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구 내 새끼. 잘 놀았어?” S씨는 퇴근 후 귀가하자마자 손을 씻고,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강보에 쌓인 아들 곁으로 달려간다. 그는 지난 달 하순 첫 아이를 얻었다.
30대 초반인 그는 일터에서 업무가 적지 않지만, 집에 돌아오면 피로한 내색조차 하지 않는다. 그의 ‘진짜’ 노동이 시작되는 건, 저녁 식사가 끝나는 대략 밤 8시부터이다. 이튿날 아침까지 신생아인 아들을 주로 돌보는 건 아빠인 그의 몫이기 때문이다.
목욕은 아내와 함께 시키지만, 기저귀를 갈아준다든지, 미리 짜놓은 모유를 젖병에 담아 밤시간 수유하는 건 온전히 그가 주도적으로 한다. 밤 11시 전후 신생아 아들과 함께 잠이 드는데, 대략 2시간마다 깨어서 젖을 물리는 게 사실 보통 고역이 아니다.
“그래도 할만합니다. 제 새끼여서 그런지 없던 힘이 나는 듯 해요.” 적어도 출생한지 100일 될 때까지는 매일 밤 잠을 설쳐야 한다는 얘기를 주변에서 듣곤 하지만, 그의 각오는 아직까지는 단단하다.
태어나지 한달도 안 된 신생아에게게 수유하는 아빠. |
낮에 직장에서 어떤 날은 파김치가 되도록 일을 하고 퇴근했음에도 한결같이 밤새워 아들을 돌보는 건, 사실 지극한 자식 사랑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아내가 누구보다도 그 같은 사실을 잘 안다. “저의 산후 몸조리를 위해 헌신하는 것입니다.아이를 낳기 전에도 집안 일을 많이 하던 편이었거든요.” 아내의 말이다.
최근 십 수년 사이에 양육이나 이런저런 가사를 아내와 나누어 담당하는 남편들이 제법 늘어난 듯 하다. 특히 젊은 부부들 사이에서는 공평하게 역할 분담을 하는 예가 많다. 요즘 신세대 부부들의 경우 구두 혹은 아예 ‘문서’로 책임지고 처리할 일상적인 가사를 서로 협의 혹은 합의해 놓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쓰레기 분리 수거 처리, 진공청소기로 방안 청소는 남편 몫, 빨래와 식사 준비는 아내 담당’ 등의 식이다. 역할 분담이 몸에 익지 않은 신혼 부부들의 경우 아예 거실 벽 등에 역할 분담 내용을 담은 메모지를 붙여 놓기도 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 전체를 기준으로 할 때, 남녀간 성평등은 아직은 전혀 만족할만한 수준이 아니다. 단적인 예로, 결혼한 아들이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거나, 세탁물을 널어 말리는 등의 가사를 분담하는 걸 목격하면, 속이 불편한 부모들이 적지 않다.
남녀간 불평등은 한편으로 악습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오랜 시간 일종의 문화로 굳어진 현상이기도 하다. 지금은 내놓고 말은 못하지만, 20~3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가사 등에서 여성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있었다. 추석이나 설 같은 명절 때 몸살이 날 정도로 여자들은 일하고, 남자들은 빈둥거리며 노는 게 그다지 잘못된 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성 불평등 문화’. 다행히 최근 들어 개선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성 불평등 현상은 워낙 뿌리가 깊은데다, 생물학적인 남녀 차이라는 문제까지 물려 있어 가까운 시일 내에 획기적인 변화를 기대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특히 주목해야 할 대목은 남녀의 생물학적인 차이가 성 차별이나 성 불평등을 합리화하는 근거로 악용돼서는 곤란하다는 점이다. 남녀 역할이나 분담에 대한 접근법, 즉 인식의 전환이 있어야 진정한 성평등이 이뤄질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인간 역시 남성이 여성보다 덩치가 크고, 힘 또한 평균적으로는 센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같은 물리적인 차이가 우열을 가른다든지 여성이 더 희생해야 한다는 논거가 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만의 하나 여성이 약자라고 가정한다면, 더 큰 보호와 배려를 받아야지 반대로 더 큰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남성의 장점 못지 않게 여성의 강점이나 특징도 많다. 일반적으로 여성의 수명은 더 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또 남성에 비해 대체로 덜 폭력적이다.
또 여성들의 이런 장점을 아전인수 식으로 해석해 여성이 더 희생을 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로 내세우는 것도 경계할 일이다. 예컨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건 여자들이니 육아 또한 여자들이 맡아야 한다는 식의 사고는 합리화될 수 없다. 양육이란 무릇 종합적 성격을 갖게 마련이다. 엄마 못지 않게 아빠도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그럼에도 애 키우기를 여자에게만 떠넘기는 건 옳지 않다. 특히 직장을 갖고 있는 여성들에게 일과 양육의 이중고를 온전히 지우는 것은 심지어 비인도적이기까지 하다.
요리를 중심으로 한 부엌 일만 해도 그렇다. 여성은 해부학적으로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하체보다는 상체가 더 발달돼 있다. 이런 까닭에 음식 준비 등에 있어 여성이 더 강점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장점 또한 직장 일로 체력을 소진한 여성에게, 예를 들자면, 저녁식사 준비까지 떠맡기는 근거로 악용돼선 안 된다.
지난해 발표한 세계경제포럼 국제 성 격차에 따르면 한국은 앙골라보다 1단계 높은 116위를 기록했다.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하는 ‘국제 성 격차’(Global Gender Gap)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2016년 한국의 랭킹은 최하위권에 가깝다. 조사대상 144개국 중 아프리카의 앙골라보다 1단계 높은 116위이다. 지난 5년간 성적 중에 110위권 안쪽으로 들었던 적이 한 차례도 없었을 만큼 성적이 저조하다.
경제대국이라는 일본도 대체로 역대 순위가 100위권 밖이고, 중국의 경우 지난해 겨우 99위로 100위권에 턱걸이를 하고 있는 걸 감안하면, 성 불평등이 한국만의 문제가 아닌 건 확실하다. 아시아권 국가들이 대체로 하위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은 아시아의 문화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아시아인들의 기질적 특성이 성평등의 성취에 적잖은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성 불평등과 관련해 남성들을 싸잡아 비난하는 건 금물이다. 하지만 인종을 가릴 것 없이 남성들이 대체로 여성들에게 일, 특히 양육을 포함한 가사를 미루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외면하기는 힘들 듯 하다.
최근 미국 오하이오 대학교 연구팀은 52쌍의 부부들의 가사 분담과 휴식 취하기 등을 면밀히 조사했다. 그 결과 쉬는 날 남자들이 훨씬 많은 시간을 놀거나 빈둥대거나 스포츠 같은 취미활동을 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구체적으로는 여성들의 경우 쉬는 날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 평균 47분에 불과한 반면, 남성들은 두 배가 넘는 101분을 한가하게 보냈다는 것이다.
특히 아이 돌보기를 배우자에게 전적으로 미루는 현상은 남편들에게서 두드러졌다. 예컨대, 아내가 아이를 돌볼 때 손도 까딱하지 않고 휴식을 취하는 남편은 46%인 반면, 아내 중에 남편에게 온전히 아이 돌보기를 떠맡기고 휴식을 취하는 여성은 16%에 불과해 거의 3배 가량 차이가 났다.
중동에서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영국 병사가 맥주를 마시고 있다. 전투와 근육, 음주 등은 남성 우월주의를 내포하고 있는 상징들이기도 하다. (사진=영국 육군) |
이번 조사와 연구는 고학력 백인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헌데 기존의 연구들 가운데는 저소득 저학력인 경우 남녀 불평등이 더 클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들이 적지 않아 미국 사회에도 성 불평등이 만연한 상태로 볼 수 있다.
남녀 불평등 정도는 유럽국가 특히 스웨덴 핀란드 등 북유럽 국가들이 가장 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이들 나라에서도 완전한 성 평등은 단시일 내에 달성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 만큼 성 불평등은 온 인류의 고질적 문제이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성 불평등은 개선되는 흐름이어서 보다 나은 사회, 보다 바람직한 문화를 꽃피울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한다. 성 불평등의 개선은 소득의 향상 같은 경제적 여건의 변화와 무관하게 삶의 질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다.
가정은 물론 일터 등에서도 성 평등을 위한 환경 조성이 시급함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민간 회사나 공직 사회 등에서 고위 직책을 여성들에게 과감하게 개방하고, 여성들이 집이나 직장에서 업무를 원활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가정 밖에서의 제도적 지원도 긴요하다.
◆ 김창엽 자유기고가
중앙일보에서 과학기자로, 미주 중앙일보에서 문화부장 등으로 일했다. 국내 기자로는 최초로 1995~1996년 미국 MIT의 ‘나이트 사이언스 펠로우’로 선발됐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문화, 체육, 사회 등 제반 분야를 과학이라는 눈으로 바라보길 즐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