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떠나 우리 사회에 정착한 탈북민들이 3만명을 넘어섰다. 그들을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노력들이 이어지면서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닌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인식도 점차 확대되고 있다. 탈북민 3만명 시대를 맞아 ‘먼저 온 통일의 희망’인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편집자주>
“빛바랜 사진처럼 간직한 먼 훗날 널 만날 때 들려줄 내 노래…그날에 우리 다시 마주보게 될 날에 그땐 서로를 향해 웃어주기로 해. 기도해 그날 위해 우리만의 그날에, 그날에.”
“통일업무 남다른 책임감·자부심 느껴”
지난해 통일부 공무원으로 임용된 강원철 씨. |
작년 7월 독일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문, 동유럽 민주화 열기가 한창이던 1989년 11월 수만 인파가 모여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봤던 역사의 현장에서 남북 통일을 염원하는 노래가 울려퍼졌다.
이 행사에서 청년들은 독일 베를린 장벽에서 ‘그날에’를 열창하며 감격스러운 합창을 했다. 남북 통일에 대한 많은 관심과 애정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다시 한 번 그 의미를 되새겼다.
이 행사에 참여한 강원철 씨(35)는 함경북도 무산 출신인 탈북민으로 남과 북이 하나되는 통일의 메시지를 전하는 활동들을 꾸준히 이어왔다. 그러다 지난해 그가 꿈에 그리던 통일부에 정식 임용됐다.
“통일은 탈북민이라면 누구나 소망하고 간절히 꿈꾸죠. 통일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담아 독도에서 음악회도 열고 베를린 장벽 앞에서 합창도 했어요. 통일이 하루 빨리 앞당겨지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공부했고 꿈에 그리던 통일부에 정식 임용돼 남다른 책임감을 느껴요.”
강 씨는 지난 2001년 북에서 한국으로 온 그는 6년제 중학교 5학년까지 다니다가 1998년 중국으로 돈을 벌기 위해 넘어갔다가 중국에서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탈북을 결심하게 됐다. 1999년 상해에서 체포돼 북송돼 교도소에서 고문을 받은 끝에 6개월 만에 석방될 수 있었다.
감옥 생활로 몸무게가 38kg까지 줄었던 그는 ‘다시는 탈북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감옥에 나온 뒤 얼마 안돼 몽골 고비사막을 넘어 2001년 한국에 왔다. 한국에 온 뒤 직업전문학교를 2년간 다녔고 기술자격증을 취득 후 구로공단 공장에서 6개월간 일을 했다. 생각보다 한국사회에 적응하는 건 쉽지 않았다. 강 씨는 대학에 진학하기로 마음을 먹고 2004년 한양대에 입학했다.
“주변 분들의 도움을 받아 탈북할 수 있었죠. 북에 있는 어머니와 여동생도 데려오면서 가족 모두가 이 곳에 정착하게 됐어요. 제 케이스는 좋은 쪽에 속했죠. 가족과 함께 내려오고 싶었지만 홀로 이곳에서 정착하신 분들도 꽤 되니까요. 한국사회에서 능력을 기르려고 대학에 들어갔고 6년 만에 졸업장도 받을 수 있었죠.”
그가 정착 초기 가장 힘들었던 것은 언어였다. 이곳에 와서 같은 또래 친구들과 대화를 해보니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았던 것. 그는 매일 뉴스를 챙겨보며 언어와 문화를 익히려고 노력했다.
“대학교 전공이 경영학과였는데 이론이 매우 생소했고 강의도 전혀 알아듣지 못했죠. 모든 것을 본인이 알아서 해야 한다는 것도 사실 부담이었어요. 탈북자들이 정착한다는 것은 쉽지 않는 것이 현실이죠. 정착 초기에는 한국사회를 빨리 이해하기 위해 아침에는 신문을 구독하고, 저녁에는 뉴스를 꼭 챙겨 봤어요. 뭐든 열심히 배우려고 노력했고 언어, 문화적인 격차를 줄이려고 노력했어요.”
그는 탈북청년단체 ‘위드유’(with-U)에서 한국사회에 통일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심어주기 위한 활동들을 지속적으로 이어갔다. 지난 2014년 가수 이승철씨와 함께 독도를 방문에 통일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음악으로 하나가 된 이승철 씨와 탈북 청년들은 UN과 하버드대학 등 세계 곳곳에서 통일을 염원하는 노래를 불렀다. 공연 이후 이들은 태극기를 펼쳐들고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크게 외쳤다.
“우연찮게 인연이 닿아 가수 이승철 씨에게 합창대 지휘를 부탁하게 됐어요. 탈북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으로부터 벗어나고 통일을 향한 목소리를 내고 싶은 저희의 간절한 마음을 아셨는지 흥쾌히 응해주셨죠. 그게 계기가 돼 광복절을 하루 앞둔 2014년 8월14일 독도에서 음악회를 열어 간절한 통일의 메시지를 노래했죠. 처음 본 독도를 보고 눈물이 났어요. 독도에서 통일송을 부르는 정말 뜻깊은 순간이었죠.”
또한 작년 7월 위드유는 남·북한 청년들로 구성된 ‘하나통일원정대’를 결성해 독일 베를린을 방문, 독일 통일의 상징인 베를린장벽과 브란덴부르크문 앞에서 ‘고향의 봄’ 등을 합창하며 전 세계인들에게 한반도 통일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이어 귀국 공연으로 8월 11일 명동성당에서 ‘광복 71주년 통일 기원 합창’ 행사를 개최해 남과 북의 청년들이 전하는 간절한 통일 염원의 노래를 불렀다.
작년 7월 23~28일 독일 베를린을 방문한 뒤 8월 11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통일 기원 합창 행사 모습.(사진 = 통일부) |
“독일 베를린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던 역사적 현장에서 통일 염원 합창을 했어요. 많은 분들이 호응해주셨고 ‘먼 곳까지 우리가 오기 참 잘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을 했죠. 탈북자들은 남과 북을 모두 경험해봤기 때문에 남과 북을 연결해줄 수 있는 징검다리 역할을 충실히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통일이 되는 그날을 꿈꾸며 본격적으로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한양대 졸업 후 강 씨는 고려대학교 북한학과 대학원에 진학, 작년에 석사 학위를 받았다.
“대한민국에 정착해 살아가는 탈북민들에게 있어 취업의 문턱은 매우 높아요. 저도 먹고 살려고 이것 저것 안해본 게 없거든요. 사실 대학 졸업 후 취업의 기회도 있었고 하나은행에 취업해 일하기도 했어요. 안정적인 직장에 취업은 했지만 통일을 위해 일하고 싶은 마음을 접기는 어려웠죠. 무엇보다 처음 이 곳에 왔을 때 사람들이 통일에 대한 관심이 적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북한의 심각한 인권상황을 제대로 알리기로 마음 먹었죠. 그래서 본격적으로 공부를 했어요.”
“통일을 위해 일하는 것, 가장 큰 사명”
그는 통일을 위해 일하는 것이 가장 큰 사명이라고 생각하며 통일부 공무원 공개 채용에 응시해 당당히 정규직 공무원으로 합격했다.
그는 지난해 12월 통일부 통일교육원에 발령을 받았다. 통일교육원은 남북간 화해·협력과 통일에 관한 교육을 실시하고 각급 학교·사회교육기관의 통일교육을 지원하는 업무를 주로 한다. 강 씨는 통일교재를 개발하는 부서에 배치돼 근무 중이다.
“통일이 됐을 때 부끄럽지 않고 떳떳한 삶을 살고 싶어요. 통일에 대한 필요성을 알리고 공감을 이끌어 내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인 통일교육을 개발하는 곳에 근무하게 됐는데 더 좋은 통일교재를 개발해 더 많은 국민들이 통일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죠.”
2015년도 탈북민의 고용률은 54.6%로 2007년 36.9% 대비 큰 폭으로 늘었으며, 2015년 말 기준 중앙·지방정부에 총 133명의 탈북민이 채용, 이중 81명이 공무원으로 재직 중이다. 정부는 탈북민 3만명 시대를 맞아 정부·지자체 내 탈북민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적정한 직무를 발굴하고, 채용을 확대해나간다는 계획이다.
강 씨는 탈북민들을 더 이상 이방인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닌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따뜻한 응원이 필요한 때라고 당부했다.
“한국사회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 저희 탈북민들은 이 땅에서 태어나고 자란 분들의 많은 도움이 필요해요. 탈북민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가져주시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한마음으로 통일을 꿈꾸길 기대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