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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함을 정리하며

2017.02.28 한기봉 국민대 초빙교수/언론중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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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온이 올라간 한가한 휴일, 외출을 하려다 갑자기 장롱 속을 정리하게 됐다. 환절기가 오니 장롱 속의 익숙한 물건들이 갑자기 따분해 보였다. 옷들은 칙칙해 보였고 아무렇게나 처박아둔 사소한 물품들이 처분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옷걸이에 걸린 겨울옷을 보니 겨우내 한 번도 걸치지 않은 옷이 족히 서너 벌 중 한 벌은 되었다.

잠시 고민에 빠졌다. 다시 넣어둬야 하나, 버려야 하나. 그런데 그런 옷들은 역시 지난겨울에도 입지 않았던 옷들이었다. 겨울이 오면 나왔다가 먼지만 뒤집어쓰고 봄이 오면 다시 큰 옷상자 속으로 들어가기를 몇 해째 반복한 옷들이다. 그래, 이번에는 미련을 버리자. 좀 아깝다 싶은 것들도 과감히 헌옷 수거함으로 직행했다. 그놈들은 비로소 그렇게 나와 이별했다.

장롱 안쪽 구석에 첩첩히 쌓아놓은 명함들이 눈에 띄었다. 나는 의례적인 명함 교환이라 해도 잘 버리지 않는 편이다. 만남의 날짜와 장소, 경위나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간단히 메모하고는 찾기 좋게 명함 너비의 길쭉한 종이박스에 세워서 보관하는 버릇이 있다. 찾을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강박 때문이다. 보통 두서너 해 그렇게 명함을 쌓아놓고는 어느 날 갑자기 정리하곤 한다. 당장 필요할지도 모를 것은 남기고 나머진 큰 박스에 넣어 보관한다.

사실 종이명함의 용도는 예전 같지 않다. 종전에는 연락처를 찾기 위해 명함을 보관했지만 지금은 휴대폰 속의 연락처나 SNS가 그 기능을 대신한다. 좀 귀찮긴 하지만 명함을 받고서 휴대폰 연락처에 항목별로 분류해 옮길 수 있으니 이제는 휴대폰이 명함첩이나 다름없다. 명함을 촬영하면 알아서 정리해주는 앱도 나와 있다. 하지만 받은 명함 전부를 휴대폰에 옮기진 않는다. 나름 취사선택한다. 선택받은 사람은 앞으로도 나와 이런저런 일로 관련이 있을 걸로 보이거나 마음이 끌린 사람이다.

2, 3년간 쌓아둔 명함을 다 꺼내놓고 살펴보았다. 그런데 기억에서 멀어진 명함 주인이 더 많다. 오래 되지 않은 만남인데도 얼굴이나 인상이 생각나지 않는다. 무슨 학회나 세미나, 대규모 모임에서 같은 테이블에 앉았거나 의례적으로 나눈 명함들일 것이다.

내친 김에 일을 크게 벌렸다. 창고에 가서 직장생활을 할 때부터 모아둔 커다란 명함 상자 두개를 꺼내왔다. 언젠가는 정리해야지 하면서도 귀찮기도 하고 정리할 엄두가 안 나 이사 다닐 때마다 무슨 보물단지처럼 끌고 다닌 상자다. 명함들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기자생활을 오래 했으니 남보다는 명함을 많이 받은 편이다. 그만큼 나도 명함을 주었겠지만.

족히 2000장은 넘는 거 같다. 30여 년 전에 받은 명함도 남아 있다. 명함첩에 가지런히 꽂혀있는 건 그래도 양반이고 비닐봉지 속에 아무렇게나 처박힌 것들, 작은 상자에 따로 넣어둔 것들, 뒤죽박죽이다.

명함들을 보며 추억에 잠긴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내 삶의 궤적을 거꾸로 따라가듯 명함 주인을 기억해 본다. 지금은 장관님이나 의원님이 된 분들의 소싯적 명함도 보인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분의 것도 보인다. 긴 날을 잊고 있었지만 정말로 반가운 명함 주인도 있었다. 해저 보물을 인양하듯 빛바랜 그 명함을 따로 골라놓는다. 꼭 한 번 다시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그렇게 여러 명 생겼다. 잊힌 친구를 다시 찾은 것만 같다.  

하지만 거의 절반도 훨씬 더 나의 기억 세포에서 완전히 딜리트되었거나 가물가물한 사람들이다. 휴대폰 번호, 이메일 주소도 없는 명함도 상당수다. 아무런 메모도 없다. 그중 누군가는 어느날 나와 밤늦게 통음한 사람도 있을 테고, 중요한 취재원이나 제보자였을 수도 있지만 기억의 서랍 속에 없으니 관계의 끈은 거기서 끝난 거다.

명함을 뒤지며 마치 내 기억력의 한계를 테스트하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 많은 것을 일일이 들춰가며 추억에 잠기거나 기억을 살리려 노력하거나 이제 와서 취사선택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미쳤다. 스스로 나이 먹은 티를 내는 것만 같고 그런 내 모습이 궁상맞아 보였다.

왜 이리 명함 보관에 집착했을까. 미래의 인연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이었을 거다. 많은 이들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일종의 심리적 위안이자 폭넓은 인맥의 자기과시였을 수도 있다. 행여 생길지도 모를 청탁 같은 이기적 필요에 대비한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 사람과의 돈독한 인간관계나 정리(情理) 때문에 고이고이 보관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인연도 아니었고 효용도 없었다. 어깨만 스쳐도 인연이라 했지만, 명함 한 장 주고받았다고 인연은 아닌 게다. 기억이 없고 스토리텔링이 없는 카드는 그냥 9x4 cm의 종이 한 장에 불과할 뿐이다. 서로에게 별 볼 일 없었다는 이야기나 진배없다.

비로소 나는 대범해졌다. 서로에게 운명 같은 인연이라면 누가 먼저든 어떤 식으로든 다시 만나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30년이 넘는 직장생활과 사회생활, 인간관계가 처음으로 대규모 용도폐기되는 순간이다. 결국 다 부질없는 욕심이었다. 인연은 명함이 만들어주는 게 아니었다. 명함으로만 존재했던 관계과잉은 그렇게 종지부를 찍었다. 버리니 한결 가벼워졌다.

한기봉

◆ 한기봉 국민대 초빙교수/언론중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언론보도로 피해를 본 사람과 언론사 간 분쟁을 조정하는 언론중재위원이며, 국민대 언론정보학부에서 글쓰기와 한국 언론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hkb8210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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