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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의 후예 피아니스트 수상 파데레프스키를 만나다

[정태남의 클래식 여행] 폴란드/바르샤바(Warszawa)

2016.06.30 정태남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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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탄 비행기가 바르샤바의 쇼팽 국제공항에 착륙하자 공항 이름이 자꾸만 입에서 맴돈다. 음악사상 가장 뛰어난 피아니스트이자 피아노 음악 작곡가였던 쇼팽. 그는 20세에 조국 폴란드를 떠난 이후 1849년 10월 17일에 프랑스 파리에서 39년의 삶을 마감할 때까지 그토록 그리던 조국 땅을 다시 밟지 못했다.

그것은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총이 아니라 음악으로 조국을 위해 싸우라고 한 말이 평생 마음 속 깊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쇼팽이 세상을 떠난지 꼭 11년 1달 1일 후인 1860년 11월 18일, 마치 그의 정기를 이어받은 듯한 음악가가 태어났으니 그의 이름은 이그나치 얀 파데레브스키. 

공항을 나와 바르샤바 시내로  향하는 도중에 쇼팽과 그의 이름이 자꾸만 번갈아 가면서 나의 입속에서 맴돈다. 그리고는 그의 유명한 피아노 곡 <메뉴엣 G장조>가 뇌리에 스쳐 흘러가고 이어서 그의 교향곡 <폴로니아>의 장엄한 음향이 어디선가 울려 퍼져오는 듯하다. 폴로니아(Polonia)는 ‘폴란드’의 라틴어 명칭이다.

우야즈두프 공원에 있는 파데레프스키의 좌상.
우야즈두프 공원에 있는 파데레프스키의 좌상.

바르샤바 중심가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우야즈두프(Ujazdów) 대로로 향한다. 이 대로변에 있는 숲이 우거진 널따란 쇼팽 공원을 들러보고 나서는 바로 옆에 있는 우야즈두프(Ujazdów) 공원에 들어섰다. 이 공원은 쇼팽 공원에 비하면 규모는 작지만, 숲과 꽃으로 예쁘게 단장돼 그림같이 아름답다.

이 공원에서 초점을 이루는 것이 파데레브스키의 동상인데 좌대에는 그의 이름과 생몰연대만 있고 다른 설명은 일체 없다. 그가 누구인지 모르면 이곳을 그냥 스쳐지나가겠지만,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폴란드의 근대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곳에서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동상 앞에서 강대국 사이에 끼어있던 폴란드의 역사를 뒤돌아본다. 18세기 후반 이후 폴란드의 역사는 그야말로 고난과 시련으로 점철되어 있다.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3국에 의한 폴란드의 분할통치가 시작된 1795년부터 폴란드는 독립을 잃었고 폴란드 사람들은 독립운동을 전개했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파데레프스키는 20대 후반부터 피아니스트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다음 1913년에 미국으로 이주했다가 다음해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 파리에 있는 폴란드 재건 위원회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하며 대변인 역할을 수행했다.

성 요한 대성당의 정면.
성 요한 대성당의 정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패전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세력이 약해지고 러시아가 혁명으로 내부적으로 혼란스러워지자 폴란드의 독립가능성이 어느 때 보다 더 커졌다.

이에 그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을 만나 폴란드의 독립을 지지해줄 것을 요청했고 폴란드 내에 분열되어 있던 여러 지방 도시들을 통합해 통일된 폴란드를 재건하는 데 주된 역할을 했다.

이리하여 1918년에 폴란드 사람들은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독립된 민주국가를 세울 수 있었고 새 공화국의 초대 수상겸 외무장관으로 음악가 파데레프스키를 선출했다.

그러나 파데레프스키는 조국이 엄연한 독립국이 된 다음에는 자신의 길이 정치가 아니라 음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상에 취임한지 1년도 안 되어서 최고의 권좌로부터 홀연히 떠나 다시 음악가의 길로 뒤돌아감으로써 진정한 예술가다운 모습을 보였다.

이 공원을 나와 우야즈두프 대로를 따라 북쪽으로 계속 올라간 다음 바르샤바 구시가지에 들어섰다. 구시가지 중심부의 아기자기한 지붕선을 뚫고 성 요한 대성당의 지붕이 하늘로 우뚝 솟아있다. 대성당 안에 들어서니 고딕 양식 건축의 장엄함과 숙연함이 느껴진다. 이 성당 안에는 폴란드의 위인들의 묘소가 안치되어 있는데 오른쪽 벽에는 파데레프스키의 흉상과 묘소가 보인다. 

파데레프스키가 초대 수상을 지냈던 폴란드 공화국이 1939년 나치 독일의 침공으로 완전히 맥없이 붕괴되자, 당시 80세의 고령에 들어선 파데레프스키는 다시 한 번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 제1차 대전 때 그랬던 것처럼, 그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런던에 있는 폴란드 임시정부의 국회의장을 맡았으며, 미국에서는 폴란드 난민 구제기금 모금을 위한 피아노 연주회를 가졌다.

피아노 앞에 앉은 노피아니스트의 얼굴은 그 이상의 숭고한 모습으로 미국 청중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피로와 노령에서 오는 육체의 쇠잔함을 이기지 못하고 뉴욕연주를 끝으로 그곳에서 향년 81세로 별세하고 말았다.

성 요한 대성당 내부 오른쪽 벽에 있는 파데레프스키의 두상과 묘소.
성 요한 대성당 내부 오른쪽 벽에 있는 파데레프스키의 두상과 묘소.

쇼팽의 후예로 태어나 조국 폴란드의 파란만장한 운명을 지켜보면서 정치와 예술로 애국심을 불태운 위대하고도 고귀한 생애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 제2차 세계대전에 휘말려있던 폴란드는 다시 독일과 소련의 분할점령이라는 엄청난 시련과 고통을 겪어야했다.
 
악몽 같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폴란드에 또 다른 시련과 고통이 닥쳐왔다. 공산주의 정권이 다시 폴란드의 자유를 짓밟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폴란드가 완전히 민주화가 된 다음인 1992년에 그의 유해는 미국에서 이곳 성 요한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그러니까 세상을 떠난 지 50년이 넘어서야 그는 그토록 갈망하고 몸 바쳐 싸워 왔던 자유화된 조국에서 영원한 안식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정태남

◆ 정태남 건축사

이탈리아 건축사이며 범건축(BAUM architects)의 파트너이다. 건축 분야 외에도 음악, 미술, 언어, 역사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하고, 유럽과 국내를 오가며 강연과 저술 활동도 하고 있다.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로마역사의 길을 걷다>,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이탈리아 도시기행> 외에도 여러 저서를 펴냈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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