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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60주년…나라 위한 희생 잊지 않겠습니다

[6·25 결정적 전투들] ⑥ 평양탈환작전

“평양 만큼은 국군이 먼저”…북진 10여 일 지체, 적 전투력 보강 아쉬움도

2010.06.14 제공=국방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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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 29일 오전 9시 30분, 정일권 국군총사령관을 비롯한 군부요인들의 환영 속에 이승만 대통령이 탄 비행기가 평양의 능라도비행장에 착륙했다.
이어 평양시청에 마련된 환영식장에 도착한 이 대통령은 감격한 어조로, 5만여 명의 군중에게 39년 만에 평양을 방문하게 된 소감을 말하며 “모두 함께 조국을 위해 싸우자”라고 호소했다.

평양입성 직후인 1950년 10월 19일 밀번 미 1군단장에게 평양 탈환 작전을 설명하는 백선엽(왼쪽) 국군1사단장.
평양입성 직후인 1950년 10월 19일 밀번 미 1군단장에게 평양 탈환 작전을 설명하는 백선엽(왼쪽) 국군1사단장.
 
당시 평양은 인구 50만여 명으로 북한의 상징적 도시였으며 역사적으로도 각별한 의미를 지닌 곳이었다. 평양에는 을밀대, 모란봉 등의 유적과 함께 시가지의 남쪽을 동서로 관통해 흐르는 대동강이 유명하다. 대동강은 강폭이 400~500m 정도로 유속이 매우 빠르고 깊어, 도섭이 불가능한 하천이다.

평양은 대동강을 기준으로 북서쪽의 본평양과 동남쪽의 동평양으로 나눠진다. 서울이 한강을 사이로 강북과 강남으로 구분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북한 정부의 주요시설은 대부분 본평양에 있었기 때문에 본평양이야말로 북한의 심장부 같은 곳이었다. 본평양과 동평양을 연결하는 교량은 인도교인 대동교와 복선화된 대동강 철교가 가설돼 있었다.

■ 국군과 유엔군의 38도선 돌파와 북진

국군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주력이 붕괴된 북한군은 평양을 지켜낼 수단이 거의 없었다. 당시 북한군은 후방의 가용자원을 총동원해 3개 사단을 새로 편성한 뒤 우선적으로 평양 진입의 요충지인 금천 일대에 19ㆍ27사단을 배치하고, 해주, 배천 일대에 74사단을 배치했다.

또, 원산항에는 3000여 기의 기뢰를 설치했다. 평양과 원산항을 제외한 기타지역은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 따라서 북한의 전쟁지도부가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국군이 38도선을 돌파하더라도 유엔군은 38선 남쪽에서 멈춰 주는 것이었다.

북한의 기대와 달리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작전은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 먼저 10월 1일, 국군 1군단이 동해안에서 38선을 돌파하면서 북진을 시작했다.

그에 앞서 9월 27일, 맥아더 원수 역시 미 합참에게 북진을 승인받아 세부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10월 7일에는 유엔이 북진을 결의함으로써 맥아더의 북진계획은 더욱 탄력을 얻게 됐다.
유엔군은 10월 9일, 서부지역에서 38선을 돌파하며 북진을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목표는 평양이었다.

평양 점령을 위한 주공부대로 1기병사단이 선정됐다. 1기병사단은 최단거리 접근로인 개성-금천-사리원-황주-평양으로 이어지는 1번 도로 축선을 따라 진격했다.
조공은 국군 1사단으로 임진강의 고랑포 일대에서 시변리(토산)-신계-상원 축선을 따라 평양의 동측방으로 진격하도록 했다.

기동력·화력 등 전투력에서 유엔군 부대와 비교조차 어려운 국군1사단이 평양탈환 조공부대로 선정된 배경에는 사단장 백선엽 준장의 간절한 건의가 반영된 것이었다.

최초 군단의 예비임무를 부여받았던 그는 군단장 밀번 소장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한국군과 국민들의 정서를 고려할 때 적의 수도 평양을 공격하는 데 한국군 부대가 빠져서는 안 된다.”
백선엽의 건의에 따라 최초 조공부대로 편성됐던 미 24사단은 군단의 예비가 됐다.

미 1군단의 북진은 10월 9일 오전 9시, 제1기병사단이 북한군 2개 사단이 배치된 금천을 공격하면서 시작됐다. 금천은 평양방어를 위한 최후의 보루였기 때문에 북한군의 항전은 결사적이었다.
또한 곳곳에는 지뢰가 대량으로 매설돼 있어 제1기병사단의 발목을 잡았다. 그 때문에 기병사단의 공격은 11일까지도 지지부진했다.

그러나 기병사단은 북한군 주력에 대한 정면공격과 병행해 2개 연대를 북한군 좌·우측으로 우회시켰다. 그리고 10월 12일 아침, 마침내 기병사단의 2개 연대가 북한군의 후방 한포리를 점령했다.

이어 기병사단은 14일까지 퇴로가 차단된 북한군 2개 사단을 섬멸했다. 미 1기병사단의 양익포위 전술이 승리를 거둔 것으로 지금까지도 양익포위 전술의 전형적인 사례로 소개되고 있다.

■ 북한의 평양방어와 유엔군의 선두부대 경쟁

1950년 10월 14일, 금천에서 북한군 2개 사단을 격멸한 유엔군은 평양을 향해 파죽지세의 진격을 계속했다. 북한의 전쟁지도부는 물론 중국까지도 국군과 유엔군의 진격속도는 전혀 예상 밖이었다.

다급해진 북한군은 황급히 평양방위사령부를 설치하고 황주-율리를 연한 외곽방어선과 대동강-동평양을 연한 내곽방어선에서 최후의 저항을 시도했다.
8군사령부는 “북한군의 평양방위부대는 북한군 17사단과 32사단 소속 잔류병력 8000명 정도일 것이다”라고 판단했다.

북한군의 저항은 평양을 방위하기 위한 것보다는 주요기관과 부대의 철수시간을 얻기 위함이었다. 김일성을 비롯한 전쟁지도부가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금천점령 하루 전인 13일, 이미 강계로 피신한 후였기 때문이다.

평양진격 작전에서 나타난 각 부대의 공통된 특징은 국군과 유엔군은 물론이고 각 사단, 사단 내의 각 연대까지도 서로 먼저 평양을 점령하겠다는 경쟁심에 불타 있었다. 특히 미 1군단 내에서 1기병사단과 국군 1사단의 경쟁이 치열했다.

그들 중 가장 유리한 부대는 주공부대인 미 1기병사단이었다. 그들은 14일, 금천의 북한군 2개 사단을 섬멸함으로써 평양공격의 기선을 장악했다.
1기병사단은 평양까지의 최단거리이며, 가장 양호한 기동공간을 가진 축선으로 공격하고 있었다. 미 1기병사단은 서흥(16일)-사리원(우회)-황주(17일)-평양남측 흑교리(18일)-대동강 남쪽 도달(19일)까지 파죽지세로 진격했다.

반면 미 1기병사단의 우측에서 공격하는 국군 1사단은 차량 부족으로 11일 아침에야 고랑포 정면의 38선 진지를 돌파할 수 있었다.
그 후 시변리(13일)-신계(14일)-수안(16일)-상원·율리(17일)-평양 동남쪽 지동리(18일)-대동강 동쪽 도달(19일 아침)까지 미 1기병사단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진격을 계속했다.

마침내 10월 19일 11시쯤, 국군 1사단 12연대가 대동교 동쪽 100m 지점에 있는 동평양의 선교리로 진출했다. 이어 11연대가 오후 2시 쯤, 동평양의 북쪽 미림비행장을 점령했다. 12연대와 11연대는 차례로 동평양에 입성한 부대의 영광을 차지하게 됐다.

국군 1사단 12연대와 미 1기병사단의 선두부대가 대동강변에 도달할 무렵인 19일 오전 11시쯤 북한군은 대동강 인도교와 복선철교를 폭파했다. 미군 1개 대대가 교량에 진입하기 직전이었다.

그들의 폭파작전은 시기적으로 매우 정확했다. 국군과 유엔군이 대동강을 도하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도하장비를 준비해야 했고 그 동안의 지체가 불가피하게 됐다.

10월 20일, 날이 밝자 대동강 남쪽에서 공격하는 미군은 부교를 가설하고 본격적인 도하를 감행했다. 반면 국군 1사단의 백선엽 사단장은 자신이 어릴 때 수영을 배웠던 이 지역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덕분에 1사단은 도섭지점을 도하장비가 도착하기 전에 찾아 급속도하를 감행할 수 있었다. 그 결과 19일 밤에는 15연대가 도하장비를 기다리고 있던 미군을 제치고 대동강을 건너 본평양에 진출했다. 이로써 국군 1사단은 제11ㆍ12연대가 동평양에, 제15연대가 본평양을 점령한 부대로 역사에 기록되게 됐다. <용호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 백선엽 장군이 말하는 평양탈환작전-감청 당한 적 통신병 “도망쳐야갔시요.”

우리 사단이 배속돼 있던 미1군단 참모장에게 평양 공격이라는 작명을 받고 기쁜 마음에 투명지를 살펴 보니 우리 사단은 해주~진남포 행이었다.

반면 미1기병사단은 경의선 축선으로, 미24사단은 시변리~수안을 거쳐 평양으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미 1군단장인 밀번 소장을 찾아간 나는 한국군인 우리 1사단이 평양을 공격해야 한다는 것과 청일전쟁 때 일본군 평양 공격 전례를 들어 우리 사단을 공격의 선봉에 서게 해줄 것을 요청하자, 밀번 장군은 참모장에게 전화해 1사단과 미 24사단의 임무를 바꾸라고 지시했다.

특히 1사단이 공격 첫날부터 난관에 부딪치면서 전차증원을 요청하자, 그는 흔쾌히 전차 1개 중대를 보내줘 미군사단과 동등한 위치에서 경쟁케 했다.

몇 차례 위기를 극복한 뒤 1사단은 파죽지세와 같은 기세로 평양을 향해 진군했다. 10월 14일 신계를 거쳐 16일에 수안을 지나고 17일에는 평안남도 땅 중화군 상원에 도달했다.

10월 17일 상원으로 진격하다가 갈림길인 율리에 이르러 나는 큰 결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연대를 한 방향으로만 기동시키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판단돼 15연대는 강동 쪽으로 우회시켜 대동강 북쪽 모란봉 쪽으로 공격해 들어가도록 지시했다. 대동강 상류 쪽에는 물이 깊지 않은 곳이 있어 도하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평양 태생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10월 18일 밤이었다. 아무리 쫓기는 군대라지만, 평양만은 내줄 수 없다는 듯 적의 저항은 제법 완강했다. 적은 나지막한 언덕마다 견고한 토치카를 구축하고 폭 넓고 종심이 깊은 방어선을 형성했다. 도로에는 갖가지 장애물을 설치하고 지뢰를 촘촘히 매설해 우리의 접근을 막았다.

한동안의 공격에도 지동리는 좀체 뚫리지 않았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적의 저항을 격파하라고 명령했다. 밤새도록 적진에 포격을 가했다. 고사포와 전차포를 총동원해 집중 포화를 퍼부었다. 다음날 새벽, 동이 트기 시작할 무렵 적진이 조용해졌다. 진지를 버리고 도망친 것이다.

나는 시가지에 무차별 포격을 막기 위해 각 부대 지휘관들에게 “평양에는 대동문, 을밀대, 연광정 같은 귀중한 문화재가 많으니, 그런 곳에는 절대 포격을 해서는 안 된다”고 지시했다. 태평양 전쟁 때 미국이 일본의 교토만은 폭격에서 제외해 문화재를 지킨 사례를 알고 있었던 미군 지휘관들은 내 요청을 이해하고 잘 협조해 줬다.

지동리를 돌파해 대동교를 향해 진격하다 통신참모 윤혁표 대위가 버려진 적 진지에서 전화선을 발견, 인민군 총사령부와의 통신을 감청하다 적 통신병과 통화가 됐다. 나는 윤 대위에게서 전화기를 받아들고 “동무, 수고가 많소. 누구요”하고 물었다. 그는 통신병이라 했다.

김일성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 그런 건 모른다고 했다. 나는 “그럼 수고하라. 마지막까지 잘 버티라우”라고 했다. 그랬더니 적 병사는 “아닙네다. 지금 미 제국주의 땅크 수백 대가 몰려오고 있습네다. 도망쳐 나두 살아야 하갔시요”라고 했다. 적의 동요와 혼란상이 한눈에 보이는 듯했다.

10월 19일 지동리를 넘어선 우리는 평양을 향해 총진격을 개시했다. 2개 보병연대가 길게 횡대로 전개해 적도를 향해 거침없이 달려 들어간 그 순간이 아직도 나의 뇌리에 선명하다. 1950년 10월 19일 오전 10시 50분. 우리는 드디어 제1착으로 목표지점에 도착했다. 목적지인 대동교 입구 선교리 로터리에 우리 1사단이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이다.

■ 국군 제7사단 제8연대의 평양진격-“평양만큼은 국군이 먼저” 특명

평양에 최초로 입성한 국군부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다소의 이견이 있다. 현재의 6·25전쟁사 기록을 기준으로 “국군 1사단이다”라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국군 7사단 8연대가 하루 먼저 평양을 점령했다”라는 주장도 있다.

7사단 8연대가 평양으로 진격하게 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0월 17일, 정일권 총사령관에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평양만큼은 국군이 먼저 점령하라”라는 밀명을 내림으로써 국군 2군단의 7사단과 8사단이 평양진출 경쟁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그중 8사단은 19일 성천을 점령하고 이어 20일 강동을 점령했으나 그때는 이미 평양이 점령된 뒤였기 때문에 사단의 진로를 돌려 덕천 방향으로 진출했다. 문제는 7사단 8연대의 경우다.

전쟁사 기록에 의하면 7사단 8연대는 18일 아침, 평양 동남쪽 40㎞ 지점의 율리를 출발해 오후 8시 쯤 삼등에 도착했다. 다음날인 19일 아침 삼등을 출발한 8연대는 삼산리에서 대동강을 급속 도하한 후 19일 밤, 김일성대학으로 진출했다.

따라서 1사단 15연대와 거의 같은 시간에 본평양에 진입한 것이 된다. 그런데 8연대의 김일성대학 점령 시간이 18일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7사단에서 편찬된 ‘상승부대사’는 참전용사의 증언을 기초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김호규 대위가 지휘하는 8연대 3대대 9중대가 1950년 10월 18일 오후 5시, 대동강 상류를 도하, 오후 9시쯤 평양에 최선두로 입성해 북한군 전선사령부가 있던 김일성대학 옥상에 일착으로 태극기를 게양했고, 퇴각하는 북한군 1사단 및 수도방위사단을 포위·섬멸하는 쾌거를 이룩해 사단의 용맹을 떨쳤다.”

이 같은 증언과 주장을 감안해 군사편찬연구소가 2009년에 펴낸 ‘6·25전쟁사’ 제6권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작전에는 관련내용이 다음과 같이 정리돼 있다.

“평양탈환작전은 10월 9일 38도선을 돌파한 이래 만 11일 만에 국군 1사단 11·12연대가 그리고 미 제1기병사단의 5기병연대가 동평양을, 국군 1사단 15연대와 국군 7사단 8연대가 본평양을 각각 점령함으로써 종료됐다.” 

■ 평양탈환 작전의 교훈-북진 10여 일 지체, 적 전투력 보강 아쉬움

전쟁 시 적국의 수도를 점령하는 것은 상대편 국민들에게 전쟁패배 사실을 명확하게 심어주면서 저항의지를 상실케 하는 전략적 효과를 얻는 길이다.

따라서 수도 피탈이 국가 패망으로 이어지는 사례가 허다했다. 가장 가까운 사례로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이 북베트남과 베트콩에 의해 점령됨으로써 전쟁은 끝이 났다. 반면 6·25전쟁의 사례와 같이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북한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도 그랬지만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했을 때도 북한의 전쟁지도부는 항복을 거부하고 압록강변으로 철수했다. 그리고 그들은 중국의 지원을 받아 항전을 계속하기로 했다.

따라서 국군의 제2군단까지 가세한 평양점령은 북한의 전쟁지도부를 차단하지 못한 이상 “북한의 중요도시를 점령했다”는 전술적 의미밖에는 없었다.

그때 만약 주력인 미 1군단이 평양을 직접 공격하지 않고, 평양의 동측을 크게 우회해 평양 후방의 순천이나 숙천으로 진출해 북한의 전쟁지도부를 포위했다면 전쟁의 양상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리델하트가 간접접근전략에서 제시한 최소저항선과 최소예상선을 이용한 기동이 더욱 효과적이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최소한 주공인 제1기병사단을 북한군이 강력히 방어하고 있는 금천 축선보다 비교적 미약한 전투력이 배치된 국군 1사단의 지역, 즉 토산-신계 축선에 투입했더라도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국군 제2군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미 1군단이 평양을 공격하는 동안 전속력으로 숙천-순천방향으로 진격해 북한군 철수부대의 퇴로를 차단했더라면 의외의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북한군 지도부가 안전하게 평양을 탈출할 수 있었던 보다 근본적 이유는 유엔군이 9월 30일께 38도선에 근접한 서부지역의 유엔군이 38도선을 돌파하기까지 10여 일을 허비했기 때문이다.

전쟁 초기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지체한 3일간의 시간을 이용해 국군이 지연전을 펼칠 여유를 회복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상황이 재연된 것이다.

국군과 유엔군이 38도선에 근접한 9월 30일부터 10월 9일까지의 10일간은 북한군에게 천금과도 같은 귀중한 시간이었다. 실제로 8군사령부가 38도선에서 지체한 단 며칠 사이에 북한군은 3개 사단을 신편한 후 금천 일대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했던 것이다.

물론 유엔군의 진격이 지연될 만한 사정은 있었다. 북진을 위한 유엔총회의 결의(10월 7일)가 필요했고, 낙동강에서 38도선까지 300여㎞를 불과 10여일 만에 진출한 탓에 부대 정비에도 다소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공격작전의 기세는 단 하루, 한 시간이 중요하다. 동해안의 국군 1군단이 이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1군단이 38선에서 지체함 없이 공격을 감행했기 때문에 원산상륙 작전 부대보다 더 빠르게 동해안의 요충인 원산을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굴러가는 바윗돌을 멈추게 하는 것도 어렵지만, 일단 멈춰 선 바윗돌을 다시 굴러가게 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힘이 필요한 법이다. 이것이 공격작전의 기세(氣勢)이며 주도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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