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는 무엇이든 빠르게 변합니다. 제가 사는 대학가만 해도 그렇습니다. 한 해에 수많은 가게들이 새로 개업하고, 폐업하고, 리모델링해 새로운 가게가 됩니다.
대학교 1학년 때 동기들과 가던 추억의 가게들은 이제 거의 사라져 버렸습니다. 대학 시절의 추억이 남아있는 장소가 사라지면 속상한 마음이 들지만, 이제는 아쉬우면서도 그러려니 합니다.
서울시에서는 오래된 가게가 오래 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오래가게’ 라는 브랜드를 만들었다. |
서울시에서는 오래된 가게가 오래 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오래가게’ 라는 브랜드를 만들었습니다. ‘오래가게’는 일본식 한자어 노포(老鋪) 대신 오래된 가게를 지칭하는 새 이름을 찾기 위한 공모를 통해 선정한 명칭입니다.
오래가게는 개업한지 30년이 넘었거나 2대 넘게 전통을 계승한 곳,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장인들이 운영하는 가게입니다. 시민 추천과 자료조사를 통해 기초자료를 수집하고, 전문가와 문화해설사, 외국인, 대학생들의 현장방문과 꼼꼼한 평가를 거쳐 2017년 처음으로 39곳이 선정되었습니다. 이후 2018년 서북권에서 26곳이 선정되어 모두 65곳이 되었습니다.
오래가게 가이드북.(출처=2018~2019 서울시 오래가게 가이드북)
서울에 산지 올해로 4년 차지만, 주로 학교 근처에서 생활한 탓에 서울은 아직도 제게 낯선 도시입니다. 어느 날 문득 세월의 흔적을 머금은 오래가게들을 돌아보는 하루를 보내보기로 했습니다.
자연 속의 한옥 미술관, 경인미술관
경인미술관 전경.
서울 인사동에 있는 경인미술관 입구를 지나자 전통의 느낌을 그대로 간직한 한옥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정말 미술관이 맞나?’ 싶어 고개를 돌려보니 경인미술관을 한자로 쓴 문패가 반겨줍니다.
경인미술관은 1983년부터 지금까지 자리를 지켜온 오래가게로, 약 550평의 널따란 대지 위에 여섯 개의 전시장과 아틀리에, 야외 전시장, 정원과 전통다원이 있습니다. 모든 전시가 무료로 개방되어 있어 다른 미술관과 달리 매표소가 없습니다.
경인미술관의 건물은 지방문화재 제16호로 지정된 곳으로, 구한말 개화파 박영효의 저택이었던 곳입니다. 이곳은 서울 8대가 중 하나로 이름났던 곳으로, 조선시대 양반가의 건축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제가 방문한 날에도 경인미술관에서는 여섯 개의 전시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미술관 부지 위에 각각 세워진 여섯 채의 한옥 전시장에서는 서예, 사진, 동양화, 패션 등 다채로운 주제의 전시회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전시 주제는 매주 달라진다고 합니다.
경인미술관 제2전시실에서 열린 제6회 이경화 의상전. |
경인미술관의 전시는 주로 동시대 작가들의 개인전으로, 다채로운 주제로 표현된 현대예술을 만나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매표소가 없다 보니 관람객들은 서로 다른 전시관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전시를 관람하고 있었습니다.
전시관 만큼이나 미술관 내에 위치한 전통다원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한가로운 평일 오후, 관람객들은 녹음이 가득한 미술관 안에서 전시를 구경하고, 담소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경인미술관은 서울 시내의 ‘문화 공원’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계란 동동 띄운 쌍화탕을 만나다, 지대방
미술관에서 전시를 보았으니 차를 한 잔 마시기로 했습니다. 그러고보니 내내 궁금했던 차가 있습니다. 옛날 드라마를 보면 등장인물들은 다방에 가서 독특한 차를 시키곤 했습니다. 바로 계란을 동동 띄운 쌍화탕이었습니다. ‘차에 계란을 넣어 먹는다고?’ 라는 경악스러움은 금세 호기심으로 바뀌었지만, 막상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없었습니다.
인사동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찻집, 오래가게 지대방의 내부. |
마침내 그 호기심을 인사동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찻집 ‘지대방’에서 풀 수 있었습니다. 인사동은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품고 있는 길답게 많은 찻집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지대방은 1982년부터 이어져 온 전통찻집이라고 합니다. 전통찻집답게 내부로 들어서자 차분하고 옛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졌습니다.
쭈뼛쭈뼛 가게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자, 종업원이 동그란 대나무에 적힌 메뉴판을 가져다 줍니다. 여러 가지 전통차와 빙수, 죽 등이 메뉴로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벽면은 손님들의 날적이로 사용되는지, 오래된 낙서들이 정겹게 덧대어져 있었습니다. 고민하다 늘 궁금했던 쌍화탕을 시켰습니다.
계란을 넣은 쌍화탕. |
오래가게에서 처음 맛본 쌍화탕은 건강한 한약 맛이었습니다. 제 앞에 쌍화탕이 놓이자 고요한 카페 안으로 진한 한약 냄새가 솔솔 퍼졌습니다. 상상도와는 달리 무거운 계란 노른자는 쌍화탕의 가장 바닥에 눌러앉아 있어, 숟가락으로 끌어올려야 겨우 동동 뜬 척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오래도록 품고 있던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오래가게 지대방에서는 차를 마실 뿐만 아니라 차에 대한 설명과 함께 차 마시는 법을 배울 수도 있습니다. 이전에도 한 대학교의 차 동아리가 차 마시는 법을 배우러 지대방을 찾았다고 합니다. 다만 차 마시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사전예약이 필요합니다.
34년 동안 한 자리를 지켜온 효자베이커리
효자베이커리 입구. |
“어서오세요. 콘브레드 마지막 한 판 나왔습니다.”
가족들에게 선물할 빵을 사가려 빵집으로 들어서자 친절한 인사가 반겨줍니다. 서울 통인시장 입구 옆에는 바게트 빵을 한가득 안은 사람 모형이 문지기처럼 서 있는 빵집. 바로 오래가게 ‘효자베이커리’입니다.
효자베이커리는 청와대에 26년간 케이크를 납품했던 베이커리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자자한 명성에 비해 내부는 생각보다 소박했는데, 가게의 중앙과 벽면에는 인기 빵인 콘브레드, 크림치즈빵 등의 다양한 빵들이 빼곡했습니다. 다른 빵집에서는 잘 찾아볼 수 없는 옛날 과자와 버터크림 케이크 등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올해로 34년 됐어요. 사장님이 20대 때부터 하셨습니다.”
가게가 얼마나 되었냐는 물음에 곧장 시원시원한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효자베이커리는 1987년부터 시작해 34년간 이 자리를 지켜온 빵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자주 찾는 단골손님들은 리모델링으로 선반의 위치가 바뀐 것까지 세세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효자베이커리는 전통시장 같은 인심이 살아있는 곳이었습니다. 시식을 해보라며 빵을 잘라 주기도 하고, 계산을 할 때는 소보로빵을 서비스로 주기도 했습니다.
효자베이커리에서 판매되고 있던 빵과 과자들. |
“웬 빵이야?”
빵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가자 아버지가 묻습니다. 오래가게에서 사온 빵이라고 하니 독특하게 생겼다며 빵 하나를 집어 듭니다. 심상하게 빵을 뜯던 손길이 한 입이 되고, 두 입 세 입이 됩니다. 빵을 드시던 아버지는 ‘꼭 어릴 때 급식으로 나오던 빵 같다’는 말을 합니다.
오래가게의 빵과 함께 아버지의 옛날이야기가 술술 흘러나왔습니다. 아버지가 어릴 때의 급식 이야기, 급식에 나오곤 하던 빵의 맛, 남는 빵을 가지려고 다투던 친구들 이야기 등… 오래가게가 품고 있는 시간이 아버지의 옛 추억을 불러왔나 봅니다. 새삼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한 자리를 지켜온 오래가게들이 대단하게 느껴졌습니다.
오래가게들은 서울의 옛 모습과 전통을 각자의 방식으로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아쉬웠던 점은 영업 여부를 잘 알 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날 오래가게 7곳을 방문했지만, 그중 3곳은 휴가, 품절, 장시간 자리비움 등의 이유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오래가게가 서울시의 브랜드인 만큼, 오래가게의 영업시간이나 휴가 여부를 실시간으로 알 수 있는 시스템이 있으면 편리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울시는 천천히 걸으며 서울의 시간과 역사를 짚어볼 수 있는 ‘오래가게 산책 코스’를 가이드북을 통해 안내하고 있습니다. 오래가게 산책길에는 각각 다른 특색을 가진 세대공감길, 청춘유랑길, 옛가게길, 시간여행길, 옛날시장길의 다섯 가지 길이 있습니다. 서울에서 특별한 하루를 보내고 싶다면 오래가게를 따라 서울 골목 산책을 해보는 건 어떨까요?
오래가게 가이드북 : http://www.seoulstory.kr/front/kor/storyLibrary/view.do?idx=85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