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원축록(中原逐鹿·중원의 사슴을 쫓는다는 뜻으로, 지위를 두고 다툼을 비유), 지록위마(指鹿爲馬·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다는 뜻으로, 윗사람을 농락하고 권세를 함부로 부림을 비유), 녹사수수(鹿死誰手·사슴이 누구의 손에 죽는가라는 뜻으로, 승패를 결정하지 못하는 것을 이름).
고사성어에 곧잘 등장하는 동물인 사슴. 사슴은 권력과 연관성을 지닌 ‘그 무엇’을 지칭하는 것으로 흔히 회자돼 왔다.
그런데 그 사슴이 옛 이야기 속이 아닌 21세기 청와대 안을 노닐고 다닌다면? 그것도 하필이면 서울 도심 한복판, 대통령이 머무는 공간을 제 삶터로 삼고 있다면 한번쯤 고개가 갸우뚱해질 법도 하다.
청와대의 사슴은 모두 8마리. 종(種)은 타이완이 원산지로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등지에 주로 분포하는 타이완꽃사슴(학명 Cervus nippon taiouanus)이다. 대개 몸길이 150㎝, 몸무게는 42∼90㎏에 이르며, 일명 ‘매화록(梅花鹿)’으로도 불린다.
청와대가 사슴을 들여온 것은 두 차례. 지난해 4월 15일 3년 8개월 된 3마리(♂ 1, ♀ 2)가 들어왔다. 이어 같은 해 6월 9일에 1년 6개월 된 3마리(♂1, ♀ 2)가 추가됐다. 서울숲에서 이사 온 이 사슴들은 청와대 경내에 마련된 별도의 환경적응장소(움막)에서 각기 열흘 동안 탐색기를 거친 뒤 경내에 자연방사(放飼)됐다.
이 사슴들은 인위적 관리를 받지 않는다. 스스로 식물의 어린싹이나 낙엽, 도토리 등 먹이를 찾고 번식에도 제한이 없다. 다만 최근엔 추운 날씨 탓에 먹이 구하기가 힘들 것을 염려해 청와대 측이 사료와 건초, 물을 사슴이 다니는 길목에 놓아두긴 한다.
꽃사슴은 번식력이 뛰어나다. 생후 1년이면 수태가 가능하고, 연 1회 한 배에 한 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그래서일까. 지난해 6월 11일과 27일엔 새끼 두 마리가 잇따라 태어나 새로운 가족의 탄생을 알리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2차 성징이 나타나는 생후 1년이 지나지 않아 암수 구별은 되지 않는다고.
청와대 경내엔 녹지가 풍부해 먹을거리가 끊이지 않고, 호랑이나 표범 같은 천적은 물론 생명을 위협하는 다른 요소도 없다. 이 때문에 2009년엔 개체 수가 더 늘 수도 있다.

하지만 외부인들이 청와대 경내에서 사슴과 조우(遭遇)하기란 쉽지 않은 일. 이는 오로지 ‘사슴 마음’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화창한 날엔 사슴들이 대통령 집무실이 자리한 청와대 본관 앞 대정원이나 녹지원(정원) 인근에서 뛰어놀지만, 청와대 직원과 관람객들이 가까이 접근할라치면 이미 어느 정도 사람에게 순치(馴致)됐음에도 쏜살같이 달아나곤 한다. 게다가 산악지대에서 주로 서식하는 습성 때문에 대개는 북악산 기슭에서 시간을 보낸다. 청와대 관람객이 하루 1500여 명에 이르는데도 이들을 봤다는 사람들이 드문 건 이처럼 사슴 맞닥뜨리기가 ‘복불복(福不福)’인 까닭이다.
울타리 없이 뛰노는 꽃사슴의 상서로움
그렇다고 실망하진 마시라! 지난해 8월 방사 100일을 기념해 청와대 경내에서 열린 ‘꽃사슴 사진전’에서는 방사 이후 청와대 측이 24시간 밀착 촬영한 사진 중 사슴들의 눈빛과 표정, 몸짓이 생생히 표현된 30점이 엄선돼 선보인 바 있다. 특히 같은 해 9월 26일 청와대를 관람한 전국의 공부방 아이들 100명은 당시 이 사진들에 탄성을 자아냈다. 청와대 측에 따르면 2009년엔 방사 1주년을 기념한 2차 꽃사슴 사진전도 계획중이다.
청와대에서 키우는 동물은 사슴만이 아니다. 진돗개와 흑염소도 있다. 전임 대통령들의 재임 시절에도 돼지, 토끼, 풍산개, 청둥오리 등 다채로운 동물들이 청와대의 이색 식구였다. 그 중엔 사슴도 있었다. 시계를 거꾸로 돌려 1971년 7월 당시 ‘대한뉴스’를 살피면, 청와대 뒤뜰에서 기르던 꽃사슴이 새끼를 낳자 시민들이 길조(吉兆)라며 흐뭇해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러나 당시의 사슴은 울타리 안에서 사육됐다.
인공사육과 자연방사. 30여 년을 뛰어넘는 이 격차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청와대는 “사슴을 경내에 방사한 것에 대해 청와대 내부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진 않고 있다”며 “다만 인간과 동물이 어우러진 한 본보기로서 자연스럽고 평화로운 정경으로 국민들에게 비쳤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예부터 신선과 함께 다닌다는 상서(祥瑞)로운 짐승, 사슴. 하지만 ‘열린 공간’에서 인간과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는 요즘 청와대 꽃사슴들은 상서로움이 지닌 권위와 고사성어 속 권력 따위와는 무관한 초월적 존재, 한껏 자유롭고픈 우리네 희망의 또 다른 재현이 아닐까.
글·김진수 기자
문의처 : 문화체육관광부 정책포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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