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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足)에 대한 단상

2018.01.31 한기봉 국민대 초빙교수/언론중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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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부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사람의 발을 가리켜 ‘인간공학 상 최대의 걸작이자 최고의 예술품’이라고 했다. 인체는 206개의 뼈로 구성돼 있는데 양쪽 발에만 약 4분의 1인 52개가 몰려있다. 발에는 19개의 근육과 힘줄이 있는데 발꿈치 아래 아킬레스건은 우리 몸에서 가장 크고 가장 힘 센 힘줄이다. 발은 또 동작과 비틀림을 견디게 해주는 인대와 관절이 가장 많이 밀집된 부위다. 

발은 제2의 심장이라고도 한다. 걸을 때 심장에서 보낸 혈액을 다시 온몸으로 보내는 펌프 작용을 한다. 발은 신체의 모든 부분과 연결돼 있다. 우리나라 결혼 풍습 중에 신랑 발을 때리는 건, 신랑의 피로를 풀어주고 첫날밤을 정력적으로 보내라는 의미다. 발은 지구상 생물 중 인간만이 유일하게 직립보행을 가능하게 하고 두 손을 자유롭게 풀어줘 인류문명을 시작하게 만든 일등공신이다.

세족식(洗足式)이라는 게 있다. 불교나 천주교 같은 종교에서 시작됐다. 예수는 최후의 만찬을 하기 전에 열두 제자의 발을 씻겼다. 입학식이나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군 입대식, 어버이날,자선 행사 같은 데서 종종 세족식을 볼 수 있다. 남의 발을 씻겨주는 건 사랑과 섬김의 의미다. 사람의 발은 일생동안 지구 네 바퀴 반을 돌 정도로 고생한다. 발 뻗을 곳이 없다는 말은 쉬거나 의지할 곳이 없다는 말이다.

발의 임무는 몸을 바로잡는 일이다. 한자 족(足)은 무릎을 굽힌 발의 형상이다. ‘만족’ ‘충족’ ‘부족’이란 단어에 쓰는 ‘족’자는 발을 말한다. ‘부족(不足)하다’는 건 발이 없다는 것이다. 발 ‘足’자에 만족의 의미가 포함된 연유는 여러 설이 있는데, 발이 있어야 이곳저곳 다니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신발에 발이 마침맞게 들어찬 느낌이 바로 만족이라는 설도 있다.

얼핏 신체 부위 중에서 하찮은 듯하면서도 기실 매우 중요한 게 발이다. 하물며 발가락 티눈도 신경이 쓰이는데 바람만 스쳐도 아프다는 통풍, 무지외반증이나 족저근막염, 심한 발바닥 물집 같은 걸로 아파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발바닥이 갈라진 느낌, 바늘로 찌르는 느낌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다.   

국민을 숨죽이게 한 호주오픈 남자단식 4강전에서 정현 선수가 갑자기 기권하고 테니스 코트를 나갈 때 솔직히 그가 미웠다. 전 국민이 얼마나 그에게서 위안과 희망을 얻고 응원을 했는데 그 바람을 저버리다니. 아름다운 패배는 생각했어도 기권은 상상조차 못한 일이었다.

그가 기권 후에 공개한 발바닥의 참상을 보고서야 비로소 “아 그랬구나. 어쩔 수 없었구나” 납득이 됐다. 테이핑을 벗긴 발바닥은 처참했다. 물집이 터져 굳은살이 박인 곳에 또 물집이 생기면서 피멍까지 든 빨간 생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을까. 그 참담한 발로 8강전에서 전 세계 1위 조코비치를 이겼다니 정현 선수에게 잠시나마 섭섭한 마음을 가졌던 게 미안했다. 테니스는 ‘피 흘리지 않는 복싱’이라고 불릴 만큼 격렬하다. 방향 전환이 많은 경기라서 웬만한 젊은 발바닥도 배겨내기 힘들다.

박세리, 강수진, 박지성, 이상화, 김연아, 손연재, 이봉주…. 국민 모두가 아는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아름다운 발’을 가진 스타라는 것이다. 아마 이 중 가장 ‘아름다운’ 발은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일 것이다. 열 발가락 마디마다 마치 소나무 옹이(송절·松節)처럼 뼈는 튀어나와 있고 발가락들은 일그러져 있고 발톱은 뭉개져 있다. 우아한 백조의 토슈즈 안에는 무시무시한 발가락이 숨겨져 있던 것이다.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숭고한’ 발이다.

강수진은 자서전 ‘나는 내일을 기다리지 않는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편안하게 길을 걸으며 풍경을 감상할 때 나는 발가락으로 온몸을 지탱하며 목숨을 걸고 전쟁처럼 하루를 보냈다. 발레를 하기 위해 태어난 몸은 없다. 나는 경쟁하지 않았다. 단지 하루하루를 불태웠을 뿐이다. 까지고 부러지고 찢어진 내 두 발, 30년 동안 아물지 않은 그 상처가 나를 키웠다.”

어찌 보면 신체 부위 중 가장 솔직한 놈이 발인 것 같다. 발은 거짓말을 안 한다. 할 수가 없다. 손(手)도 고생하지만 발만큼 혹사당하지는 않는다. 오늘 내 발을 무심히 내려다 본다. 나를 이 자리에 이만큼 데려온 묵묵한 발이다. 육신의 가장 낮은 곳에서 온몸의 무게를 받아내고 대지의 생명을 빨아들여 날 강건하게 해준 255㎜ 길이의 두 발이다 .

그 흔한 발 마사지 호강 한번 제대로 못해줬다. 굳은살 한번 풀어주지 못하고, 족부클리닉이니 뭐니 하는 데도 못 데려가주고, 케어 용품 한번 못 사줘 미안하다. 오늘 내 두 발에게 말한다. 아직은 땅바닥을 딛고 걸을 수 있게 수고해줘 고맙구나. 오늘 밤 따스한 물에 족욕으로나마 너를 위로해주마.

말이 나온 김에 나와 함께 반평생을 걸어온 아내의 고단한 발도, 출퇴근하느라 하이힐에 지친 딸의 작은 발도 씻겨주고 싶다. 설에 고향에 가면 어머니의 늙고 주름진 발도 처음으로 한번 씻겨드릴 거다. 기뻐서 눈물을 흘리시겠지. 모두의 발에 입을 맞추고 싶다. 

발에 대한 묵상/정호승

저에게도 발을 씻을 수 있는
기쁜 시간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까지 길 없는 길을 허둥지둥 걸어오는 동안
발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 했습니다.
뜨거운 숯불 위를 맨발로 걷기도 하고
절벽의 얼음 위를 허겁지겁 뛰어오기도 한
발의 수고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 했습니다.
이제 비로소 따뜻한 물에 발을 담그고 발에게 감사드립니다.
굵은 핏줄이 툭 불거진 고단한 발등과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 같은 발바닥을 쓰다듬으며
깊숙이 허리 굽혀 입을 맞춥니다.
그동안 다른 사람의 가슴을 짓밟지 않도록 해주셔서
결코 가서는 안 되는 길을 혼자 걸어가도
언제나 아버지처럼 함께 걸어가 주셔서 감사합니다.
싸락눈 아프게 내리던 날
가난한 고향의 집을 나설 때
꽁꽁 언 채로 묵묵히 나를 따라오던 당신을 오늘 기억합니다.
서울역에는 아직도 가난의 발들이 밤기차를 타고 내리고
신발 없는 발들이 남대문 밤거리를 서성거리지만
오늘 밤 저는 당신을 껴안고 감사히 잠이 듭니다.

한기봉

◆ 한기봉 국민대 초빙교수/언론중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언론보도로 피해를 본 사람과 언론사 간 분쟁을 조정하는 언론중재위원이며, 국민대 언론정보학부에서 글쓰기와 한국 언론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hkb8210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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