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B와 신해철이라니… 한국힙합을 논하는 글에서 왜 이 둘이 등장하는 거야?”
당신은 지금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이어서 당신은 말한다.
“서태지와 아이들과 듀스가 나오는 건 백 번 이해하겠어. 그런데 왜 015B와 신해철이 나오는 거냐고… 거참 뜬금없군”
이해한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언뜻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오류가 아니다. 오타도 아니다. 015B와 신해철은 한국힙합 역사에 속할 자격이 있다. 이 둘은 각자 한국힙합의 결정적 노래를 보유하고 있으니까.
1988년 MBC 대학가요제로 데뷔한 후 솔로와 밴드 넥스트 등으로 활동했던 ‘마왕’ 신해철.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015B와 신해철을 함께 말할 수 있는 몇 가지 키워드가 있다. 먼저 ‘90년대’다. 90년대가 도래함과 동시에 둘은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다음은 ‘발라드’다. 공일오비에게는 ‘어디선가 나의 노랠 듣고 있을 너에게’, ‘그녀의 딸은 세 살이에요’ 같은 노래가 있고 신해철을 생각하면 ‘슬픈 표정하지 말아요’와 ‘내 마음 깊은 곳의 너’가 자동으로 떠오른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이 둘의 공통 키워드는 바로 ‘진보’다. 015B와 신해철은 둘 다 당대의 진보적이고 실험적이며 트렌디한 음악가였다. 그들은 아직 한국에는 들어오지 않았던 유행을 앞장서서 흡수했고, 당시에는 익숙하지 않았던 전자음악을 파격적으로 선보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015B의 ‘아주 오래된 연인들’의 경우, 하우스 사운드 자체도 낯선데다 전주의 길이도 1분 20초나 됐다. 한숨 자고 일어났는데 전주가 계속 나오고 있었다는 전설이 있다.
015B와 신해철이 랩과 힙합에 깊은 조예나 남다른 충성도가 있었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시대를 앞서가고픈 젊은 음악가였던 그들에게 랩(RAP)이란 절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존재였다. (아직 한국에 들어오지 않은) 랩 음악을 한다는 것은 곧 개척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유행을 선도하는 세련되고 패기 넘치는 젊은 음악가!
신해철과 랩을 관련지을 때 당신은 ‘재즈카페’를 먼저 떠올릴 수도 있다. 인정한다. 나 역시 아직까지도 ‘재즈카페’의 랩을 다 외울 수 있다. 그러나 굳이 순번을 따지자면 ‘안녕’이 ‘재즈카페’보다 1년 먼저 세상에 나왔다. 솔로 데뷔 앨범에 실린 ‘안녕’에서 신해철은 영어 랩을 선보인다. 길지 않은 구절이지만 영시처럼 정확한 구조와 라임이 새삼 선구적으로 와 닿는다.
“Many guys are always turning your round / I'm so tired of their terrible sound / Darling. you' re so cool to me / and I was a fool for you / You didn't want a flower, you wanted honey / You didn't want a lover, you wanted money / You've been telling a lie / I just wanna say - Good bye”
2006년 홍익대 인근 클럽에서 음반 발매 쇼케이스를 선보인 015B의 장호일.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한편, 신해철이 ‘재즈카페’를 발표했을 때 015B는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내놓았다. 낮게 깔리는 “위스키 브랜디 블루진 하이힐 콜라 핏자 발렌타인데이…”가 신해철의 것이었다면 장호일의 랩은 이렇게 시작했다.
“너는 언제나 마음을 열지 못하고 그에게 다가서지만 그럴 필요 있겠니 내가 보기엔 넌 그를 사랑하고…”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모든 벌스(verse)*가 랩으로 이루어진 노래였다. 비록 여성 코러스가 담겨 있기는 했으나 장호일이 직접 부른 모든 벌스는 멜로디 없이 오직 리듬에 의지한 방식으로 완성되었다. 이 사실이 당시에 얼마나 파격적이었는지는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 벌스(verse) : 노래를 1절, 2절 등으로 나눌 때의 ‘절’에 해당하며, 벌스 이후 반복되는 후렴은 ‘훅(Hook)’이라고 한다.
물론 랩의 완성도는 미비했다. 어쩌면 장호일의 퍼포먼스를 가리켜 랩보다는 ‘나레이션’에 더 가까웠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니까 이런 말도 할 수 있다. 당시로서는 파격이자 분명한 성취였다는 말이다.
랩이 느릿느릿했다는 점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일명 ‘슬로우 랩’이었다.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보다 앞서 랩을 도입한 몇몇 노래들이 모두 댄서블하고 빠른 템포를 지니고 있었다면 이 노래는 말 그대로 ‘슬로우 잼’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엠씨 해머(MC Hammer)의 ‘Have You Ever Seen Her’가 준 영향으로 추측된다.
제40회 아메리칸 뮤직 어워즈(AMA)에서 가수 싸이와 공연하는 MC 해머. (사진=저작권자(c) AP/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다시 한 번 말하지만 015B와 신해철이 랩과 힙합에 깊은 조예나 남다른 충성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새로운 시도에 굶주린 젊은 음악가였고 그 시도 중 하나에 랩이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들은 (당시로선) 꽤 그럴듯하게 랩 음악을 구현해내는데 성공했다.
아직 서태지와 아이들과 듀스가 등장하기 전이었다.
◆ 김봉현 힙합 저널리스트/작가
대중음악, 특히 힙합에 관한 다양한 활동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책을 쓰고 강의를 하고 영화제를 만들고 가끔 방송에 나간다. 시인 및 래퍼, 시와 랩을 잇는 프로젝트 ‘포에틱저스티스’로도 활동하고 있다. 랩은 하지 않는다. 주요 저서로 <한국 힙합, 열정의 발자취>, <한국힙합 에볼루션>, <힙합-우리 시대의 클래식>, <힙합-블랙은 어떻게 세계를 점령했는가>, <나를 찾아가는 힙합 수업> 등이 있고, 역서로는 <힙합의 시학>, <제이 지 스토리>, <더 에미넴 북>, <더 스트리트 북>, <더 랩: 힙합의 시대> 등이 있다. murdamuzik@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