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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적응과 불행적응

2019.06.27 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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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냥 여기가 편해. 아예 여기서 태어난 것 같기도 하고… 결혼식도 여기서 한 것 같고… 국민연금이야 뭐… 나는 해당 없고… 그래서 말인데 나 여기 계속 좀 살게 해주쇼.”
그 영화의 관객이 1,000만 명에 육박했으니 이 대사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부잣집 저택의 가정부로 일하는 아내 덕분에 그 집 지하 벙커에서 4년 3개월 17일을 숨어 살면서 먹고 자던 남자가 아내의 자리를 꿰차고 들어온 가정부 가족에게 들키자 한 말이다.

영화 ‘기생충’에 명대사가 많지만 이상하게 이 대사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 영화 스토리는 이제 알려질 만큼 알려졌으니 스포일링을 무릅쓰겠다. 그는 대만카스테라 사업이 망하고(주인공 송강호도 이 사업으로 망했다) 빚에 쪼들리자 이 집에 숨어들었다. 창문도 없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이 지하 벙커에 사는 신세가 처음에는 얼마나 처량하고 불행했을까. 그러나 그는 천천히 적응해나간다. 가정부 아내가 때 맞춰 갖다 주는 밥을 먹고 그 안에서 나름대로 자신의 즐거운 왕국을 만들어 나갔다. 지하 벙커는 그의 스위트홈이었다.

이 대사가 나에게 상기시켜준 게 있다. 바로 ‘적응’에 대한 이야기다. 심리학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진화 과정에서 생존을 위해 심리적 면역 체계를 발전시켜 왔다. 신체의 면역 체계가 병원균으로부터 몸을 방어하듯,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하면 여기에 적응해 충격과 고통을 완화시켜주는 면역 체계가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이다. 마치 물건을 쓰면 쓸수록 닳아 없어지듯 아무리 강한 감정도 시간이 지나면 점차 사그라진다는 것이다.

이런 심리적 면역체계는 불행만이 아니라 행복에 대해서도 작동한다고 한다. 행복감도 그것이 반복될수록 줄어들어 별 게 아닌 것이 된다는 것이다. 영원히 불행하지 않듯이 행복도 영원하지 않은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쾌락적응(hedonic adaptation)’이라고 부른다. 이 이론은 미국의 저명한 긍정심리학자인 소냐 류보머스키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대 교수가 연구해서 유명해진 말이다. 그의 베스트 셀러 ‘행복도 연습이 필요하다’(2007년 국내 출간)에 이은 ‘행복 신화’(2013년 국내 출간)에 나오는 말이다.

평생을 살아오면서 거의 누구나 쾌락적응에 대한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새 집이나 원하던 자동차, 최신 스마트폰을 구입했을 때 우리는 행복감을 느낀다. 사랑에 빠져 결혼하고 첫 아이가 태어나고 처음으로 승진했을 때 그 기쁨에 취해 영원히 행복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몇 달, 몇 년이 지나면서 그 행복감은 다시 원래 수준으로 돌아온다. 죽을 때까지 영원할 것 같던 사랑의 유효기간도 쾌락 적응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 말은 곧 다시 행복을 느끼려면 그 이상의 더 크고 강한 자극이 필요해진다는 이야기와 같다. 마치 마약중독처럼 쾌락에 내성이 생겨 더 센 것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거액의 복권에 당첨돼 벼락부자가 된 사람을 추적 조사한 결과 결코 그들이 행복해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 불행해진 사람이 많다는 연구 결과는 많다. 백만장자가 보통 사람보다 행복감을 더 느끼며 살고 있다는 설득력 있는 연구 결과도 없다. 그건 단지 이론이니까 뻔한 교훈적 결론일 뿐이라고, 난 그래도 돈이 많으면 행복해질 것 같다고 반박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행복에 대한 정교하고 과학적인 여러 연구는 행복이나 불행이 결코 물리적 여건이나 환경적 요인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공통적 결론을 내놓고 있다.

긍정심리학자들은 쾌락적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결합된 한 번의 경험보다 분리된 여러 번의 경험에 가치를 두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리고 물건이나 재화나 출세보다 손에 잡히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들, 즉 새로운 경험이나 놀라움 같은 감정, 인간관계, 시간, 감사와 긍정의 태도가 행복지수를 오래 유지시킨다고 말한다. 한방의 대박으로 행복감을 최고조로 올려놓으려 노력할 게 아니라 가랑비에 옷 젖듯 조금씩 경험하는 게 좋다는 것이다.

우리네 삶은 새 차를 사고 새 집을 장만하는 큰 사건으로 구성되는 게 아니라 소소한 일상의 연속이다. 한 번의 요란한 파티보다는 여러 번의 괜찮은 식사가 좋고, 좋아하는 드라마를 몰아서 보기보다는 매주 한 편씩 보는 게 더 행복하다. 해외일주 여행을 가는 것보다 피크닉을 자주 가는 게 행복감이 더 오래 유지된다. 한 번에 명품 오디오를 사버리는 것보다는 하나씩 부품을 골라 꾸미는 게 더 기쁨을 준다. 연애의 유효기간을 아쉬워할 게 아니라, 지금의 상대와 소소한 즐거움과 설렘을 유지할 수 있는 일을 찾는 자세가 좋다. 새로운 상대를 만나더라도 사랑이란 약병에는 숙명적으로 유효기간이 써있다.

그런데 쾌락적응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예외가 딱 하나 있다고 한다. 바로 ‘주는 기쁨’이다. 미국 시카고대 심리학자 에드 오브라이언 교수팀이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다른 사람에게 선물을 주는 사람의 행복감이 그 선물을 받는 사람보다 컸다. 기부의 경우에서도 그랬다. 그런데 그 횟수를 거듭해도, 심지어 같은 사람에게 같은 방식으로 계속 선물을 해도 그 행복감이 줄지 않았다는 것이다. 

비슷한 심리학 이론에 ‘벤저민 프랭클린 효과’라는 게 있다. 당신에게 호의를 베풀어 준 사람과 당신이 베푼 대상 중 누가 더 좋아질까.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존경받는 벤저민 프랭클린은 늘 자신을 비난하고 험담하는 한 정적 때문에 힘들었다. 그러다 그 사람이 귀한 책을 소장하고 있다는 얘길 듣고는 그 책을 꼭 읽어보고 싶으니 빌려줄 수 있냐는 정중한 편지를 보냈다. 상대는 책을 빌려주었고 프랭클린은 감사의 글과 함께 책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얼마 후 의사당에서 그를 만났는데 예전과는 달리 무척 정중한 태도로 말까지 걸어왔다는 것이다. 그 후 그 둘은 평생 친구가 되었다. 그 정적의 심리는 ‘인지적 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라는 심리학 용어로 풀이된다. 인식과 현실에서 불협화음이 생기면 그 부조화를 해소하기 위해 스스로 행동이나 사고를 변화시킨다는 이론이다.

‘기생충’의 지하 벙커에서 살던 그 남자는 쾌락적응이라기보다는 ‘불행적응’이다. 하지만 결국은 마찬가지다. 원하는 무언가를 얻으면 영원히 행복할 것 같고, 그 반대로 잃으면 영원히 불행할 것 같지만, 영원히 행복한 것도 불행한 것도 없다. 소확행(小確幸)이란 말처럼 일상에서 소소한 행복을 자주 느끼며 작은 거라도 베풀며 사는 게 쾌락적응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저녁 매일 이용하던 만원 지하철을 타고 귀가하지 않으려 한다. 시간은 더 걸리겠지만 시내버스를 타고 창밖을 구경하다 적당한 데 내려서 주택가 골목길을 돌고 돌아 집에 가겠다. 김이 풀풀 나는 만두 가게, 향기로운 커피향, 좌판을 벌린 주름 잘잘한 할머니, 엄마 손을 놓칠세라 꼭 잡고 아장아장 걸어가는 어린아이, 작은 화단에 핀 이름 모를 꽃을 만나게 될 것이다. 왜 진작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한기봉

◆ 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언론과 글쓰기를 강의했고, 언론중재위원을 지냈다. hkb8210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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