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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에 새겨진 해방의 발자국

[광복절 특집 ④] ‘알쓸신기’ 팀이 일상에서 찾아낸 해방 전후의 모습들

2017.08.15 정책기자 우인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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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광복 72주년 되는 해입니다. 광복 72주년을 맞아 법학, 식품공학, 국문학 전공의 정책기자 3명이 ‘알쓸신기(알면 쓸데 있고 신비한 기자단)’ 팀으로 뭉쳐, 해방 전후 격동기를 견뎌낸 민중들의 이야기를 돌아보기로 했습니다. 문학, 공연, 음식, 그리고 우리 동네에 얽힌 해방 당시 우리네 이야기입니다.

마지막으로 곳곳에 남겨진 그 시절의 기록들을 살펴봅니다. 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는 일제 강점기의 잔재와 함께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번엔 지역에 남겨진 그 날의 기록들을 살펴보고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할지 함께 고민해보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편집자주>

우인혜 기자(이하 우) : 다양한 곳에 우리 아픔이 녹아있다니 뭔가 마음이 아려와. 멀리서 찾지 않아도 우리가 사는 곳곳에 아픈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어.

한초아 기자(이하 한) : 맞아. 내가 살고 있는 대전이 지금과 같은 도시의 모습을 형성한 것은 일제에 의해서였다고 해. 참 아이러니하지? 1905년 일제는 본격적인 식민과 수탈을 이유로, 대전에 경부선 철도를 놓기 시작해. 철도부설은 상상 이상의 빠른 근대화를 가져왔고, 자연스레 일본인들이 대전역 중심으로 모여살기 시작하지. 이로 인해, 대전역을 주축으로 철도관사촌과 상권이 형성되고 말야. 이후 호남선이 개통되면서, 대전은 수도권, 영남, 호남을 아우르는 교통의 요지로 발전했어.

김연수 기자(이하 김) : 미군기지로 많이 알려진 용산도 비슷한 역사를 가졌어. 용산은 조선 궁궐과 가까운 동시에 뱃길과 땅길이 이어지는 교통 요충지였기 때문에 용산을 일본군 기지로 삼았고, 군 기지를 중심으로 원효로, 청파동, 후암동 일대에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대.

아직도 우리 근처에 남아있는 식민지배의 흔적이 많다. 적산가옥을 개조한 카페의 모습.
아직도 우리 근처에 남아있는 식민지배의 흔적이 많다. 적산가옥을 개조한 카페의 모습.
 

그래서 청파동엔 일본식 집이 많아. 이렇게 해방 후, 일본이 한반도에서 철수하면서 남기고 간 과거 일본인 소유의 주택을 통칭해 ‘적산 가옥’이라고 하는데, 주로 2층집 형태에 지붕과 창문 형태가 매우 독특하고 낡은 목조 건물 구조가 특징이지. 1990년대 이후로 적산가옥이 많이 사라지거나 개조됐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눈에 보면 쉽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그 때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있어.

지금은 시민들의 문화공간으로 개방된 구 충북도지사관사. 일식과 양식을 혼합해 지어서 그 당시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불리기도 했다.
지금은 시민들의 문화공간으로 개방된 구 충북도지사 관사. 일식과 양식을 혼합해 지어서 그 당시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불리기도 했다.
 

: 지금은 시민들의 문화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1937년 충북도청 본관이 건립되면서 1939년 인접 지역에 함께 지어진 충북도지사 관사가 충북의 대표적인 일제 강점기 건물이야. 지금은 충북문화관으로 개장해 충북지역의 문인들의 전시 공간과, 일식 다다미방은 북카페로 사용하고 있어.

충북문화관 내부는 일본식 다다미방으로 구성됐다. 지금은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북카페로 개장해 관광객들에게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충북문화관 내부는 일본식 다다미방으로 구성됐다. 지금은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북카페로 개장해 관광객들에게도 인기를 끌고 있다.
 

일식 다다미방과 서양식 창호 등으로 이색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냈지. 이 건물이 일제강점기 시절 청주에서 가장 예쁜 집으로 불렸다니 아이러니해.

: 대전에 위치한 옛 충남도청(현 대전근현대사전시관)도 충북도청과 비슷한 역사를 갖고 있는 듯해. 충남도청은 1932년 일제의 식민 정책으로, 대전 이전을 하면서 지어진 대표적인 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재 제18호)이야. 광복 후에는 미 군정청으로, 한국전쟁 중에는 임시 중앙청 건물로 사용되기도 했었지. 이후 다시 도청사로 사용되다가 2012년 12월 충남도청이 내포 신도시로 이전하면서, 대전의 근현대사를 전시하는 곳으로 사용되고 있어. 1930년 모더니즘 양식을 원형 그대로 볼 수 있는 곳이지.

충남도청 역시 일제시대 지어진 근대문화유산이다.
충남도청 역시 일제시대 지어진 근대문화유산이다.
 

: 용산에도 일본군사시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어. 지금의 신광여자고등학교 자리(서울시 용산구 청파로 263)는 일본군의 경성연합군포로수용소가 있던 곳이야. 그런가하면 40년 이상의 오래된 역사를 안고 있는 남영역(지하철 1호선) 주변 남영동 일대는, 대규모의 일본군 연병장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지. 군사훈련 외에도 관병식, 비행 대회 등, 일본군의 기념행사가 이뤄지던 곳이었대. 일본이 군사적 목적을 위해 우리 땅을 멋대로 유린하던 역사를 떠올리면, 매우 착잡한 기분이 들어.

: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빼앗은 기록도 많아. 일제 강점기 일본 관료들은 청주성을 허물고 그 성벽의 벽돌을 수로공사에 사용했대. 충북 보은군 속리산 여적암에서 북가치로 이어지는 숲에 있는 수백 그루의 소나무도 그 증거 중 하나야. 1945년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치르면서 항공연료를 대체할 송진을 채취하기 위해 나무를 V자 모양으로 긁어 상처를 냈지. 그 당시 튼튼한 나무만 골라 상흔을 냈지만, 그날의 아픔을 견디듯 나무들은 지금도 잘 자라고 있어.

: 난 해방촌이라고 불리는 용산 2가동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해. 해방촌의 명물 108계단이 있는 곳 말이야. 정겨운 옛 골목 계단의 향수 정도로 생각되는 이 길목은, 사실 일본군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경성호국신사로 향하는 길이었어.

이범선 작가의 ‘오발탄’을 보면 “산비탈을 도려내고 무질서하게 주워 붙인 판잣집들이었다. 레이션 곽을 뜯어 덮은 처마가 어깨를 스칠 만치 비좁은 골목이었다. 부엌에서들 아무데나 마구 버린 뜨물이, 미끄러운 길에는 구공탄 재가 군데군데 헌데 더뎅이 모양 깔렸다.” 라고 쓰고 있어. 지금은 외국인들도 많이 살면서 인근의 이태원, 경리단길과 함께 서울의 명소로 자리 잡았지만, 사실 기성 세대가 많이 기억하고 있는 ‘해방촌’의 이미지는 ‘판자촌’이야. 해방 후, 갈 곳 없는 빈민들이 남산기슭에 모여들어 살았고, 6.25 전쟁으로 월남한 피난민들까지 가세해 살던 가난한 동네거든.

내가 봤던 연극 ‘1945’에서도 느낀건데, 해방이 되었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조국 땅에서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 채로, 여전히 혼란스러워하고 역사의 풍파에 치여 밀려났던 것 같아.

대전 소제동의 창작촌. 소제동은 일제시대 철도를 중심으로 발전했던 동네다.
대전 소제동의 창작촌. 소제동은 일제시대 철도를 중심으로 발전했던 동네다.
  

: 대전역 동광장 뒷편에 위치한 소제동은 우암 송시열이 자신의 거처를 삼을 정도로 아름다웠던 소제호(蘇堤湖)에서 유래한 곳으로, 1927년에 호수를 메워 그 자리에 거대한 철도관사촌을 형성한 곳이야.

1920년대 말 이곳에 일본 철도기술자들을 위한 관사가 건설되면서 소제동은 철도관사촌으로 존재하게 돼.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철도관사촌 중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를 지닌 대전 소제동 철도관사촌은 일제의 수탈과 억압의 역사와 6.25 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40여 채의 가옥이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어.

소제동을 거닐다보면 나무 전봇대를 볼 수 있는데, 이 나무 전봇대는 일제시대에 제작된 것이야. 사진처럼 숫자와 한글이 섞인 표가 전봇대에 걸려있지. 2017년인 오늘날에, 골목 곳곳에서 근대문화유산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느껴져.

그중 ‘소제관사 42호 창작촌’은 지난 일제강점기 철도 근로자들의 숙소로 사용했던 건물이야.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갖추고 있지. 이곳은 2012년 초 지역문화컨설팅 사업단에서 임대해, 연구실 겸 시민들을 위한 열린 문화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어.

숙명여대설립자 순헌황귀비의 칭호를 딴 숙명여대 순헌관 건물.
숙명여대 설립자 순헌황귀비의 칭호를 딴 숙명여대 순헌관 건물.
 

: 일제의 외압 속에서도, 우리 민족은 민족 교육의 중요성을 잊지 않았어. 서울 용산구 청파동엔 두 곳의 황실 설립 교육기관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황귀비가 세운 민족여성교육기관 ‘숙명여자대학교’야.

1906년에 설립한 명신여학교에서 시작해 우리나라 교육 사상 최초로 한국인 교장이 취임하고, 황실에서 하사한 농경지 수익금을 학교재원으로 하는 등, 외국 자본 의존 없이 오직 우리 힘으로 일으킨 민족여성교육의 효시란 점에서 큰 의의가 있어. 여기에,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한 지성인들의 모금 운동까지 보태져서 1938년 숙명여자 전문학교로 발전해. (1948년 해방 후, 숙명여자대학교로 개칭.)

비록 작은 규모의 여학교였지만, 일찍부터 학생 항일 운동의 본보기를 보여줘. 1911년, 일왕의 생일 축하를 거부하는 무언 항쟁을 했고, 1919년에는 전교생이 3.1 만세운동에 뛰어들었어. 무기정학을 당하고 감옥살이까지 했지만 학생들은 굴하지 않고 강압적인 일본식 교육에 반대하며 동맹휴학을 일으켜. 결국 1927년, 일본인 교무주임을 사퇴하게 만들고, 숙명에 다시 자주적인 조선식 교육을 불러와.

선린인터넷고등학교(좌)의 모습과 선린상업학교에 고종황제가 하사한 어사목 향나무(우).
선린인터넷고등학교(좌)와 선린상업학교에 고종황제가 하사한 어사목 향나무(우).
 

: 숙명여대 말고도 황실이 세운 또 다른 학교를 선보이자면 선린인터넷고등학교도 있지. 과거, 고종 황제가 1899년에 설립한 관립상공학교에서 시작한 이후 선린상업학교로 분리해 1913년에 현재 용산 내 위치로 이전했대.

일제 강점기 한 때, 일본인에게 학교 소유가 넘어간 적도 있었지만, 일제강점기 당시 3.1 만세운동에 대대적으로 참가하는가 하면, 일제의 차별교육에 반대해 조선인 학생 전원이 자퇴원 제출, 동맹휴학을 단행하기도 했어.

: 내 모교이기도 한 충북대학교에서는 우리의 역사를 잊지 않으려는 노력도 하고 있어. 중국 속의 청주라 불리는 정암촌과 13년간의 끈끈한 연을 소개해보려고 해. 정암촌은 1938년 일제강점기 강제 이주 정책에 의해 중국 내 길림성 도문시 양수진(함북 온성군과 두만강을 경계로 마주한 지역)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충북의 80여 가구 주민이 집단 정착한 마을로 ‘중국 내 충북 마을’로 불리고 있어.

중국 정암촌은 지난 2000년 충북대 교수 등 학계와 충북도청 공무원 등이 ‘정암회’를 조직해 후원하면서 지역사회에까지 알려졌대. 충북대는 지난 2006년부터 해마다 여름방학 기간 동안 학생해외봉사단을 파견해 13년째 봉사활동을 펼쳐오고 있어. 현재 정암촌에는 청장년층이 한국과 도회지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고 마을에는 고령자와 어린이들만 남아 있어 젊은이들의 손길이 필요하거든. 정암촌에서 빨래, 도배, 집수리 등 환경개선 봉사, 의료봉사, 농촌봉사, 교육봉사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도움도 드리지. 

충북대학교 해외봉사단 학생이 정암촌에서 농촌봉사를 돕고 있다. 정암촌은 중국 속의 청주라 불리며 청주지역에서 잊혀진 청주아리랑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충북대학교 해외봉사단 학생이 정암촌에서 농촌봉사를 돕고 있다. 정암촌은 중국 속의 청주라 불리며 청주지역에서 잊혀진 청주아리랑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이곳이 중요한 이유는 또 있어. 현재 청주에서는 잊혀지다시피 한 청주아리랑을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야. 청주아리랑의 가사는 수줍은 처녀의 여린 시절부터 결혼 후 고난을 이겨내는 강인한 여성이 되기까지의 삶을 그려. 힘든 삶에서도 해학과 익살을 잃지 않지. 충청도아리랑의 작가 리혜선 선생에 의하면 당시 정암촌 주민들은 아이들에게 밥을 먹기 전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 대답을 확인한 후 밥을 줬다고 해. 그래서 청주아리랑은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입에서 입으로 대물림을 하며 만주 속의 청주인 정암촌에 남아 있을 수 있었대.

이번 취재를 하면서, 어려운 시대 속에서 민족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노력한 지식인들, 그리고 서로에 의지하며 어둠을 버텨낸 민중들의 흔적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됐다.

지금은 그 의미가 퇴색돼버린 공간도 있었고, 그 역사를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곳도 있었다. 끊임없이 고민하고, 포기하지 않고 함께 단결하는 자세는 지금 우리 세대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아물지 않는 역사의 상처를 무작정 덮어버리기 보다는 그들의 아픔을 기억하고, 보듬으며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잘 살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닐까.


대한민국 정책기자단 우인혜 pwoohj@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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