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오는 17일(토) 제73회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러시아와
북만주 일대의 독립운동을 선도한 김학만 선생을 비롯하여 48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포상한다고 15일(목) 밝혔다.
ㅿ 이번 포상자 48명은 건국훈장 25명(애국장 2, 애족장 23), 건국포장
6명, 대통령표창 17명으로 생존자와 여성은 없으며, 전문사료발굴분석단의 발굴이
41건으로 전체 85%에 해당한다.
ㅿ 금번 포상자 중 유족 또는 후손이 확인된 분은 11명이며, 이 중
4명은 전문사료발굴분석단이 제적등본, 가족관계등록부 등 공부를 적극적으로
역추적하여 확인하게 되었다.
ㅿ 훈ㆍ포장과 대통령표창은 제73회 순국선열의 날 중앙기념식장과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기념식장에서 유족에게 수여된다.
▣ 이로써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분은 대한민국장
30, 대통령장 93, 독립장 806, 애국장 3,847, 애족장 4,875, 건국포장 996, 대통령표창
2,445명 등 총 13,092명에 이른다.
▣ 국가보훈처는 일제의 각종 행형기록 및 정보문서, 신문보도 기사 등을 찾아
분석?검토하고, 현지조사를 통해 동일인 여부와 활동 전후의 행적을 확인하는 등
적극적으로 자료를 발굴하여 독립유공자를 포상한다.
또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와 국사편찬위원회,
국가기록원 등과 기존의 사료 수집 공조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고 해외 사료수집위원들의
협력 하에 국외 소장 자료를 지속적으로 발굴하는 한편, 지방자치단체 등과도 긴밀히
협조하여 독립유공자 발굴 작업을 더욱 확대해 나가고 있다.
▣ 금년도 제73회 순국선열의 날 포상자 중 주요 인물들의 독립운동 공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ㅿ ‘을사늑약’ 직후부터 강원도에서 의병투쟁을 이끈 추성구
선생
1905년 을사늑약(제2차 한일협약) 이후 강원도 중남부 일대에서
장기간 의병투쟁을 이끈 추성구(秋性求) 선생에게 건국포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05년
여름 강원도 평창군 봉평에서 원용팔(元容八 : 1990, 애국장) 의진의 참모종사로
활동하였고 1907년에는 화천군 일대에서 박장호(朴長浩 : 1962, 독립장) 의진에도
참여해 활동하다 일본군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선생에 대한 포상은 독립기념관에
소장된「원공삼계당을사의거시말(元公三戒堂乙巳義擧始末)」(1917년 이전 간행)에서
공적이 확인되어 이루어졌다. 이 자료의 편찬자인 박정수(朴定洙) 선생 또한 유인석(柳麟錫
: 1962, 대통령장) 의진에 참여해 중군참모로 활동한 공로로 1995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ㅿ 미국 의원단을 통해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리려 한 정도인
선생
1920년 9월 23일 함경남도 원산부 장촌동 장춘교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한 정도인(鄭道潾) 선생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당시
수백 명의 시위 군중을 지휘, “경찰관주재소를 파괴하자”, “순사를 처단하고 일본인을
추방하자”고 외치며 일제 경찰관 주재소와 우편소, 일본인 상점 등을 공격하는데
앞장섰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선생의 거사는
3?1운동 이후 조선독립의 열기가 식어가던 1920년 8월 조선의 식민지 지배를 미화하고
선전할 목적으로 조선총독부가 초청한 미국 상?하 양원 의원단의 방한(訪韓) 시기에
맞춰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결행되었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선생을 포함하여 시위에 앞장섰던 40명이 체포되고 이 가운데 33명이 일제 법원에서
소위 유죄판결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ㅿ 일제 말 태평양전쟁 전황을 전파하다 옥중 순국한 이근창
선생
1942~1943년 태평양전쟁의 전황과 독립운동의 방안을 전파하다
체포되어 징역 8월을 받고 옥중 순국한 이근창(李根昌)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당시 선생은 조선방송협회 보수과 기술원으로 근무 중 일제에 의해 수신이
금지된 단파방송을 밀청하다 대대적인 선전과는 달리 일제가 태평양전쟁에서 패전을
거듭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동료들에게 이를 전파하였다. 또한 단파방송 밀청을 통해
알게 된 중국 중경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미주 구미위원부의 활약상도 전파함으로써
언론과 방송에 대한 통제가 극심했던 일제말기 전시체제 하에서 사그러져 가던 독립의
불씨를 살리는데 기여하였다. 옥중 순국한 사실은 선생이 1944년 1월 21일 제적부에
사망한 주소지로 기재된 “서대문구 현저정 101번지”가 서대문형무소의 소재지로
밝혀짐으로써 확인되었다.
ㅿ 항일투쟁 기지 건설에 헌신한 노령 독립운동의 대부, 김학만
선생
1908~192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국내와 노령 연해주, 중국
북만주 지역에서 항일의병의 지원과 민족교육 실시, 독립운동 단체 대표 등으로 활약하여
노령지역 독립운동계의 대부로 일컬어지는 김학만(金學萬)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다. 선생의 포상은 독립운동 공적과 함께『동아일보』(1936.4.1.)에서 사망
사실이 확인되어 이루어졌다. 선생은 함경남도 단천 출신으로 1908년 재기를 도모하기
위해 함경북도로 들어온 이강년(李康秊 : 1962, 대한민국장) 의진에 자금을 지원한
것을 시작으로, 노령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계동학교(啓東學校) 교장으로 조선인 자제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하였고, 1910년부터 1921년까지 노령 블라디보스토크 한민회 회장,
성명회(聲明會) 부의장, 노인동맹단 단장으로 활약하는 등 노령 연해주 지역을 한국독립운동의
기지로 만드는데 기여하였다. 이와 같은 선생의 위상은 1919년 2월 국외의 대표적
독립운동가 39명의 명의로 발표된「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실로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