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서문. 너무나 유명해 첫 문장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읊을 수 있을 것이다.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로 서로 사맛디 아니할세 이런 전차로 어린 백성이 니르고저 할 빼니셔도 마참내 뜻을 시러 펴디 못 할 노미 하니라 내 이를 위하여 어엿삐 녀겨 새로 스물여덟짜를 맹가노니 사람마다 하여 수비니겨 날로 브쓰매 편하긔 하고져 할 따라미니라.’
세종은 한글을 창제할 적에 어째서 이 문자를 만들었는지를 서문에 명확히 밝혀두었다.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말과 달라서 한자와 서로 잘 통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 이를 안쓰럽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모든 사람이 쉽게 익혀서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정도로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백성을 가르치는 올바른 소리라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이름에 걸맞는 서문이다. 한자를 몰라 억울한 일을 당하는 백성의 답답한 심정을 헤아려 안쓰럽게 느낀 마음이, 시력을 잃어가면서까지 한글을 만든 그 마음이 서문에서 단정하게 다가온다.
글자를 몰라 답답한 사람이 없도록 굽어 살피겠다는 마음 그대로, 한글은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배워 소통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순우리말만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영어 ‘Coffee’를 발음할 때 ‘코-히’라고 발음하는 일본인과 달리, 우리는 ‘커피’라고 소리가 나는 대로, 들리는 대로 발음하고 쓸 수 있다. 발음되는 대로, 들리는 대로 곧장 표기할 수 있다는 건 큰 장점이지만, 그래서인지 영어와 혼재된 신조어들이 넘쳐난다는 문제점도 있다.
2023년에 국립국어원의 언어 순화 운동을 거친 단어들 중, 잘 다듬어졌다는 평가를 받은 말들의 이전 표기를 보면, 당최 무슨 말인지 뜻이 바로 와닿지 않는다. ‘솔로 이코노미(1인 가구 경제)’나 ‘칠링 이펙트(위축 효과)’, ‘애그테크(첨단 농업 기술)’ 등이 바로 그것이다. 만약 내가 대화 중에 저런 단어를 들었다면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하고 “그게 무슨 뜻인데?”라며 되물어봤을 것 같다.
전문 용어뿐만 아니라 일상어에서도 영어나 다른 외국어와 혼재된 단어들이 눈에 보인다. 내 또래 친구들은 ‘킹받다’나 ‘갓생’ 등의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매우 화가 난 상태를 이르는 ‘열받다’라는 단어 대신에 ‘킹(King)’을 접두사처럼 넣어 ‘매우, 확실히’라는 의미를 추가해 ‘킹받다’라고 말하며, 부지런하고 생산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을 가리켜 영어 단어 ‘갓(God)’와 ‘인생’의 합성어로 ‘갓생’이라는 단어를 쓴다. 심지어는 한글을 쓰는 대신 발음되는 대로 숫자를 집어넣기도 한다. “무슨 일이야?”를 변형시켜 ‘머선129’라고 묻는 경우도 많다.
언어에는 전염력이 있어서, 주변 사람들이 그런 표현을 사용하면 거슬리다가도 나도 무심하게 반응하거나, 사용하게 된다. 한글 파괴라고 보는 시선도, 발랄하게 신조어를 만드는 거라고 반박하는 목소리도 모두 팽팽하다. 그렇지만 문자가 완전히 망가지면 문자가 담고 있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문자 사용자의 인식 역시 함께 망가지기 십상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언어 생활을 꾸준히 되돌아보며 올바르게 언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2024 한글주간의 주제는 “괜찮아?! 한글”이다. 무분별하게 외국어를 남용하고, 과도하게 줄임말을 사용한다거나 신조어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한글이 홀대받는 현 실태를 되돌아보기 위해 이러한 주제를 설정했다고 한다.
사실 나는 신조어 유행에 뒤처지는 사람이라 신조어를 무분별하게 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언어의 경제성을 핑계로 줄임말을 꽤 자주 사용하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수업 강의명처럼 그냥 말해도 될 법한 단어도 약자처럼 줄여서 말하곤 한다. 나와 같은 수업을 듣는 사람이라면 쉽게 내 줄임말을 이해하겠지만, 같은 집단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면 나의 단어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아 반성하게 되었다.
마침 2024 한글주간 행사가 10월 4일부터 10월 10일까지, 국립한글박물관 및 전국 각지에서 열린다고 하여 국립한글박물관의 현장으로 가보았다.
직접 한글과 관련된 문화 행사를 즐겨보면서 올바르게 한글을 사용하겠다는 마음가짐을 다지고 오고 싶었다. 이른 아침에 국립한글박물관으로 향했는데도 관람객들이 무척 많았다.
이촌역에서 내려 국립한글박물관을 향해 가는 길에, ‘2024 내가 만난 한글 사진, 영상 공모전 수상작’을 전시해둔 공간이 보였다.
올해로 4회를 맞는 2024 내가 만난 한글 사진, 영상 공모전은 ‘일상 속에서 만난 한글’을 주제로 진행된 행사라고 한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총 126개 국가에서 세계 곳곳 일상 속의 다양한 한글이 담긴 사진과 영상을 보냈다.
한글이 적힌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을 찍은 사진과 간단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살아가는 국가와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도 한글로 표현되는 다양한 모습으로 소통하는 사람들을 느꼈고, 한글이 전 세계적 문자로 자리 잡았다는 것에 감동을 받았다.
책 속 인물에게 보내는 한글 손편지 수상작 코너에서는 어린이들이 아기자기한 손글씨로 책 속 인물에게 정성껏 쓴 편지를 볼 수 있었다. 대상을 수상한 어린이의 편지에서는 한글을 향한 애정이 깊게 묻어나 유난히 기억에 남았다.
날이 유난히 화창했던 10월 4일 아침, 이촌역 나들길을 빠져나와 도착한 국립한글박물관 앞은 체험행사 부스를 준비하는 사람들과 단체로 체험학습을 온 유치원생들로 복작복작한 분위기였다.
제578돌 한글날을 맞아 ‘입는 한글 한마당’ 부스에서는 한글이 적힌 옷을 입고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관람객들이 한글이 적힌 옷에 호기심을 보이며 사진을 찍었고, 심지어는 외국인 관람객들도 제법 많았다.
곳곳에는 세종대왕 형상의 전시물이 있어 한글주간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렸다.
한글 일기장을 꾸미는 부스, 우리말 소품 만들기 체험, 한글 달고나 체험 공간, 천연 한글 비누 만들기, 세종대왕상 만들기 등 한글과 관련된 다양한 행사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2024 한글주간에서 즐기는 모습을 개인 SNS에 올리면, 이모티콘을 주는 행사도 마련되어 있어,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아기자기한 이모티콘이 세 종류나 있어서 관람객들이 연신 감탄하는 걸 볼 수 있었다.
한 무리의 유치원생들은 광장을 거니는 세종대왕과 기념사진을 찍는 것에 관심을 보였다. 한글 단어가 적힌 조각을 집어 들고 이리저리 짜 맞추며 노는 유치원생들도 많았다.
박물관 내부로 들어가자 전시실 구경을 하러 온 사람들을 많이 만나볼 수 있었다. 『훈민정음』의 머리말의 문장에 따라 일곱 가지의 주제로 구성된 전시실에서는 한글이 탄생한 이래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함께 볼 수 있었다.
『훈민정음』 해례본 33장을 판에 새겨 조명처럼 빛나게 구성한 공간은, 『훈민정음』 합자해의 ‘소리는 있으나 글자가 없어 글로 통하기 어렵더니, 우리나라 오랜 역사에 어둠을 밝히셨도다’라는 구절에서 착안한 듯 보였다. 어둠을 밝히는 듯 구성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한글 단어와 간판 등을 이용해 영상물을 만든 공간에서는 한 무리의 어린이들이 집중해서 영상을 시청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 어린이는 우리 근처에 이렇게 많은 한글 단어가 있는 줄 몰랐다며, 예쁜 단어를 오래오래 지켜주고 싶다는 소감을 밝혔다.
이외에도 한글 편지 자료들, 한글 활자, 삼강행실도 언해, 일제강점기 시절 한글 구활자본 소설 자료 등 다양한 한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어 전시장을 거니는 것만으로도 한글이 발달해온 발자취를 느낄 수 있었다.
다양한 미디어 자료가 구성되어 있어, 관람객들이 몰입해서 전시물을 감상하는 것도 볼 수 있었다.
한글과 관련된 자료가 일곱 개의 전시 테마에 맞춰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어 한글의 발자취를 쉽게 따라가며 감상할 수 있었다.
문헌 자료뿐만 아니라 미디어 자료도 여럿 전시되어 있어, 조금 더 크고 자세하게 자료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전시장 출구에는 ‘한글날 노래’를 알리는 종이와 스피커가 놓여 있었다. 한글날을 기념하는 노래도 있는지 처음 알아서, 스피커를 귀에 대고 3절까지 들었다. 한글날 노래의 2절은 다음과 같다.
“볼수록 아름다운 스물넉 자는 그 속에 모든 이치 갖추어 있고 누구나 쉬 배우며 쓰기 편하니 세계의 글자 중에 으뜸이도다. 한글은 우리 자랑 민주의 근본. 이 글로 이 나라의 힘을 기르자.”
한글날 노래에서도 알 수 있듯, 한글은 누구나 어렵지 않게 배울 수 있는 우수한 문자이다. 우리가 한글의 우수성을 알고 잘 가꿔나가려고 노력해야 그 아름다움을 더 오랫동안 널리 뽐낼 수 있지 않을까. 한글주간을 통해 한글의 발자취도 알아보고, 우리의 한글 생활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