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인생이 한 권의 소설이라면 우리는 누구나 작가다. 내 삶이 한 편의 영화라면 나는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이다. 사람들은 왜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볼까. 가장 큰 이유는 다른 이나 다른 세계를 통해 감동을 얻고 싶어서일 것이다. 그건 곧 나를 향한 성찰이기도 한 것이다.
자서전은 영어로 ‘autobiography’라고 한다. 스스로 쓰는 전기(傳記) 라는 것이다. 전기의 사전적 풀이는 ‘한 사람의 일생 동안의 행적을 적은 기록’이다. 즉 일대기다.
그런데 이게 바로 자서전의 함정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자서전을 쓰고 싶어 하면서도 무엇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해 한다. 특별한 사건 없이 평범한 삶을 살아왔는데 글로 쓸 만한 게 있을까, 라고 반문하고 주저한다. 글쓰기 책으로 유명한 미국 작가 나탈리 골드버그는 ‘인생을 쓰는 법’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기 인생을 쓰는 일에 정해진 규칙은 없다. 종이 위에 붙들어 놓지 않으면 망각 속으로 사라져버릴 인생의 한 점들을 붙잡고 써내려가라. 차분한 목소리로 당신의 평범한 삶을 들려줘라. 틀에 박힌 삶 속에서 물결치는 감정의 결을 보여줘라.”
여기에 핵심이 있다. 자서전에 날짜 순, 시간 순으로 사실과 사건을 나열한 필요는 없다. 골드버그는 “차를 몰고 가다가 길가의 호수에 차를 세우고 양복을 벗어던지고 물로 뛰어들던 그 느낌, 투명한 물에 빼앗긴 그때의 마음결, 그때 봤던 하늘과 구름, 길가의 갈대밭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인생의 어느 한 점, 그 순간의 느낌, 바로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 희로애락과 고군분투야말로 바로 내 것이다. 아무도 들여다볼 수 없었던 내 고유의 것이다. 자서전은 임금의 언행을 사실 그대로 편년체(編年體)로 기술하는 왕조실록이 아니다. 죽고 싶을 정도의 고통 속에서 첫 아이를 낳았을 때, 그 아이가 나를 보고 처음으로 배시시 웃었을 때, 그 아이가 짝을 찾아 내 곁을 떠나던 날 소용돌이치던 내 안의 느낌이다. 가슴 떨리던 첫 키스의 추억인 것이다. 설사 그 상대가 지금의 배우자가 아니면 어떤가.
나는 언제 어디서 누구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이렇게 시작할 이유는 없다. 내가 태어나던 순간의 내 기억은 있을 리 만무하다. 그건 부모의 자서전에 있어야 할 부분이다. 그보다 의미 있는 건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내 인생의 첫 기억쯤 될 것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 손에 이끌려 간 어느 원두막에서 먹던 배꼽참외의 맛, 밤낚시를 따라가 바라본 무수한 별자리들, 그런 게 내 삶에 의미 있는 부분이다.
행복하고 좋았던 순간만 있었을 것인가. 아니다. 내 삶의 과오와 후회는 없단 말인가. 평생 살아오면서 얼마나 부끄러운 일을 많이 했단 말인가. 내 가족이나 부모의 가슴에 구멍을 낸 적도 있을 테고, 거짓말이나 도둑질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단 말인가.
‘내 인생의 자서전 쓰는 법’을 쓴 작가 린다 스페이스는 삶의 기억을 오롯이 되살리는 480가지 구체적 질문을 통해 자서전을 완성하는 법을 말했다. 그 질문은 삶의 순간순간을 붙들 수 있을 만큼 구체적이고 세세하며 다른 일과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 그렇게 내 삶 속에서 특별했던 순간들을 글로 옮기는 과정에서, 내 삶의 전체적인 모습을 그릴 수 있고, 가슴 속에 웅크린 나의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고, 현재 나의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고, 여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가끔 자서전 쓰기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시작을 못 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런 주문을 한다. 최고와 최악, 또는 처음과 마지막, 인생에 단 한 번밖에 없던 순간을 일단 한 개씩 써보라고 한다. 그게 모이면 그 것만으로도 훌륭한 자서전이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가장 행복했거나 슬펐던 순간, 가장 사랑했거나 미워한 사람, 내가 한 것 중 최고나 최악의 일, 내가 만난 최고나 최악의 인연, 가장 친한 친구, 가장 존경했던 분, 부모님을 하늘나라로 보내던 날, 부모의 회갑잔치, 최고의 여행, 가장 맛있던 식사,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 내 인생 최대의 실수, 최대 거짓말, 최고의 봉사, 가장 감명 깊던 책이나 영화 공연, 내 생애 최고의 행운, 가장 아낀 물건, 내가 키운 강아지와 고양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과 나무, 나만의 취미와 이상한 버릇, 나의 징크스, 내 18번 노래, 내 인생 신조, 나와 자동차, 나와 옷, 아내나 남편이 가장 멋졌을 때, 첫 부부싸움, 배우자 아들 딸에게 가장 미안했던 것, 첫 데이트, 첫 출근, 정년퇴직하던 날, 입대하던 날, 대학 입학식, 가장 가난하거나 부자였을 때, 신혼여행의 추억, 자식의 결혼식, 첫 손주를 봤을 때, 몰래 숨어서 통곡한 일, 평생 나를 힘들게 한 열등감과 트라우마, 세상을 향해 외치고 싶은 말…]
얼마든지 가지를 칠 수 있다. 어떤 특별했던 순간이나 감정이 아니더라도 소주제별로도 자서전을 꾸밀 수 있다. 어린 시절, 학업, 결혼, 직장생활, 부모, 아내, 남편, 친구, 여행, 취미, 책… 이런 식으로 소주제를 만들어내면 된다.
사람들은 묻는다. 그렇다면 자서전은 정직한 사람만 쓸 수 있는가라고. 나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자서전은 정직하고 진솔해야 한다. 거짓과 각색으로 가득찬 자서전은 위인전일 뿐이다. 인생 황혼길에 접어든 이제, 뭐 그리 나를 홍보하고 잘난 척 할 필요가 있겠는가. 우리 모두 완벽한 인격체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정직하게 쓴다는 건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인생에는 숨기고 싶은 게 누구나 있을 것이다. 부끄러웠던 일이나 잘못을 저지른 것, 도덕에 반했던 일, 범죄 행위는 감추거나 좋은 쪽으로 포장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자서전이 갖는 중요한 의미 중 하나는 자기발견, 지자기치유, 자기화해다. 내 삶을 반추하면서 나를 스스로 용서하는 것이다. 감추거나 꾸미는 건 진정한 자기 치유의 길이 아니다. 이제는 상처를 고백할 수 있는 나이다. 그 뒤늦은 고백이 진정하고 진심으로 후회하고 참회한다면 당신의 자서전은 감동적으로 빛날 것이다.
◆ 한기봉 언론중재위원/칼럼니스트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부국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글쓰기와 한국 언론에 대해 강의했다. 언론보도로 피해를 본 사람과 언론사 간 분쟁을 조정하는 언론중재위원이다. hkb82107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