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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시가 된 노래, 노래가 된 시] (44)김민기② ‘그의 다른 노래들’

2024.07.02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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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뒷것이고 너희들은 앞것이야, 나를 자꾸 앞으로 불러내지 말라. 내가 만든 노래가 아직도 울려 퍼지는 현실이 부끄럽다. 나는 내 노래가 필요 없는 시대에 살고 싶다.” (SBS스페셜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에서, 2024년 5월 방송)

그는 자주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말만큼 삶에 대한 그의 태도와 그가 만든 노래의 엇나간 운명을 잘 드러낸 건 없을 것이다.
 
그는 ‘아침이슬’, ‘상록수’, ‘친구’가 정치적 구호가 난무하는 광장에서 떼창으로 불리는 걸 반가워하지 않았다. 자신의 노래가 더 이상 소환될 일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바랐다. 세월호 희생자를 애도하는 노래를 만들어 달라는 의뢰도 거절했다. 특정한 이념을 위해 작곡하지 않는다는 게 신조였다.

김민기는 노래를 만들 때 학생을, 시민을 ‘선동’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투사가 될 운명도 아니었을뿐더러 정치에 관심도 없었고, 광장에 나서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의 노래는 늘 자신과 길항해 주인의 손을 떠났다.

정권은 노래의 주인에게 ‘노래를 불리게 했다’는 이유로 족쇄를 채웠다. 세상을 등지고 살게 했다. 독재에 저항하고 꿈과 이상을 지닌 사람에게 어느 다른 가수도 주지 못한 위로와 용기를 준 그의 노래들은 정작 주인에게는 청춘을 앗아갔다.

김민기의 노래들은 기실 ‘부르는’ 노래에는 어울리진 않는다. 광장에서 목 놓아 부를 노래는 더더욱 아니다. 조용한 곳에서, 그것도 혼자, 헤드폰을 끼고 ‘들어야’ 하는 노래다. 미성은 아니지만 낮고 묵직한 목소리로 읊조리는 삶과 죽음과 생활의 독백이자 내면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후대의 많은 가수가 그의 노래를 카버했지만 그의 노래는 그의 음색으로 들어야 한다.

김민기의 노래는 진지하고 관조적이고 은유적이다. 자신을 둘러싼 주변의 것들에 자신과 삶을 투영한다. 인생의 두레박에서 건져 올린 성찰과 사유, 고뇌와 의지의 노래다.

김민기는 언론 인터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앞것’이 아닌 ‘뒷것’으로 만족했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많지 않다. (‘SBS 스페셜’ 화면 캡처)
김민기는 언론 인터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앞것’이 아닌 ‘뒷것’으로 만족했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많지 않다. (‘SBS 스페셜’ 화면 캡처)

삶이 본디 쓸쓸하고 현실은 척박할진대 그의 노래가 어찌 경쾌할 수 있을 것인가. 쓸쓸함에 아름다운 시적 가사와 서정적 멜로디가 입혀진 그의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가슴이 먹먹해지며 감상(感傷)과 감동이 등줄기를 파고든다. 위안은 웃음을 짓게 하는 게 아니라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이다. 내 이야기 같고, 내가 미처 하지 못한 말을 대독해주는 것 같다. 내 삶의 무게를 함께 짊어져 준 것 같다.

음반에 실린 모든 노래를 작사·작곡한 김민기는 가사와 곡조에서 한국 가요의 내면세계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노래에는 남녀 간의 뜨거운 사랑이나 가슴 아픈 실연은 없다. 그가 위대한 건 당시의 대중가요가 노래하지 않았던 것들을 노래했기 때문이다. 우리말을 지독히 사랑한 그가 지은 노랫말은 모국어의 문학적 성찬이기도 하다. 

지적이고 기품 있는 음유가객이자 출중한 싱어송라이터의 출현을 알린 20세 대학생의 1집 앨범(1971년)은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불멸의 앨범이자 한국적 포크의 시원이다. 여기 실린 ‘아침 이슬’ ‘친구’ ‘가을편지’ ‘아름다운 사람’ ‘두리번거린다’ 모두 자작곡이다. 아무 누구도 이 앨범이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정규앨범이 될지는 몰랐지만.

‘친구’는 청춘의 죽음에 바치는 레퀴엠이다. 경기고 3학년이었던 김민기가 삼척에서 열린 야영대회에 참가한 후배가 사고로 목숨을 잃자 그의 부모에게 알리기 위해 서울로 가는 기차 안에서 즉석에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곡조는 잔잔하고 무겁지만 선율은 서정적이다. 노랫말에 애도는 없다. 그저 묵묵히 삶과 죽음을 바라다본다.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요/그 깊은 바닷속에 고요히 잠기면/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고 노무현 대통령이 선거홍보 영상물에서 기타를 치며 불렀고 그의 취임식과 장례식에서도 불린 ‘상록수’는 그가 잠적한 20대 후반, 사무직으로 일하던 가죽공장 노동자 부부의 합동결혼식 축가로 지어준 노래다.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온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다/서럽고 쓰리던 지난날들도/다시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땀 흘리리라 깨우치리라/거치른 들판에 솔잎 되리라”

상처 입은 젊음, 가난하고 핍박받은 영혼들이 이 노래를 부르며 ‘땀’과 ‘깨우침’을 얻었다. 금지곡에서 풀린 대명천지의 시절, IMF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TV 광고 주제곡으로 불려 백성의 눈물을 닦아주고 등을 토닥였다.

1976년 카투사 군 복무 중 그가 만든 노래들이 운동권에서 불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전방 부대로 쫓겨갔다가 전역을 앞둔 늙은 선임상사의 인생사를 듣고 막걸리 2말 받고 만들어줬다는 ‘늙은 군인의 노래’.

2년 후 양희은의 앨범에 수록되자마자 판매 금지됐다. 당시 국방부 장관은 전 군에 이 노래를 부르지 못하도록 하달했고 문공부 장관에게 판매금지를 요청했다. 이유는 ‘군기 해이’와 ‘사기 저하’였다. 김민기 노랫말 중 드물게 감상적이고 허무적이다. 군인은 아니라 해도 평생 일만 하며 자식을 먹여 살린 대한민국 늙은 아버지들을 위한 헌사다.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주옥같은 가사의 다른 노래들을 듣는다.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바로 지금 여긴지도 몰라/우리 땀 흘리며 가는 여기 숲속의 좁게 난 길/높은 곳엔 봉우리는 없는지도 몰라” (‘봉우리’)

“서산마루에 시들어지는 지쳐버린 황혼이/창에 드리운 낡은 커튼 위에 희미하게 넘실거리네/어두움에 취해버린 작은 방안에 무슨 불을 밝혀둘까/오늘 밤에는 무슨 꿈을 꿀까/아무것도 뵈질 않네” (‘기지촌’)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아무것도 살지 않지만/먼 옛날 이 연못엔 예쁜 붕어 두 마리/살고 있었다고 전해지지요”(‘작은 연못’)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낙엽이 쌓이는 날/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편지’, 고은 시에 붙인 곡)

“헐벗은 내 몸이 뒤안에서 떠는 것은/사랑과 미움과 배움의 참을/너로부터 가르쳐 받지 못한 탓이나/하여 나는 바람 부는 처음을 알고파서 두리번거린다” (‘두리번거린다’)

지난 3월 31일 오후 서울 종로구 대학로 학전블루 소극장에서 극장 직원들이 간판 철거작업을 앞두고 마지막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지난 3월 31일 오후 서울 종로구 대학로 학전블루 소극장에서 극장 직원들이 간판 철거작업을 앞두고 마지막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그는 서른 넘어서는 노래를 만들지도 부르지도 않았다. 30년 넘게 대학로 ‘학전’의 ‘뒷것’으로 살았다. 지금 젊은 세대는 김민기 석 자는 몰라도 이름을 다 아는 최고의 가수와 연기자들의 교과서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가 됐다.

그는 ‘가왕’도 ‘가황’도 아니지만 한국 가요계의 지상에는 조용필이, 지하에는 김민기가 있다는 말이 있다. 한 살 차이인 조용필과 김민기는 40대 중반이던 1997년 대중음악평론가 강헌의 주선으로 딱 한 번 만나 폭음했다고 전해진다.
 
한국의 가수 중 스스로의 삶과 음악세계에서 ‘위대한’이란 수식이 결코 부끄럽지 않은 아름다운 사람, 그는 김민기다. 간암 말기로 투병하고 있다.

한기봉

◆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언론과 글쓰기를 강의했고, 언론중재위원과 신문윤리위원을 지냈다. hkb8210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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