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경기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물론 단체로 등산을 가거나 회식 세미나에 참석한 사람들은 으레 기념사진을 찍는다. 이렇게 인증샷을 찍을 때면 어김없이 “파이팅”이 등장한다. 촬영자나 사진기자들은 웃으라고 하고, 표정을 밝게 하라고 그러다가 파이팅을 외쳐줄 것을 요구한다. 사람이 많을 경우 파이팅을 외치느라 손까지 들면 뒷사람 얼굴도 가리고 누가 누군지 알 수도 없게 된다. 그러나 사진을 찍는다는 게 중요하지 얼굴이 보이느냐 안 보이느냐는 뒷전이다.
문제는 그런 게 아니라 ‘파이팅(fighting)’이라는 유래 불명, 정체불명의 응원구호다. 싸우라는 말이 어느새 응원구호로 정착해 운동경기나 각종 행사에서 남발/남용되고 있다. 이런 것도 콩글리시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어로 된 정확한 응원 구호로는 “Go, Team!”이라는 말을 쓰나 본데, 이 말이 너무 문법적이고 낯설어서일까 한국인들은 남녀노소 없이 파이팅을 애용한다. 말끝에 파이팅을 외치지 않으면 애국자가 아닌 줄 아는 것 같다.
<英雄之戰>(영웅지전)이라는 중국 영화가 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영웅들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주사변(1931년) 직후 항일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중국이 개최한 대규모 격투경기를 다룬 작품으로, 올해 부천 판타스틱영화제에 출품됐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파이팅>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됐다. 격투기야말로 파이팅이라는 말이 잘 어울릴 테니까 그랬겠지.
그러면 파이팅을 쓰지 않는다면 대신할 말이 뭐 없을까. 아자아자, 으랏차차, 이런 건 어떤가? 아자아자는 2004년에야 국립국어원의 신어(新語)자료집에 오른 감탄사라고 한다. 정확한 어원은 잘 모르겠다. “나가자, 힘내자, 싸우자” 이런 뜻이 들어 있다고 생각된다. 으랏차차는 오래전부터 쓰인 말인데, 주로 여러 사람이 무거운 물건을 들거나 일으켜 세울 때 하는 말이라는 점에서 쓰임새가 제한적이다. “영차”도 비슷하다.
파이팅이라는 말을 피하기 위해 아자아자를 쓴다 해도 사람들은 “아자아자, 파이팅!”이라고 외치곤 한다. 뭐 좀 좋은 말이 없을까? 일본 센코쿠(戰國)시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군은 “에이또 에잇!” 하고 외쳤다는데, 우리나라 전통에는 그런 응원과 격려, 단합의 구호가 전혀 없었나? 그런 말을 찾아서 널리 쓰면 좋겠다.
구호도 구호이지만 경기에 앞서 징을 치면 어떨까. 전통적으로 우리 겨레는 무슨 일을 시작할 때, 여럿이 함께 농사 일에 나설 때 징을 침으로써 의기를 북돋우고 신명을 내며 힘을 합쳤다. 학문적인 설명을 들으면 징소리의 상징은 노동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우리 기층 민중의 소리 커뮤니케이션 과정 속에서 신명이라는 대상을 대표해 왔다고 한다.
징소리는 우리 민족의 관대함과 담대함을 잘 드러내고 있다. 우리의 징소리는 열린 공간인 굿판이나 마당 혹은 들판에서 하늘을 향해 울려 퍼진다. 그런 점에서 징소리는 하늘과 함께 호흡하는 방법을 일깨워 주는 숭고미를 함축한 소리라고 할 수 있다. ‘징소리를 통해 하늘을 향한 열린 공간에서 일어나는 신명과 한풀이의 소리 커뮤니케이션 현상은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우리의 고유한 의미-집합체이자 유의미한 상징을 기반으로 형상된 민족문화’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
실제로 징소리를 들으면 뭔가 분위기가 달라진다. 엄숙하면서도 흥겨운 것, 뭔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그 여운이 긴 저음은 사람들을 일어서게 하고 힘내게 하고 격동시킨다. 어려서 시골에서 들은 징소리와 신명 나게 반응하던 어른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1970년대의 산업화 사회에서 고향 잃고 내쫓긴 사람들의 상실과 아픔을 그린 문순태의 소설 <징소리>에서도 이 전통악기의 의미와 힘이 잘 드러난다.
다가오는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팀은 징소리로 경기를 시작하면 어떨까. 아주 오래전에 어느 씨름단에선가 징을 치며 경기를 시작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징소리 덕분에 성적이 더 좋았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국적 불명의 “파이팅”을 외치는 것보다는 훨씬 멋있을 것 같고 전통적인 신명을 되살릴 수 있을 것 같다. 징소리는 농촌이나 고향의 상징이다. 또한 함께 힘을 합쳐 어울려 살아가는 두레정신과 대동의 정신을 담고 있는 소리이다.
조선의 개혁군주 정조는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한 사람이 궁궐에서 징이나 꽹과리를 쳐서 호소하는 격쟁(擊錚)을 국왕이 행차할 때에도 할 수 있게 허용했다. 왕에게 억울한 사연을 직접 호소하는 행위다. 징은 이와 같이 이목을 집중시키고 마음을 몰입케 하는 효과를 갖는다. 징과 함께 북도 치면 더욱 좋을 것이다.
◆ 임철순 한국일보 논설고문·자유칼럼그룹 공동 대표
언론문화포럼 회장,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보성고 고려대 독문과 졸. 1974~2012 한국일보사 근무. 기획취재부장 문화부장 사회부장 편집국장 주필, 이사대우 논설고문 역임. 현재 논설고문으로 ‘임철순칼럼’ 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