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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말러의 어린 시절 추억이 담긴 고도

[정태남의 클래식 여행] 체코/이흘라바(Jihlava)

2017.04.27 정태남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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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구름 덮인 하늘 아래 텅 빈 시청광장. 바로크 양식의 로욜라 성당과 중후한 시청건물이 없다면 무뚝뚝한 도시공간으로 보일지도 모르는 이 광장에 들어서니 말러의 <교향곡 5번> 중 제3악장 아다지엣토(Adagietto)가 마치 영화 ‘베네치아의 죽음’에서처럼 우울하게 천천히 흘러나올 듯하다. 

말러의 음악에 심취했던 독일의 문호 토마스 만(1875-1955)은 그의 음악은 그 시대의 가장 진지하고 성스러운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토마스 만이 1912년에 쓴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에 나오는 주인공 구스타프 아셴바흐의 모델은 1911년 빈에서 숨을 거둔 구스타프 말러였을까?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비스콘티는 1971년에 이 소설을 영화화했는데 주제곡이 바로 ‘아다지엣토’이다. 

시청광장의 로욜라 성당. 이 앞에서 열리던 군대예식과 군악대 연주는 어린 말러의 감성을 사로잡았다.
시청광장의 로욜라 성당. 이 앞에서 열리던 군대예식과 군악대 연주는 어린 말러의 감성을 사로잡았다.

‘교향곡은 하나의 세계이다’라고 했던 말러는 교향곡 안에 인간의 모든 감정과 체험을 담아내고 싶어 했다. 그의 교향곡은 모두 신·사랑·자연·죽음을 주제로 삼고 있는데 그 속에는 일상생활의 체험도 녹아들어 있다.

즉 춤곡, 행진곡, 거리의 음악, 새소리, 동물들의 울음소리, 군대의 나팔소리 등도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요소에는 그가 이흘라바(Jihlava)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추억이 그대로 묻어져 있다. 

말러는 1860년 7월 7일에 이흘라바에서 북쪽 25km 떨어진 보헤미아의 시골마을 칼리슈테에서 독일어를 쓰는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체코는 크게 서쪽의 보헤미아 지방과 동쪽의 모라비아 지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당시 체코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 하에 있었다.

그의 아버지 베른하르트 말러는 구스타프가 태어난 지 세 달 반 만에 독일어권 도시 이글라우(Iglau)로 이주했다. 이글라우의 체코식 지명이 바로 이흘라바이다.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접경에 있는 이흘라바는 1240년경에 세워진 체코 최초의 광산 도시로 은광으로 부유했던 도시 쿠트나 호라와 함께 크게 번성한 도시였다. 

유대교 회당이 있던 자리에 조성된 말러 공원.
유대교 회당이 있던 자리에 조성된 말러 공원.

말러 가족이 이흘라바로 이주했을 당시 이 곳 주민의 80퍼센트는 독일계, 나머지는 체코계와 유대계였다. 유대인이 이흘라바로 이주하는 것이 허용됐던 것은 당시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소수인종 탄압 정책을 완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몇 세기 동안 뿌리를 내리고 살아왔어도 이방인 취급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말러의 아버지는 유대인에게 개방된 몇 개 안되는 업종의 하나인 주류업에 뛰어들어 경제적 기반을 닦았다.

말러의 동상. 왠지 외로운 모습으로 보인다.
말러의 동상. 왠지 외로운 모습으로 보인다.

말러 가족이 살던 집 지척에 있는 시청광장은 남북으로 길쭉한 넓은 직사각형으로 조성돼 있다.

당시 이 광장 북쪽 예수교 수도회의 로욜라 성당에 딸린 수도원에는 제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당 앞에서는 군대 예식과 군악대 연주가 자주 있었다.

반면광장의 남쪽은 노천 시장이 열려 떠돌이 음악사들이 민속음악을 연주하곤 했다.

바이올린, 피아노, 어코디온을 배우던 어린 말러는 이 광장에서 울리는 음악에 매료되었다. 또한 그는 이흘라바 주변에 펼쳐진 자연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였다. 

그의 아버지는 대단히 엄하고 권위주의적인 가장이었지만 자식 교육에는 열성이어서 아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적극 밀어주었다. 사실 말러의 장래는 이미 6살 때 음악가로 결정되었고 온 가족은 그를 위해 헌신적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던 어느 날  말러의 연주를 들은 지방행정관 슈바르츠는 아버지를 설득해 아들을 제국의 수도 빈으로 유학 보내라고 설득했다. 이리하여 말러는 15세가 되던 1875년에 부모를 떠나 더 넓은 세계로 향했다. 

말러가 어린 시절을 보낸 집. 지금은 말러 박물관이다.
말러가 어린 시절을 보낸 집. 지금은 말러 박물관이다.

이흘라바에서 말러의 흔적을 찾아보려면 시청광장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있는 말러 가족이 살던 집과 시청광장 북쪽 면에서 서쪽으로 약 300m에 있는 작은 말러 공원을 빼놓을 수 없다.

말러 공원 자리에는 원래 14세기 중반에 유대교 회당이 세워져 있었으나 16세기에 불타 없어졌다.

그러다가 19세기 중반에 많은 유대인들이 이흘라바로 이주해 오자 1863년에 새로운 유대교 회당이 세워졌다. 

어린 말러와 그의 부모가 다니던 이 회당은 나치 독일군 점령 때 모두 파괴되었고 지금은 그 터 위에 말러 공원이 조성돼 있는 것이다.

이 곳에는 10개의 작은 분수가 있는데 모두 말러가 작곡한 10개의 교향곡을 상징한다. 공원 한쪽 입구에는 새를 형상화한 조형물이 서로 마주보며 세워져 있고 그 사이로 말러의 동상이 보인다. 말러는 폐허에서 부활한 듯한 모습이다. 하지만 왠지 외로운 모습이다. 

말러는 자신은 언제나 불청객이며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했다라고 했다. 그러니까 유대인 말러에게는 고향이라고 부를만한 곳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오스트리아 사람들 사이에서는 보헤미아인이요, 독일 사람들 사이에서는 오스트리아인이며, 세계에서는 유대인이었으니 말이다.

말러 박물관 내부.
말러 박물관 내부.

그는 평생을 반유대주의와 싸우며 살아야 했다. 반유대주의자들은 노골적으로 그에게 악의에 찬 공격을 퍼부었던 것이다. 심지어 당시 영국의 유명한 작곡가 랄프 본 윌리엄스는 그를  ‘그런대로 봐줄만한 사이비 작곡가’라고까지 말했다.

하지만 말러는 말했다. ‘언젠가 나의 날이 올 것이다’라고. 빈 말이 아니었다. 그의 음악이 제대로 인정받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흘러야했지만, 토마스 만이 칭송했듯 말러는 오늘날 위대한 작곡가 반열에 올라있다.

정태남

◆ 정태남 건축사

이탈리아 건축사이며 범건축(BAUM architects)의 파트너이다. 건축 분야 외에도 음악, 미술, 언어, 역사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하고, 유럽과 국내를 오가며 강연과 저술 활동도 하고 있다.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로마역사의 길을 걷다>,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이탈리아 도시기행> 외에도 여러 저서를 펴냈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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