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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경제정책사

양극화 ‘턴어라운드’…“일자리 낳는 성장으로 가자”

[실록 경제정책]⑧ 일자리, 비정규직 그리고 양극화

양극화 덫, 과거 방식으로는 안돼…일자리 중심 성장과 복지 확충

2008.02.08 특별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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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 위기, 미-이라크 전쟁, 신용불량자와 카드채 사태…. 돌아보면 먹구름 뿐이었다. 2003년 위기 상황에서 출범한 참여정부는 신중한 경기조절 등으로 살얼음판 위를 조심스레 건너갔다. 인위적인 경기부양과 결별하는 대신 경제체질을 튼튼히 하고 중장기적 성장잠재력을 키우는 데 주력했다. 단기적 성과보다는 근본적인 해결을 추구하고, 본질적 문제 접근을 통한 제도화에 초점을 맞췄다. 혁신경제와 공정한 시장, 한미자유무역협정(FTA)등 적극적 개방정책, 금융허브 추진을 비롯한 금융산업 선진화정책, 지속적인 연구개발(R&D)투자 확대, 남북경협 등 오늘보다 내일을 위한 투자에 집중했다.

‘한 손에는 성장잠재력 확충, 다른 손에는 사회안전망 확대’. 참여정부는 특히 IMF 외환위기 이후 심화된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완화하기 위해 사회투자를 확대했다. 경제성장과 사회복지가 함께 가는 동반성장전략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제시했다. IMF 외환위기 이후 고질병이 된 ‘저성장 속 양극화’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고자 했다. 그럼에도 민생의 어려움은 짙은 그림자로 남았다. 우리 경제의 낡은 유산과 싸우며 새로운 성장전략을 추구했던 참여정부의 이러한 비전과 고투가 한국경제의 터닝포인트로 기록될지 여부는 역사의 몫으로 남아 있다.

국정브리핑은 재정경제부·한국금융연구원·한국조세연구원 등과 함께 참여정부 경제정책의 탄생 배경과 전개과정, 정책효과와 의미 등을 실록 형태로 정리한 ‘실록 경제정책’을 기획, 연재한다. 전·현직 정책 담당자들의 증언과 각종 정부기록물, 학계 연구보고서 등을 밑그림으로 삼아 ‘읽는 재미’와 함께 경제정책의 원리와 방향을 이해할 수 있는 폭넓은 안목을 제공하려 한다. 연재 내용은 단행본으로 묶어 출간할 예정이다. <편집자>


① 카드사태와 금융시장 안정: “문 닫을까요, 외국에 팔까요, 당신이 살 거요?”
② 신용불량자 뇌관 해체: 신불자 딜레마, 딜레마…“원칙이 이기더라”
③ 공정한 시장질서의 원칙과 현실: “투자와 출자, 그거 정말 구분이 됩니까?”
④ 인위적 경기부양의 유혹: 냄비 정책서 뚝배기 경제로…“어느 쪽이 건강한 겁니까”
⑤ 전략적 재정운영: “계산서 내놓았다가 박살나게 맞고 물러갑니다”
⑥ 한국형 성장모델의 모색: “개방과 양극화 해소, 선진한국 가는 양 날개”
⑦ 차세대 성장동력산업 육성: '미래 먹거리 10가지' 씨뿌리기…과기 '부총리' 뜨다


2003년 5월 6일 아침, 국무회의. 노무현 대통령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높았다.

“이해가 안 됩니다. 지금 한 도시의 부분적 기능이 마비되어버렸는데 왜 관계 부처 장관한테서 보고도 없는 겁니까?”

일순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바로 화물연대 파업 건이었다. 노 대통령은 “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냐”며 최종찬 건설교통부 장관을 질책했다. 화물연대 사태가 4월 내내 악화일로에 있었으나 보고 한 번 없던 터였다.

도시기능이 마비됐는데 왜 장관한테서 보고도 없나

행자부·재경부 등 관계부처도 이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국 운송하역 노조원들이 포항시 주요 도로를 화물차로 봉쇄했고, 화물연대 파업은 창원과 광양으로 확산 중이었다. 관계 부처와 청와대가 문제파악에 허겁지겁 나섰을 때는 이미 경인, 경남, 충청, 광주, 전남 등 5개 지부 6000여 명이 파업에 동참한 상태였다.

2003년 전국을 뒤흔든 화물연대 파업은 불합리한 지입제도가 원인이었지만 IMF외환위기 이후 급증한 비정규직 문제가 표면화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후 참여정부는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사진은 2003년 5월 5일 화물연대 포항지부소속 운전사 400여명이 운송요율 인상 등을 요구하며 포스코 제 3문앞에서 집단농성을 벌이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 화물연대 사태라는 빙산의 일각

화물연대의 파업은 불합리한 지입제도가 가장 큰 요인이었다. 이 제도는 개입사업자인 차량소유자가 자기 명의가 아닌 화물운송업체 명의로 등록해서 지입료를 업체에 내고 일감만 받아 운송하는 형태였다. 그런데 화주와 차주 사이에 2~5개의 알선업체가 끼어들면서 영세한 차주에게 고통이 집중됐다. 차주는 주당 80시간 이상 운전하는 과로에 시달리면서도 월평균 70만원 정도를 손에 쥐는 반면, 알선업체들은 ‘손쉽게’ 중간이득을 챙기는 구조였다.

누적된 울분과 곪은 문제들이 일거에

화물 노동자의 97%는 사실상 비정규직 노동자들이었다. 그러나 개인사업자라는 이유로 산재보험 적용에서도 배제됐다. 수년간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그해 4월 27일 화물연대 포항지부 조합원 박상준씨가 생활고를 비관해 자살했다. 이 사건이 화물연대 파업의 방아쇠를 당겼다. 누적된 울분과 곪은 문제들이 일거에 터져나왔다.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의 말이다.

“IMF외환위기 직후 대량실업으로 거리로 내몰린 서민들이 먹고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었다. 직업훈련과 사회안전망이 선진국에 비해 미비한 사회에서 저소득층은 특정직군으로 몰리는 경향이 있다. 영세자영업은 그래서 우리경제의 막다른 길이다. 물동량과 화물운송 수요가 증가하자 상당수의 저소득층이 그쪽으로 쏠린 것이었다.”

화물연대 파업서 드러난 IMF 이후 한국경제의 구조적 모순

화물연대 사태 초기, 당시 언론들도 이를 주목하지 못했다. 대기업 노조의 파업처럼 익숙한 현상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화물연대 파업이라는 초유의 사태 뒷면에는 IMF외환위기 이후 한국경제의 구조적 모순이 놓여 있었다. IMF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노동시장에는 엄청난 유휴노동력이 발생했다. 하루아침에 직장에서 거리로 밀려난 사람들은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으로 옮겨가지 못하고 낙오됐다. 이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임시·일용직을 전전하거나 별다른 준비 없이 음식점을 차렸다가 망하고 다시 비정규직 노동자로 취업하는 삶을 반복했다.

이런 비정규직, 영세자영업자 등 ‘근로빈곤층(working poor)’ 문제가 참여정부 들어 새로운 사회 갈등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이것이 한국경제의 난제 중의 난제인 ‘사회양극화’의 핵심이었다. 이 문제가 보다 정밀하게 분석되고 거대한 사회적 의제로 촘촘히 엮이게 된 때는 2005년 이후였다.

■ 충격과 각성, ‘고용 없는 성장’

참여정부가 출범한 2003년에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3.1% 성장에도 불구하고, 일자리가 3만 개나 줄었다. ‘경제가 성장하면 일자리와 소득이 늘어난다’는 일종의 상식이 허물어졌다. 과거 한국경제의 고속성장 시절에는 없던 일이었다. 2008년 1월 최경수 한국개발연구원(KDI) 선임연구위원은 ‘사회통합의 과제와 저소득층 소득향상 보고서’에서 이렇게 분석했다.

“1995~2005년간 중산층의 실질소득은 연평균 1.6% 성장한 반면, 하위 20%는 실질소득 증가율이 0.0%로 정체돼 있다. 결과적으로 외환위기 이후 변화의 충격은 저소득층에 집중된 것이다. 경제성장에 의해 빈곤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지만, 역사적 경험으로 보면 성장은 빈곤해소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성장은 빈곤해소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 되지못해”

2003년에는 이런 분석이 낯설었다. 그래서 국민의정부 시절부터 실업대책이나 고용안정대책을 대폭 확충해왔으나 오히려 상황이 더 나빠지는 현상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었다. 권재철 전 청와대 노동비서관의 회고다.

“2003년 경제성적표가 나오자 대통령도 적지 않게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초기에는 대통령도 성장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일자리도 늘어나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성장이 고용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도식이 더 이상 맞지 않는다는 게 드러난 것이었다. 그때부터 뭔가 근본적인 대응전략을 고민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실업률 낮은데 고용률도 낮다…왜

2003년 실업률은 3.4%였다. OECD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낮은 편에 속했다. 과거 같으면 사실상 ‘완전고용’ 국가라고 칭송받을 만한 수치였다. 그러나 실업률이 낮으면 고용률이 높아야 할텐데, 고용률마저 낮다는 게 문제였다. 2003년 한국의 고용률은 63.0%였다. 당시 OECD 평균 고용률은 65%, 미국이나 영국, 덴마크, 스웨덴 등은 70%를 넘었다. 한국처럼 극단적으로 낮은 실업률과 OECD 평균보다 한참 낮은 고용률은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현상이었다. 비경제활동인구인 취업준비자가 늘어난 때문이었다. 김병준 전 정책실장은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경제성장만으로 자동적으로 고용이 늘어나지 않는 시대라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고용을 통해 성장잠재력을 끌어올리고, 고용을 통해 복지를 실현하는 형태로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했다. 소위 ‘복지를 통한 성장의 선순환’이다.”

■ 성장과 고용의 두 마리 토끼를 잡아라!

그 결과 2004년 2월 19일, ‘일자리창출 종합대책’이 나왔다. 단순한 실업대책이나 고용안정정책을 넘은 국가차원의 고용전략으로의 변화를 모색하는 첫 시도였다. 또 일자리를 만들려면 사회적 합의와 공감대가 중요하기 때문에 노사정위원회를 중심으로 일자리 만들기 사회협약이 추진됐다. 2004년 2월 8일 체결된 사회협약의 제1장 내용이다.

“정부는 일자리 만들기를 국가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삼아 경제사회산업정책 전반을 포괄하는 일자리 만들기 종합대책을 마련하여 일관성있게 지속 추진한다.”

일자리 만들기를 국가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계획은 이랬다. 5%대 경제성장으로 일자리 150만개를 만들고, 서비스업을 중심으로 20~30만개, 일자리 나누기 등 일자리 발굴로 20~30만개 등 2008년까지 일자리를 연 40만개 씩 총 200만 개 창출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2004년 41만 8000개, 2005년 29만 9000개, 2006년 29만 5000개, 2007년 28만 2000 개의 일자리가 느는 데 그쳤다. 2005년 연 40만 개에서 연 30만 개로 하향 수정한 일자리 창출 목표에도 미달한 것이었다.


참여정부는 2003년 ‘고용 없는 성장’을 경험한 이래 노동시장 정책을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으로 물꼬를 틀었다. 무조건적인 성장 우선 방식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북유럽식 복지체계를 추구하다 노동시장이 지나치게 경직되는 것도 피하자는 것이었다.

국가가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추구하는 동시에 개개인의 직업안정성보다는 고용가능성을 높여 사회의 생산력을 극대화하는 게 관건이었다. 두 마리의 토끼를 잡자는 점에서 영국 토니 블레어 정부의 ‘제3의 길’과 비슷했다. 고용연계복지나 워크페어(workfare)는 이런 관점에서 나온 전략이었다. 이정우 전 청와대 정책실장의 말이다.

고소득 전문직종, 아니면 막다른 골목 허드렛일, 양자택일

“요컨대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은 ‘일자리의 양극화’라고 요약할 수 있었다. 고소득 전문직종, 아니면 기술이 필요하지 않은 막다른 골목의 허드렛일 일이라는 양자택일을 강요당하는 상황이었다. 일자리를 통해서 복지를 해나가는 방식 외에 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워크페어’는 세계적 추세이기도 했다.”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의 대표적인 사례가 사회적 일자리 정책이었다. 참여정부는 2003년 7월 추경예산 73억원을 마련해 사회적 일자리 사업을 시작했다. 2004년 12월에는 ‘소득 2만불 시대 실현을 위한 신일자리 창출전략’이 대통령에게 보고됐다. 이 자리에서 사회적 일자리를 포함한 사회서비스 전반을 아우르는 일자리 창출전략을 마련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사회적 일자리 사업 시작되다

‘사회서비스’란 “개인 또는 사회 전체의 복지증진 및 삶의 질 제고를 위해 사회적으로 제공되는 서비스”이다. ‘사회적 일자리 정책’은 이런 분야에 대한 참여정부의 정책 일반을 일컫는 용어로 사용됐다.

2005년 3월 ‘서비스산업 경쟁력 강화 추진방안’이 마련돼 사회적 일자리 정책이 본격 추진되기 시작했다. 2006년 4월 제75회 국정과제회의에서는 새로 출범한 대통령자문 사람입국·일자리위원회의 첫 번째 보고서로 ‘사회서비스 일자리 창출전략’이 보고됐다. 방과후학교 지도교사, 가사도우미, 간병도우미, 장애학생 도우미 등이 사회적 일자리 사업으로 추진됐다.

2006년 9월 정부는 2007~10년까지 사회서비스 일자리 80만개를 만든다는 '사회서비스 확충전략'을 발표했다. 이를 보도한 한국경제신문 2006년 9월 21일자 기사.
이어 2006년 9월 20일 세종로 정부종합청사에서 노무현 대통령 주재로 국무위원, 시·도지사, 관련단체 대표 등 150여 명이 참석한 ‘좋은 일자리 창출을 위한 보고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는 2007~10년까지 간병인, 방과후학교 지도교사, 보육인 등 사회서비스 일자리를 매년 20만개씩, 총 80만개를 공급하겠다는 ‘사회서비스 확충전략’이 발표됐다.

정부 주도로 복지수요도 충족하고, 일자리도 만들고

저출산·고령화와 여성의 경제활동 확대로 사회서비스 수요는 늘고 있지만 2006년 기준으로 관련 인력 90만명이 부족했다. 그래서 먼저 정부 주도로 관련 사업을 벌여 복지수요도 충족하고, 일자리도 만드는 한편 각종 세제 및 재정지원과 제품 우선구매 등의 방식을 통해 사회서비스를 공급하는 민간기업을 육성한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사회적 일자리 사업이 월 80만원 정도의 저임금·단기근로형 일자리만 양산한다는 비판이 나왔다. 가사도우미의 월급은 61만원으로, 2007년 최저임금인 72만원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김유선 전 청와대 정책기획자문위원(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의 지적이다.

일자리의 ‘질’이냐, 정부의 ‘선제적 투자’냐, 무게중심의 차이

“2007년의 화제작 ‘88만원 세대’라는 책에 따르면 청년세대에게 돌아가는 대부분의 일자리는 저임금, 비정규직 등 ‘질 나쁜 일자리’이다. 사회서비스 분야에서 일자리를 확충한다는 방식은 맞지만, 지금 양극화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는 일자리의 ‘양’이 아니다. 일자리의 ‘질’이 나쁘다는 게 문제다.”

그러나 김병준 정책실장의 말은 좀 다르다. 불모지에 가까운 사회서비스 분야에 대한 정부의 ‘선제적 투자’에 무게중심을 두는 편이다.

“선진국의 경험을 보면, 국민소득 수준이 1만 달러를 넘어 2만 달러로 넘어가는 시기에 사회서비스 부문에서 일자리가 대거 증가했다. 우리나라의 사회서비스 고용비중은 2006년 13.6%로 2003년 기준 OECD국가의 평균인 21.7%에 비해 크게 낮다. 그만큼 일자리가 창출될 여력이 많은 분야가 사회서비스 분야다. 아직 수익성이 검증되지 않은 이 부문에 정부가 선제적 투자를 해서 자연스럽게 수요를 창출하고 시장을 육성하자는 게 사회적 일자리 창출전략의 핵심이었다.”

점차 높아지는 고용률…5년간 0.9% 포인트

일자리 창출대책의 결과 고용률이 점차 높아졌다. 2003년 63.0%, 2004년 63.6%를 기록한 후 2005년 63.7%, 2006년 63.8%, 2007년 63.9%로 나타났다. 참여정부 5년간 0.9%, 연 평균 0.18%포인트씩 높아졌다. 이는 2007년 현재 OECD 30개국 중 21위 수준이다.

■ ‘비정규직의 덫’, 이제는 피할 수 없는 사회문제

과거 대기업 정규직 노조들의 파업은 그때마다 커다란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참여정부 초기, 지하철·LG칼텍스·항공 등 대규모 사업장의 파업이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면서 정규직·대기업 노동자의 파업이 상당히 줄었다. 이에 따라 1988~1997년 노사분규 등으로 인한 근로손실일수가 연평균 255만 일에서 1999~2006년 130만 일로 감소했다.

게다가 기아차 노조 채용비리, 국민은행 노조간부 조합비 유용, 항운노조 채용비리, 현대차 노조 채용비리, 한국노총 간부의 업무상 배임 등 주류 노동계의 비리 사건이 연이어 터졌다. 노동운동의 도덕성이 치명적으로 훼손됐다. 노동운동 내부에서도 성찰의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반면, 대기업·정규직 노조 파업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새로운 유형의 노동쟁의가 급증했다. 참여정부에서 노사분규 건수와 근로손실일수가 국민의정부 시기보다 현저히 줄었으나, 분규 참가자 수(1997년 9만 4000명→2006년 13만 1000명)와 건당 분규지속일 수(1997년 30.2일→ 2006년 54.5일)는 늘어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은폐됐던’ 욕구의 분출…비정규직의 노동쟁의 급증

규모가 작은 사업장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벌이는 쟁의는 일단 시작되면 급속히 확산되고 장기화되는 특징을 지녔다. 2003년 초 한국을 물류마비 직전까지 몰고갔던 화물연대 파업도 기존의 파업과는 양상과 차원을 달리하는 사태였다. 정이환 서울산업대 교수(전 참여정부 인수위 자문위원)는 이를 “은폐돼 있던 것이 봇물 터지듯 나온 것”이라고 했다.

“IMF외환위기 이후 한국 노동시장에서 비정규직의 양산체제가 구조적으로 정착했다. 기업들은 수익성을 맞추기 위해 핵심인력을 빼고는 전부 비정규직화했다. 비정규직의 확산이 불러온 문제점은 국민의정부 시절에 이미 목격된 것이었다. 그러나 정책 몇 개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국민적 합의와 근본적 제도개선이 필요했다.”

대기업 사내하청 노동자, 건설일용직 노동자, 계약직 노동자의 파업과 분신자살 등이 줄을 이었다. 2003년 4월 앞서 언급한 화물연대 포항지부 조합원인 박상준씨가 “늘어나는 빚을 감당 못하겠다”며 음독자살했다. 그해 10월 근로복지공단 비정규 노동자 이용석씨가 사측의 교섭해태 등에 항의하며 분신자살했다. 2004년 2월 현대중공업 사내하청기업의 비정규노동자 박일수씨가 뒤를 따랐다. 그해 11월 비정규 노동자 4명이 정부의 비정규직보호법안에 반발, 국회 타워크레인에서 사상 초유의 고공농성을 벌였다.

2005년에는 현대하이스코, 하이닉스-매그나칩, 기륭전자, KM&I 등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잇따라 장기파업을 벌였다. 2006년 KTX 비정규직 승무원들의 파업이 크게 이슈화됐다. 2007년 7월 비정규직보호법안 시행 직후 이랜드 파업사태가 터졌다.

참여정부 기간 내내 비정규직 관련 파업과 갈등이 빈번하게 벌어졌다. 2007년 7월 비정규직 보호법이 시행됐지만 법의 헛점을 악용한 사례로 인해 갈등은 더욱 커졌다. 사진은 2007년 7월 10일 서울 상암동 홈에버 월드컵점에서 이랜드 일반노조원들이 이랜드의 '비정규직 대량 계약혜지' 철폐를 주장하며 농성을 벌이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직장 잃어도 사회안전망 탄탄한 선진국, 차별 대명사 한국 비정규직

비정규직 관련 문제들은 왜 장기화되고 극단화된 형태로 갈등이 불거질까. 하청업체 폐업 등으로 현행법상 교섭당사자가 존재하지 않게 되거나 정규직 노조와의 관계, 근로감독의 물리적 한계 등 문제가 복합적이기 때문이었다. 정이환 교수는 “비정규직은 무조건 나쁜 것이란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한국의 비정규직은 좀 특수한 문제”라고 했다.

“유럽 선진국의 비정규직은 차별이나 사회적 배제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안정성을 희생하는 대신 다른 형태의 인센티브가 있기 때문에 생산성도 높다. 대체로 정규직과의 균등대우가 제도화되거나 문화적으로 정착돼 있다. 직장을 잃더라도 사회안전망에 의해 생존을 위협받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에서 비정규직은 차별의 대명사다. 고용안정성을 희생당할 뿐 아니라 정규직과의 임극격차가 지나치게 크다. 비정규직 차별과 남용이 계속될 경우 국민경제의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은 현저히 저하된다.”

“한국의 비정규직은 ‘가교(bridge)’가 아니라 ‘함정(trap)’이다”

강순희 청와대 고용노동비서관은 ‘참여정부 정책 보고서 - ‘비정규직보호’ 편(2007년 12월)'에서 이렇게 밝혔다.

“한국의 비정규직은 정규직으로 가는 ‘가교(bridge)’가 아니라 ‘함정(trap)’이 되고 있다. 2003년 기준으로 1년간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이동한 비율은 15% 수준이고, 비경제활동인구·실업·무급가족종사자 등으로의 이동은 20% 이상으로 나타났다. 한국에는 한번 비정규직이 되면 정규직으로 전환되기가 힘든, 이른바 ‘비정규직의 덫’이 존재하는 것이다.”

■ “사회적 합의 말고 방법이 없다”

참여정부는 출범 당시부터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노동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비정규직 보호 문제’를 공약으로 내세워 “임금과 근로조건의 동일한 대우를 통해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시정하겠다”는 정책방향을 분명히 했다.

“그럼 노동부 장관이 할 일이 뭔가.”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 시절이던 2003년 1월 22일. 노 당선자 주재로 열린 ‘국민통합과 양성평등 사회 구현’ 토론회에서 방용석 노동부 장관은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이유로 ‘동일가치노동-동일임금’ 원칙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노 당선인은 한 마디로 반박했다.

“그럼 노동부 장관이 할 일이 뭔가.”

하지만 ‘동일가치노동-동일임금’ 원칙은 “노동의 유연화라는 세계적 추세와 배치된다”는 보수언론들과 재계의 집중적인 문제제기로 논란에 휩싸였다. 참여정부도 이후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동일가치노동-동일임금에 대한 참여정부의 입장은 이랬다. '참여정부 정책 보고서 - ‘비정규직보호’ 편'에 나오는 말이다.

“동일가치노동-동일임금은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할 가치이지만, 한국의 임금체계가 지나치게 연공급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직무급 체계가 보편화되지 않는 이상 도입하기 힘들다.”

노사관계와 노동시장 불가분의 관계

이후 참여정부는 원칙을 강조하기보다는 제도적 틀 내에서 노동시장과 노사관계를 함께 담아내려는 노력에 집중했다. 노사관계와 노동시장은 따로 떼어놓기 힘든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비정규직 문제를 포함한 참여정부의 노동시장 정책과 노사관계 개혁방안을 총망라한 로드맵이 등장했다. 2003년 9월 4일 발표된 ‘노사관계 개혁방향(일명 노사관계 로드맵)’이 그것이었다. 같은 날 열린 국정과제회의에서 노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노사정위에서 노사관계 선진화 방안에 대해 합의를 이뤄주면 노사문화뿐 아니고 사회문화에 이르기까지 정말 획기적인 진전을 이루는 것이다.”

사회적 대화의 시작…2003년 9월 4일 ‘노사관계 로드맵’

이 로드맵의 3대 목표 중 하나가 ‘취약근로자에 대한 사회적 보호강화’였다. 목표의 3대 하위 과제는 ‘①고용상 차별해소 및 비정규직 남용규제 ②사회보험의 실질적인 적용확대와 내실화 ③취약근로계층에 대한 보호 및 지원 강화’였다. 비정규직 대책 부문은 노사정위원회의 공익위원 안(案)과 합쳐 노동부가 구체적인 입법을 추진하기로 했다. 이와 함께 정부는 민주노총 탈퇴로 5년째 파행 운영된 노사정위를 정상가동하기 위해 사회적 대화를 본격적으로 시도했다.

사회적 대화에 대한 대통령의 신념은 강고했다. 기업들이 ‘노사문제 때문에 투자 안 한다’라는 말을 줄기차게 반복해왔기 때문이었다. 2004년 5월 17일 청와대 집현실에서 열린 경제정책 협의회. 기업들의 투자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였다. 노 대통령이 말했다.

“투자 왜 안하나”…“노사문제 때문에”

“우리가 1980~90년대 계속해서 해 왔던 노사 관계 모델로는 풀지 못한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정부가 막강한 수단들을 다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기업에게 투자 활성화 이야기를 꺼내면 첫 번째 나오는 게 노사 문제다. ‘투자 왜 안 하냐’고 물으면 ‘노사 문제 때문에 안 한다’고 대답한다. 통계를 보니까 60% 이상 그런 반응을 보인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지금 사회적 합의 모델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냉소하고 있다. 한국에 적합한 모델이 아니라고들 하는데, 지금 그것 말고 우리한테 방법이 없다.”

모두가 동의한 노사관계 선진화와 노동시장 안정화 병행

노사관계 선진화와 노동시장 안정화를 병행한다는 참여정부의 정책방향에 대해 대다수의 경제주체들은 동의했다. 그러나 새롭게 불거진 문제가 있었다. 비정규보호법안이었다.

문제는 비정규법안 문제가 노사관계 문제와 불가피하게 얽힌다는 점이었다. 때문에 노·사·정의 사회적 대화가 순탄하면 비정규보호법안도 원만히 처리될 수 있지만, 반대로 비정규법안을 두고 갈등이 심화되면 노사관계마저 발목이 잡힐 수 있었다.

특히 2004년 2월 출범할 민주노총의 새 집행부가 어느 쪽일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었다. 노사정위를 통한 사회적 대화 참여를 공약으로 내건 이수호 집행부가 당선될 경우 참여정부의 노사관계 로드맵은 보다 순조롭게 출발하리라고 예상됐다. 투표 결과 이수호 후보가 위원장으로 당선됐다. 노·정관계에 있어서 우호적인 환경이 조성된 셈이었다. 박태주 전 청와대 노동비서관의 말이다.

“2004년 민주노총의 그 어떤 노조지도부보다 참여정부에 우호적이던 이수호씨가 ‘사회적 대화 참여한다’는 공약을 내걸고 민주노총 위원장이 됐을 때 정말 노무현 대통령은 복도 많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어느 나라 노조 집행부가 그런 ‘어용’적인 공약으로 당선되나.”

■ ‘뜨거운 감자’ 된 비정규법안

그해 9월 10일 정부가 비정규보호법안 입법을 예고했다. 법안 내용이 알려지자 노동계가 발칵 뒤집혔다. 기간제 사유제한 여부와 파견근로 부분이 가장 첨예한 쟁점이었는데, 재계 주장에 가까운 방식으로 결정되는 바람에 당초 노사정위 공익위원 안보다 후퇴했다는 것이었다. 재계 역시 “차별시정 분야는 노동계가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되었다”면서 불만을 드러냈다. 갈등이 증폭되기 시작했다.

양대 노총의 노사정위 탈퇴·총력투쟁 선언

사흘 후 한국노총은 정부가 법을 추진하면 노사정위를 전면탈퇴하고 하반기 전력투쟁에 돌입하겠다고 선언했다. 민주노총도 “파견근로 조항은 일방적으로 기업에 유리한데 차별시정 항목은 비정규 노동자가 실현 불가능한 탁상공론”이라며 총력투쟁을 선언했다. 민주노총은 이수호 집행부에 대한 반대파들이 비정규법안 문제 등을 들어 사회적 대화 참여를 두고 내홍이 극에 달한 상태였다.

참여정부는 출범 초 노사정 대화를 통한 사회적 대타협을 시도했지만 비정규직 보호법을 둘러싼 갈등이 불거지면서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사진은 2005년 4월 6일 국회에서 이경재 환노위원장(오른쪽 세번째)과 노사정 대표들이 비정규직 법안 처리 절차와 일정 등을 논의한 뒤 손을 잡고 있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결국 2005년 초까지 비정규법안은 물론, 노사정위 논의도 끝없이 표류하게 됐다. 노·사·정 관계는 급속히 냉각됐다. 노사정 사회적 협약이라는 방식에 대한 회의감이 팽배했다. 2005년 1월 28일 청와대에서 열린 경제양극화 실태와 정책과제 보고회의. 노무현 대통령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노사정 판 걷어치우는 게 낫다”

“민주노총이 들어온다, 들어온다 하고 노사정위에 계속 안 들어온다. 과부가 간다간다 하고 아이 열 낳고 간다더니 하는 형국이다. 차라리 노사정의 판을 깨자. 맨날 문 앞에서 기웃기웃하고, 들어왔다가도 한 달에 한 번씩 보따리 싼다고 하니 그렇다. 노사정 사회적 협약체제를 회심의 정책으로 크게 기획했는데 여건과 역량이 모자란 것 같다. 노사정 판 걷어치우는 게 낫다는 생각이다.”

이헌재 경제 부총리도 “노사정 들어와도 또 그때부터 골치아플 것”이라며 동감을 표시했다. 김대환 노동부 장관 역시 “그리 하려면 들어오지 말라고 하자”고 덧붙였다.

박태주 전 노동비서관은 그러나 민주노총을 대하는 정부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2005년 2월 1일 노사정위 참가를 놓고 민주노총 대의원대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당시 이수호 집행부 반대파들은 ‘비정규법안에 들러리 서지 말자’며 잔뜩 벼르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전날인 1월 31일 이해찬 총리는 총리공관에서 관계장관들과 함께 ‘비정규법안을 이번 임시국회에서 통과시킨다’는 내용의 결의를 발표했다. 다음날 민주노총이 대의원 대회를 연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런 것이었다.

이건 민주노총이 ‘사회적 대화’ 들어오지 말라는 신호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수호 집행부 입지만 좁아졌다. 강경파가 득세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렇다고 지금 비정규직보호법안이 정부가 기대했던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가.”

비정규직대책위원회부터 법안 시행까지 6년

2006년 11월 30일 비정규직 보호법안이 우여곡절 끝에 국회를 통과, 2007년 7월 1일 시행됐다. 2001년 노사정위원회에 비정규직근로자대책특별위원회가 꾸려진 때부터 법안 시행까지 6년이 걸린 것이었다.

비정규직 보호법안은 일부 기업들의 고용관행에 변화를 끌어냈다. 2007년 우리은행과 신세계는 각각 3000여명과 5000여명의 비정규직을 무기계약직(직무급제 정규직)으로 전환했다. 직무급제 정규직은 임금과 처우에서 기존 정규직보다 열악해 ‘반쪽짜리 정규직’이라는 비판도 나왔으나, 정규직 노조와 회사가 한발씩 양보해서 이뤄낸 의미 있는 결실이었다. 비정규보호법안에 대한 정이환 서울산업대 교수의 평가다.

첫 단추 치고는 괜찮았다…그러나

“기업과 노조 양측에서 욕을 먹은 법안이지만 애당초 둘 다 만족시키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그 정도면 첫 단추 치고는 괜찮았다. 어차피 법과 제도만으로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뻔히 예측되는 사태를 두고도 후속조치를 제대로 취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법은 아무리 잘 만들어도 허점이 있다. 악착같이 악용하려 들면 막을 방법이 없다. 노동계가 요구한 대로 기간제 근로자 사유규제 조항을 집어넣었어도 문제는 드러났을 것이다. 따라서 정부가 후속조치를 통해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노력을 했어야 했다. 결국 이랜드처럼 기간제 조항을 악용해서 직원을 사실상 해고한 뒤 용역으로 돌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더이상 비정규직 차별은 안된다는 공감대

장의성 노동부 근로기준국장은 2008년 1월 7일자 <국정브리핑> 기고에서 “일부 기업에서 발생한 노사갈등이 법 자체의 문제로 인해 비롯되었다고 보는 시각은 비정규직보호법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법 만능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비정규직보호법은 최소한의 보호 장치이다. 따라서 비정규직보호법을 안착시키려는 노사 이해당사자의 협조와 노력이 필수적”이라고 했다. “비정규직보호법이 타협의 산물인 만큼 부족한 부분은 노사의 이해와 양보로 채워야 할 것”이라는 것이 장 국장의 지적이다.

부족한 10%를 채우는 ‘이해와 양보의 힘’

장 국장이 말하는 비정규직보호법 시행 6개월의 성과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평가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민에게 던지는 분명한 메시지는 “이제 더 이상 비정규직에 대해 불합리한 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공감대를 바탕으로 새로운 선진적 고용관계를 정립해 나가야 한다.”

그는 2007년 12월 20일자 기고에서도 이렇게 평가했다. “10%의 부정적 효과는 단지 법만으로는 해소되지 않는다. 비정규직 문제는 복합적인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노사정의 공동노력이 필요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부는 더 더욱 열린 마음을 갖고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비정규직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노력해 나갈 것이다. 이러한 노력에 산업현장의 사용자, 정규직 근로자들의 이해와 양보가 더해질 때 우리 사회는 노동시장 양극화를 넘어 ‘더불어 사는 복지사회’로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 문제의 뿌리: 사회 양극화

물론 ‘고용없는 성장’이 불러온 일자리 문제와 비정규직의 문제는 참여정부에서 처음 나타난 게 아니다. 1993년 무렵부터 비정규직의 비율은 꾸준히 늘었다. 특히 IMF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2월 6일 ‘정리해고 법제화’ 등에 노동계가 동의해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대타협’이 이뤄지면서 노동시장 구조조정이 급물살을 탔다.

엄청난 수의 실업자가 발생했다. 이들 대다수가 영세자영업자나 비정규직 노동자가 됐다.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조사 결과, 전체 임금근로자 중 임시직과 일용직의 비율이 1998년 46%에서 2001년 52%로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비정규직 증가와 함께 정규직·비정규직 노동자 사이의 임금격차도 벌어졌다. 영세 자영업도 공급과잉 상태가 되면서 상당수가 빈곤선 이하로 생활수준이 떨어졌다. 이들 현상의 뿌리는 하나, 바로 ‘사회양극화’였다.

늘어나는 임시직·일용직, 벌어지는 임금격차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에 따르면 양극화란 “성장부문과 지체 부문 간에 (성장의) 격차가 벌어지거나 고착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수출과 내수의 연결고리가 약해지면서 성장의 효과가 일자리와 임금으로 흘러내리지(trickle-down) 못하고, 그 결과 ‘고용없는 성장’과 ‘질낮은 일자리’가 일상화되는 것이다.


2006년 1월 18일 신년연설에서 노 대통령은 작심한 듯 ‘양극화’라는 단어에 집중했다. 다음달 청와대 출입기자단과의 산행에서도 산상 발언을 통해 한미FTA 추진과 함께 “잔여임기 최대의 과제는 양극화 해소”라고 밝혔다. 새삼스러운 문제제기는 아니었다. 2005년 1월 신년연설에서 양극화 문제의 심각성을 역설한 바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2006년 신년연설에서는 보다 무게를 실었다. 막 출간을 앞둔 어떤 정책과제 보고서에 대한 자신감에서 비롯된 듯했다.

‘동반성장 위한 새 비전과 전략-일자리 창출 위한 패러다임 전환’

그게 바로 국민경제자문회의의 정책과제 보고서 ‘동반성장을 위한 새로운 비전과 전략-일자리 창출을 위한 패러다임 전환’(이하 ‘동반성장 보고서’)이었다. 노 대통령이 “내가 본 정부 보고서 중에서 가장 잘 정리된 보고서”라며 참모들에게 “꼭 한 번씩 읽어보라”고 말하는 등 기회 있을 때마다 극찬한 바로 그 보고서다.

2005년 10월 6일, 제8차 국민경제자문회의 전체회의. 이 자리에서는 평소보다 많은 문제제기들이 있었다. 참석자들은 “본래의 자문기능을 강화해야할 필요가 있다”면서 “그 첫 번째 과제가 장기적 관점에서 한국경제의 비전과 전략을 제시하는 작업”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 역시 2005년 10월 말 기자들과 등산하면서 “집권 후반기와 중장기 국정방향을 종합적으로 정리해 내겠다”고 말했고 참모들은 기자들에게 “조만간 책자로 나올 것”이라 귀띔해주었다. 그게 KDI 등 8개 국책연구원 원장들이 집필에 참여한 ‘동반성장 보고서’였다.

일자리 문제, 과거 개발연대 방식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2006년 초 국민경제자문회의가 발간한 '동반성장을 위한 새로운 비전과 전략' 보고서에는 참여정부가 구상한 동반성장정책의 핵심이 담겨있다. 이 보고서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은 "지금까지 본 것 중 최고의 보고서"라고 격찬했다.
보고서는 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절박한 위기의식의 소산이었다. 지표상의 경제는 분명 좋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민생 문제는 냉탕이었다. 경제성장이 국민들의 삶에 골고루 혜택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한국경제가 처음 경험하는 새로운 형태의 양극화 탓이었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일자리 문제는 과거 개발연대 시기와 같은 방식의 정책으로 해결되지 않으리라는 게 명확했다.

과연 새로운 형태의 양극화가 하나의 독립적인 의제로 청와대에서 처음 부각된 시점은 언제일까. 정확한 날짜를 지정하기 어려우나 정황상 2004년 8월쯤으로 추정된다. 김병준 전 정책실장의 회고다.

“2004년 6월 정책실장이 된 후 최대 고민이 양극화였다. 해결책이 안 보여 가슴이 답답했다. 대통령께서 ‘그럼 보고서를 한번 만들어보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내부토론용 보고서 ‘경기양극화와 정책과제’를 처음으로 만들었다. ‘양극화 대책은 영세자영업자 대책’이라는 게 당시 내 생각이었다. 그 와중에 2004년 11월 여의도에서 식당주인들이 ‘솥단지 시위’를 벌였다. 심각성을 피부로 체감했다. 하지만 정부가 돈을 풀어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 양극화 해소 없이 미래 없다

2004년 중반기 이전에는 양극화가 정부 차원에서 공식적 의제가 되지는 않았다. 2004년 9월 노 대통령이 KDI와 보건사회연구원 등에 양극화 관련 연구를 지시했다. 참여정부가 본격적으로 양극화 문제에 천착하는 기점이라 할 수 있다. 더 이상 성장일변도 정책만으로 안된다는 인식이 출발점이었다. 양극화란 무엇인지, 또 그 정책대안은 무엇인지를 찾기 위한 정부의 의지는 강력했다.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대다수 정부부처와 연구기관들이 글자 그대로 ‘총동원’됐다.

2004년 11월 양극화에 대한 정부 차원의 첫 번째 종합보고서 ‘한국경제의 구조변화와 양극화’가 나왔다. 2차 보고서라 할 수 있는 ‘경제양극화의 실태와 정책과제’는 2005년 1월 빛을 봤다.

2005년 ‘거대한 빙산’ 양극화 수면 위로

2005년 하반기가 되자 양극화라는 ‘거대한 빙산’의 전모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 양극화로 인한 병폐는 막연히 생각했던 것보다 광범위하고 심각했다. 김수현 전 청와대 사회정책 비서관의 진단이다.

“우리나라 대기업은 선진국처럼 기술투자나 인적자원의 혁신을 통해 경쟁력과 이윤을 확보하기보다는 좀더 쉬운 방법을 택했다. 즉 하청기업을 쥐어짜거나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교체하는 형태로 환경변화에 대응했다. 그 결과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양극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양극화가 깊어졌다. 그 부담이 일자리의 대부분을 만들어내지만 급격한 외부환경변화에 미처 적응할 수 없었던 중소기업에 전가됐다.

일자리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상당수가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거나 영세자엽업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소득격차가 확대됐다. 소득의 양극화는 다시 자산의 양극화와 교육의 양극화로 이어졌다. 이것이 빈부의 대물림, 사회계층간 이동의 저하, 부익부빈익빈 현상으로 번졌다. 양극화가 확대되는 악순환의 구조였다.”

해결은 하나…일자리 중심 성장과 복지확충이라는 동반성장 전략

양극화 문제의 해결방향은 크게 하나로 모아졌다. 양극화의 악순환을 끊어내려면 성장주의나 분배주의 한쪽만을 추구해서는 안 되며 일자리 중심의 성장과 복지 확충이라는 동반성장 전략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비정규직과 일자리 창출에 대한 참여정부의 문제의식과 대안 역시 동반성장 전략 속에 녹아들어갔다.

양극화 ‘턴어라운드’…정책효과 보인다

참여정부 들어 소득이전, 조세감면 등을 통한 소득재분배 효과가 커졌다. 전국가구의 지니계수 추이를 보면 시장소득을 기준으로 했을 때 점점 악화되고 있다. 하지만 소득재분배 효과가 가미된 가처분소득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정체, 개선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양극화에 대응한 정책 효과가 지표상으로 나타나는 이른바 양극화 ‘턴어라운드’(기업실적이 개선되는 실적호전 현상을 이르는 말)다.

시장소득과 가처분소득의 차이만큼이 소득재분배 효과이다. 시장소득에 비해 가처분소득 지니계수가 낮아지면 소득불평등이 완화된 것으로 해석한다. 이러한 소득재분배 효과를 나타내는 전국가구의 지니계수 개선율이 2003년 3.6%에서 2006년 5.5%로 커졌다.


시장소득과 가처분소득 지니계수 간의 차이가 큰 것이 선진국의 특징이다. 예컨대 스웨덴의 경우 그 격차가 커서 지니계수 개선율이 35.6%이다. 빈부격차가 극심하다는 미국은 지니계수 개선율이 17.6%이다. OECD국가의 평균이 26.2%인데 비해 우리나라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이혜경 양극화민생대책위원회 위원장의 말이다.

“양극화라는 문제제기는 한국경제가 현재 처한 상황을 정확히 짚어낸 말이다. 5년간 양극화가 얼마나 해소되었는지에 대해 지니계수 등을 근거로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전문가도 있다. 그러나 국가가 문제를 정확히 제시하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것 또한 쉬운 과정은 아니었다. 해결하는 것은 더욱 지난하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양극화 문제의 해결 없이는 한국경제의 미래가 없다는 점이다. 참여정부뿐 아니라 다음 정부 역시 이 문제를 피해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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