼쳐진 땅, 산 깊은 곳, 물도 깊다고 했던가. 제천은 가히 산자수명한 고장이라 할 수 있다.

그 옛날 박해를 피해 숨어든 천주교인들이 일군 마을답게 배론성지는 제천에서도 아주 깊숙하고도 은밀한 땅에 자리 잡았기에 구불구불한 산길을 제법 올라가야 한다.

‘배론’이라고 하면 당최 우리말이 맞나 싶지만 계곡이 뒤집은 배 형상을 닮았다고 ‘배론(舟論)’이라 불린다. 특이하고도 은밀하다 싶어 이름을 되뇌며 성지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왜 로컬100이 배론성지를 선정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깊은 산들이 아늑하게 감싼 마을. 아니 성지를 관통하는 냇물과 연못이 황량한 계절에도 멋과 운치를 자아냈다. 실로 거룩하고 아름다운 신(神)의 정원이라 부를 만했다.

입구에서 바라본 배론 성지.(필자 제공)
입구에서 바라본 배론 성지.(필자 제공)

지금에야 찾아가는 관광지가 됐지만, 배론의 삶은 척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여기 배론성지를 이해하자면 저 아득한 17세기부터 들여다 봐야한다.

익히 알다시피 주자학을 숭상한 조선 사회에서 만인의 평등과 하느님을 믿고 조상에 제사를 지내지 않는 천주교는 쉽사리 인정될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천주교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선교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수광, 이익 같은 실학자를 중심으로 ‘학문’으로 먼저 받아들여졌다.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유명한 실학자 정약용, 정약종, 정약전 3형제와 정약용의 외종 윤지충, 권상연 등도 초기 천주교회 창설 인물이었다.

글을 아는 양반들이 먼저 믿기 시작하고 여자와 양인, 천민들에게 알음알음 퍼지기 시작한 천주교의 교세 확장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러던 1791년, 전라도 진산(現 금산군)에 살던 윤지충, 권상연이 부모 제사를 거부하고 위패를 불태운, 이른바 ‘진산사건’이 터졌다. “감히 조상 위패를 불태우다니!” 조정은 들끓었다.

제사 거부는 유학의 핵심인 ‘효’를 부정하는 일이며, 이는 곧 나라의 어버이 되는 왕에 대한 ‘충’을 부정하는 행위였다.

두 사람은 곧바로 극형에 처했고 이들은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가 됐다.

그리고 강상 윤리를 저버린 대역죄인의 집을 헐고 집터를 연못으로 만드는 파가(破家)저택의 처분까지 받게 됐다.

이제 천주교는 미풍양속과 인륜을 어기는 종교로 인식됐고 천주교인들은 박해의 대상이 됐다.

정조의 총애를 받던 정약용도 1801년(순조 1년) 신유년의 박해를 피할 수는 없었다.

셋째 형 정약종은 끝내 배교를 거부해 순교하고, 정약용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난다.

그러나 당쟁으로 얼룩진 조정은 천주교 탄압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하여 역사는 피비린내 나는 또 하나의 사건을 낳고 만다. 이른바 황사영 백서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황사영은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의 사위로 굳은 신앙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런데 정약용이 체포되어 국문을 받던 중 그만, 조카사위 황사영을 고변하고 만다.

가까스로 한성에서 탈출한 황사영이 숨어 깃든 곳이 바로 여기 충청도 배론이다. 옹기를 만들며 생계를 잇던 천주교인의 마을에서 황사영은 옹기 굴로 가장한 토굴에서 여러 날 숨어 지냈다.

눈엣가시였던 남인의 씨를 말리려던 노론은 정순왕후와 손을 잡아 황사영을 반드시 체포하라는 특별명령을 여러 차례 내렸고, 조정의 독촉이 심해지자, 함경도에서 가짜 황사영을 체포하여 한성으로 압송하기까지 했다.

마침내 황사영은 여기 배론의 토굴에서 탄압받는 한국 천주교의 상황과 외세의 침공을 동원해서라도 신앙의 자유를 달라고 청나라 조정에 도움을 전하는 문제의 서신을 쓴다.

흰색 명주 천에 쓴 글이기에 ‘백서(帛書)’라고 하는데, 가로 62cm, 세로 40cm의 작은 비단에 아주 가는 붓으로 무려 1만 3311자의 방대한 내용을 기록했다.

그러나 역사는 황사영의 편이 아니었으며 정약용 형제의 편도 아니었다.

백서는 끝내 중국에 전달되지 못했고 배론에서 붙잡힌 황사영은 대역죄로 능지처참당했다.

아내는 제주 노비로 끌려갔고, 종들은 머나먼 함경도 삼수갑산으로 귀양 갔다.

황사영이 극형을 당한 다음 날 그의 집도 헐어 버리고 웅덩이를 파서 물이 고이게 했다. 파가저택이었다.

노론은 “천 사람을 죽여도 정약용 하나를 죽이지 못하면 아무도 죽이지 못한 것과 같다”라고  외치며 정약용까지 죽이려 했으나 관련 증거 부족으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길고 긴 유배에 처해진다.

그리고 나라까지 팔아먹는다고 낙인찍힌 천주교인은 이후도 당파싸움에 휘말려 1866년 병인박해까지 4차례의 박해로 무려 만 명 넘게 순교하게 된다.

신유박해와 황사영 백서라는 극적인 사건의 중심 무대 배론은 지금은 이름 높은 성지로 전국 각지의 순례자들과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옹기를 구워 팔며 연명하던 당시 천주교인들의 생활상은 물론, 황사영이 숨어 살던 토굴과 백서를 실감 나게 재현해 놓았다.

복원한 황사영 토굴 입구, 옹기로 위장한 모습을 재현했다.(필자 제공)
복원한 황사영 토굴 입구, 옹기로 위장한 모습을 재현했다.(필자 제공)

백서의 원본은 워낙 귀중한 사료라 교황청 바티칸 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아, 절명 당시 황사영의 나이 스물여섯, 무참하게 뜨겁고도 젊은 그들이었다.

토굴 앞에 있는 초가집은 1855년 프랑스 선교사가 지은 성 요셉 신학당이다.

조선 최초의 신학교이자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으로 라틴어, 신학, 철학, 수사학 등을 가르친 곳인데 세 칸짜리 초가지붕이 종교를 떠나 당시의 생활양식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김대건 신부 다음으로 사제가 된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묘와 그를 기리는 기념성당도 볼 수 있다.

뛰어난 건축학적, 미학적 자태를 드러내는 성당과 성전은, 그 자체로 거대한 배(舟)와 같다.

결국 배론성지는 천주교 성지 이전에, 조선 후기의 생생한 한 페이지를 보여주는 문화유산인 것이다.

배론성지를 한 바퀴 도는 데 걸린 시간은 두 시간 남짓, 출출해진 배를 달랠 차례다.

제천은 어디 가나 버섯요리나 산채 요리가 지천, 오늘의 선택은 배론성지 초입에 있는 곤드레밥집이다.

그 옛날 산속 깊이 숨어든 천주교인이 할 수 있는 생업은 옹기를 굽거나 숯을 굽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리고 먹을 것이라고는 오로지 남새 푸새뿐이래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금에야 별미로 즐기는 곤드레나물이지만, 우리가 곤드레 나물을 별식으로 취급한 건 근래의 일이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곤드레나물은 보릿고개를 나는 귀한 구황작물이었다.

곤드레나물의 진짜 이름은 ‘고려엉겅퀴’.

바람이 불면 줄기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이 꼭 술 취한 사람 같다 하여 곤드레나물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데 이건 글쎄, 확인 불가능하다.

곤드레 요리야 집마다 다르지만, 생곤드레 어린순은 데쳐서 나물이나 장아찌, 튀김으로 먹고 말린 곤드레를 불려서 밥을 짓는다.

쌉싸름하면서도 은은한 향취가 돋는 곤드레밥에 찝찔하면서도 들큼한 양념간장 한 숟갈 비비면 솔직히 다른 반찬이 필요 없다.

최소한의 간만 더하는 간장파가 있는 반면 뭉근하게 끓인 강된장 양념장을 선호하는 강된장파도 있다. 구수하면서도 한층 강렬한 강된장을 한 숟갈 더하면 맛이 확 변한다.

간장이든 강된장이든 선택은 자유! 두부조림을 비롯한 다양한 반찬과 된장찌개까지 모두 다 해 1인분에 1만 2000원이라니 골짜기 깊이 들어온 보람이 있다.

인터넷 평점이 별 네 개인 가게답게 음식이든, 단아한 가게 분위기든, 손님에 대한 친절,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다.

가게 주인장을 붙들고 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으나 아뿔싸! 주인장이 안 계신다.

외국인 직원 셋이 화기애애 자기들끼리 바쁘다.

농사일이든, 식당 일이든, 공장일이든, 우리 사회 전반적으로 외국인 없이는 일이 어렵단 이야기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저 친구들이 곤드레밥의 맛을 알까’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웬걸, 마지막 숭늉 한 사발까지 놓치지 않고 잘 챙겨주는 것이다. 곤드레밥 많이 먹어본 솜씨다.

배론성지에서 맛본 곤드레밥과 감자전.(필자 제공)
배론성지에서 맛본 곤드레밥과 감자전.(필자 제공)

이백 년 전, 배론의 사람들도 이리 드셨을까? 풀떼기(여기서 풀은 잡곡 가루) 겨우 입에 칠하는 정도였겠지만 산야의 거친 생명력이 그들의 생을 구원했겠지.

아니면 신이 구했으려나? 그리고 지금 내려다보고 있으려나? 이렇게 평등하고 이렇게 글로벌해 진 지금의 세상을,  지금의 대한민국을, 그리고 이렇게 건강식으로 주목받는 곤드레밥을.

2025년의 시작, 배론성지에서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한해의 안녕과 모두의 평화, 그리고 무탈을 빈다.

배론성지
ㅇ 주소 |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배론성지길 296
ㅇ 문의 | 043-651-4527
ㅇ 입장 | 무료입장(피정 프로그램 비용 별도), 연중무휴

☞ 배론성지 누리집 바로가기 http://www.baeron.or.kr/

이윤희

◆ 이윤희 방송작가, 로컬문화 전문가

TV조선 ‘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 KBS ‘한식연대기’, 넷플릭스 ‘삼겹살 랩소디’, 스카이트래블 ‘한식기행 - 종부의 손맛’ 등 우리 식문화를 소재 삼아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집필했다. 방송작가 22년 차지만 언제나 현역~! 지역마다의 고유한 맛과 멋을 알리는 맛깔난 글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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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정책브리핑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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