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15일 서울 성동구 성수1가제2동 지하철 2호선 뚝섬역 부근. 3번 출구로 나와 뚝섬역상점가(상원길)에 들어서니 부동산중개업소·분식집·마트·안경점·중국요리집·화장품가게·미용실·약국 등이 길 양쪽으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상점 출입구마다 어른 손바닥만 한 동그란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성동구 치매안심마을 안심지킴이’. 근처 쌍용아파트 앞 도로변에 자리 잡은 쌍용마트에도 이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누군가 스티커 안쪽에 전화번호(02-499-8071)를 적어 놓았다. 이 스티커를 만들어 붙인 성동구치매안심센터 번호다. “얼마 전에 치매 어르신 한 분이 여기 있는데 자기 집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린 것 같다고 쌍용마트에서 전화했어요.” 유미숙 성동구치매안심센터 총괄팀장(간호사)의 말이다. 쌍용마트 주인이 센터에 전화를 건 뒤에 따로 적어둔 것이다.
성수1가제2동에는 치매안심길(제1차·제2차)이 있다. 뚝섬역에서 수인분당선 서울숲역 쪽으로 난 대로 양쪽(1차길)에는 커피숍·약국·밥집 등 상점 약 10군데에 치매안심 스티커가 붙어있고 상원길(2차길) 양쪽에도 죽 늘어선 약 60개 상점에 스티커가 부착돼 있다. 한 집 건너마다 치매안심마을 표지를 붙여놓은 셈이다. 누구에게나 잘 보이는 눈높이로 출입구 문이나 창가에 붙여놓았다. 여러 상점 중에서 약국은 치매 예방·관리 보건사업인만큼 스티커 대신에 별도로 큼지막한 ‘치매안심지킴이’ 문패가 따로 걸려 있다.
상점 매상 올리고 치매 예방·관리·홍보도
유 팀장은 “치매안심마을과 안심길 조성에 동참하겠다는 뜻을 밝힌 상점들에만 이 스티커를 붙여줬다”며 “어르신들은 행동과 언어 능력, 기억력이 떨어져 계산도 느리다. 사람들이 퉁명스럽게 대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스티커를 붙인 상점들은 치매 증상 어르신들을 친밀하게 대하고 치매 관련 교육도 받는다”고 말했다. 스티커를 부착한 가게 안에는 치매예방·검진·치료·쉼터 사업소개, 치매바로알기, 치매예방수칙 등 치매 관련 정보를 안내하는 세 가지 안내장을 누구나 가져갈 수 있도록 놓아두었다.
치매안심 1차길에 있는 수명약국에 들어가보니 치매 관련 안내장이 눈에 띄지 않는다. 약국 주인이 말했다. “약 사러 와서 사람들이 안내장을 벌써 다 가져가고 지금은 남은 게 없어요.” 성동구치매안심센터 직원들이 한 달에 한 번씩 스티커가 붙은 가게에 들러 부족한 안내장을 다시 채워넣는다고 한다.
이날 찾아간 상원길에는 2020년 코로나19 유행 초기에 성동구치매안심센터가 벌인 치매안심길 이벤트 흔적도 남아있었다. 이른바 ‘코로나 상생프로젝트’다. 코로나19 방역 마스크 대란이 빚어졌던 2020년 상반기에 간단한 낱말 맞추기 퀴즈를 내서 가게 손님 10명이 함께 모여 풀면 KF-94 방역마스크를 손님마다 1개씩 선물로 주는 행사였다. 가게를 방문한 고객에게 마스크를 나눠주니 상점 매상도 올라가고 치매 예방·관리 홍보도 할 수 있었다.
치매국가책임제 도입으로 진료비 부담 사라져
성동구(행정동 총 17개) 구민은 약 29만 명으로 60세 이상 어르신이 6만 7000명가량이다. 이 가운데 2020년 12월 현재 치매진단자로 성동구치매안심센터(2007년 설립)에 등록·관리 중인 사람은 2285명이다. 각 동에 대략 100~200명의 치매 어르신이 있는 셈이다. 유 팀장은 “일반 건강검진처럼 치매 이상이 있는지 살펴보는 ‘인지능력 선별검사’를 2007년부터 하고 있다”며 “이 검사를 한 번이라도 받은 성동구 어르신은 총 3만 4000명에 이른다”고 말했다. 성동구 거주 어르신 중 절반 이상의 수치다.
문재인정부 들어 2017년 9월부터 추진·시행한 ‘치매국가책임제’가 배경으로 꼽힌다. 치매 질환의 경우 환자 본인과 개별 가족이 떠맡아야 할 문제를 넘어 국가가 책임지고 예방·관리하고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성격으로 전환됐다. 인지능력 선별검사는 잘 훈련받은 간호사가 50분 정도에 걸쳐 검사한다. 물론 무료다. 일반 영리병원에서 치매 정밀검진을 받으려면 약 20만 원의 비용을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 치매국가책임제 도입으로 치매 검사·서비스에서 진료비 부담이 사라진 것이다. 선별검사 결과 치매 증세가 우려되면 전문의 상담으로 연결되는데 이 상담도 무료다.
치매안심센터의 예전 이름은 ‘치매지원센터’다. 2007년에 서울 성동구와 성북구가 가장 먼저 시범적으로 보건소를 기점으로 치매지원센터를 설립했다. 2021년 4월 현재 치매안심센터는 서울 25개 구마다 1개씩 있고 전국적으로 256개에 이른다. 중앙치매센터 등 광역 치매안심센터는 17개다. 기존 치매지원센터가 치매안심센터로 바뀐 것도 국가책임제 도입에 따랐다. 국가 책임이 명시되면서 내용과 명칭도 안심으로 변경됐다. 치매 어르신이 자신이 살아온 지역사회에서 존엄성을 유지하며 생활하는 치매 친화적 환경을 만드는 치매안심마을 조성사업도 치매국가책임제에 근거한다.
“집 못 찾고 헤매는 어르신 주민이 보살펴”
성동구치매안심센터에서 만든 치매안심마을은 2018~2019년 조성한 1호(금호2·3가동)와 2020~2021년 만들고 있는 2호(성수1가제2동)가 있다. 2022~2023년까지 마장동에 제3호를 조성할 예정이다. 성동구 1호 치매안심마을은 성동구 금호산 꼭대기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아파트며 단독주택이며 집집마다 어르신이 많이 사는 동네다.
이 마을에 있는 금호초등학교 담벼락 옆에는 얼마 전에 새로 만들어진 자그마한 공원(금호2·3가동 인지건강디자인공원)이 있다. 여기에 세워진 낱말 퍼즐을 맞추는 조형물 하나가 눈에 띈다. 약 300개 네모 칸마다 회색·노란색·주황색 등 세 가지 색깔의 삼각형 퍼즐로 돼 있고 이 퍼즐을 돌려 치매 예방 같은 글자를 만들어보는 치매 예방용 놀이기구다.
성동구치매안심센터 바로 아래층에 자리 잡은 성수1가제2동 주민센터 출입구에는 치매극복선도기관이라고 쓰인 팻말이 붙어있다. 치매안심마을 운영위원회 회장을 맡고 있는 주민 이미순(60) 씨는 제2동에서 치매 예방·관리 활동가로 양성 교육을 받은 주민이 12명이라고 말했다. 이 씨는 “우리 동네 거리에서 갑자기 집을 못 찾고 헤매는 치매 어르신들을 주민이 발견해 센터로 모셔오곤 한다”며 “며칠 전에는 어떤 칠순 어르신이 가게에 들어갔다가 길을 잃어버렸다고 가게 주인이 연락했는데 저번에도 그런 일이 있었던 그 어르신이었다”고 말했다.
치매국가책임제 도입으로 치매 어르신과 가족 지원 길 열려
성동구치매안심센터(02-499-8071)는 서울 지하철 2호선 뚝섬역 부근 공공복합청사 5층에 있다. 성동구보건소 산하기관으로 치매 예방과 관리(조기 검진·발견)사업을 한다. 지역 주민 중에 60세 이상은 누구나 센터에 가서 치매 증상이 있는지 알아보는 인지능력선별검사(CIST)를 받아볼 수 있다. 1단계에서 인지능력 저하로 진단이 나오면 전문의가 상담하는 2단계 정밀검사로 이어진다. 전문의는 경도인지장애인지 치매인지 진단·판정하고 치매로 판정되면 작업치료사들이 진행하는 쉼터 프로그램을 포함해 각종 치료를 받을 수 있다. 경도인지장애 단계라면 인지 능력을 강화해주는 별도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치매 어르신을 돌보느라 힘든 가족들을 위해 돌봄 정보 가족교실도 운영한다. 치매안심마을에 대해 유미숙 성동구치매안심센터 총괄팀장은 “안심마을사업을 하기 전에는 지역 주민들이 치매 관련 정보·지식·교육이 부족해 치매 어르신이 배회하거나 실종된 경우 대처 방법을 잘 알지 못하거나 무관심했는데 치매 친화적인 마을이 조성된 뒤로는 여러 가게 주인도 동참해 치매 환자를 발견하면 적절히 대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치매 질환은 2012년에 국가치매관리법이 제정될 무렵에 국가 지원이 대폭 확장됐다. 노인장기요양보험 제도에서 장기요양 수급대상자 확대가 대표적이다. 2011년 6월부터 치매 대상자의 특성을 제대로 반영하기 위한 치매가점제를 도입했고 2014년 7월부터 경증 치매어르신도 장기요양자로 인정해주는 장기요양 5등급(치매특별등급)이 신설됐다. 2018년 기준으로 치매특별등급자는 약 5만 4000명으로 전체 장기요양 인정자의 8%에 이른다. 하지만 경증 치매 어르신과 가족에 대한 지원이 부족하다는 문제가 제기되면서 문재인정부가 치매국가책임제를 추진했다. 그 결과 2018년 1월부터 장기요양보험에 인지지원등급(치매가 확인된 경우 신체적 기능과 상관없이 장기요양보험 급여 대상자가 될 수 있는 등급)이 새로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