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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스코필드 박사의 한국 사랑 절실히 느껴”

한국 찾은 후손…딘 케빈 스코필드·알렉사 캐서린 스코필드

“소아마비의 불편한 몸과 어려운 형편에도 절대 포기하지 않아”

2016.08.19 문화체육관광부 국민소통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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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한국 이름 석호필.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리는 그는 1919년 일제강점기 때 서울의 3·1만세운동 현장과 제암리를 비롯한 일제의 억압과 만행을 사진으로 담아 전 세계에 알렸고 해방 후에는 한국의 빈곤 퇴치와 인재양성 등에 헌신했다.

스코필드 박사는 언제나 가난한 자의 친구였고 젊은이들에게 헌신과 의로움을 가르쳤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그는 1970년 4월 12일 “내가 죽거든 한국 땅에 묻어주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19살부터 소아마비의 불편한 몸으로 어려운 형편에도 포기할 줄 몰랐다. 무엇보다 웃음을 잃지 않았고 다음 세대를 기르기 위해 평생을 헌신했다.

정책브리핑은 스코필드 박사의 후손인 손자 딘 케빈 스코필드와 증손녀 알렉사 캐서린 스코필드를 만나 ‘스코필드 정신’에 대해 들어봤다. 21세기 한국에 그가 살아있었다면 어땠을까?

정책브리핑은 스코필드 박사의 내한 100주년을 맞아 한국을 찾은 손자 딘 케빈 스코필드(왼쪽)와 증손녀 알렉사 캐서린 스코필드 씨를 만났다.
정책브리핑은 스코필드 박사의 내한 100주년을 맞아 한국을 찾은 손자 딘 케빈 스코필드(왼쪽)와 증손녀 알렉사 캐서린 스코필드를 만났다.

- 이번이 두 번째 한국 방문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별히 올해는 스코필드 박사가 내한한 지 100주년 되는 해라 더욱 뜻깊습니다. 한국을 찾을 때 드는 소감은 어떠신지요?

: 동생 리사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자녀와 같이 오게 돼 더욱 특별합니다. 초대해 준 한국정부와 여러 단체의 호의에 감사합니다.

캐서린: 증조할아버지가 얼마나 한국과 한국 민족을 사랑했는지 여기 오기 전까지는 잘 몰랐는데 환대를 받고 여러 가지 일정을 소화하면서 절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 너무 어렸을 때라 희미하겠지만 평소 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요?

딘: 제가 8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신사답고 무엇보다 유머러스했습니다. 장난꾸러기로 유명했죠. 아버지가 종종 할아버지의 강의를 따라 다니셨는데 많은 학생들이 웃을 정도로 유머러스했습니다. 천재 끼가 있어 때로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수사의 방법과 기술이 뛰어났습니다.

- 할아버지께서 한국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셨을 텐데, 할아버지께 한국은 어떤 의미였다고 생각하시나요?

캐서린: 개인의 성격과 열정 때문에 더욱 남달랐습니다. 3·1운동 때도 그렇고 그 이후에도 개인적으로 한국과 한국인의 상황에 대해 열정을 갖고 제기된 이슈에 꾸준히 집중하며 나아간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1919년 3·1운동 때 그의 소아마비 상태는 심각했지만, 일본인의 눈을 피해 자전거를 끌고 왕복 40km를 갈 정도로 열정이 대단했습니다.

딘: 할아버지는 이승만 박사님하고는 어릴 때 친구였고, 이승만·윤보선·박정희 전 대통령 때 국빈 대우를 받았었습니다. 당시 어떤 대통령 때인지는 모르겠지만 할아버지를 청와대로 초대했는데 집 없는 사람들과 함께 갔습니다. 대통령께서 왜 이 사람들을 데리고 왔느냐는 질문에 ‘정말 삶의 현장을 보려면 이 사람들을 봐야한다’고 해서 같이 만찬을 했었다고 합니다. 한국에 대한 애정도 애정이지만 빈곤 문제와 관련해 어려운 사람을 위해 힘쓰셨습니다.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리는 스코필드 박사(가운데)가 학생들과 함께 있는 모습니다. 그는 다음 세대를 기르기 위해 평생을 헌신했다.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리는 스코필드 박사(가운데)가 학생들과 함께 있는 모습니다. 그는 다음 세대를 기르기 위해 평생을 헌신했다.

-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의 독립에 힘을 보탰던 할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 어떤 감정을 느끼셨나요?

: 자부심을 느끼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향을 제시해줍니다. 또한 할아버지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할아버지를 독립 영웅으로만 생각하는데, 사실 정신병과 우울증으로 평생 요양 시설에서 보낸 할머니의 상황과 소아마비로 자신이 겪었던 육체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고 오히려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며 다양한 업적을 일궈낸 것이 더욱 자랑스럽습니다.

캐서린: 맞아요. 특히 본인이 소아마비에 걸리고 환경이 안 좋아서 삶이 어렵다 하더라도 절대 그만두지 않는 모습, 웃음을 잃지 않는 모습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 스코필드 박사의 뜻을 계승하기 위해 한국에서 여러 가지 사업들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유족으로서 이러한 사업들이 더욱 활성화되기 위해 조언하실 말씀이 있다면요?

캐서린: 증조할아버지는 소아마비로 인해 손과 발을 하나씩밖에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운전할 때도 지팡이를 사용해 클러치를 누르곤 했죠. 본인도 힘들었음에도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분이었습니다. 유족으로서는 이러한 스코필드 정신이 한국인들에게 안내자의 역할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정운찬 전 총리, 고 김근태 의원도 직접 가르치고 도와주셨듯이 많은 사람을 도와줬습니다. 1929년 대공황 때 사람들의 형편이 너무 어려우니 할아버지는 갖고 있는 돈이나 식량 등 전 재산을 사용해 도와줬습니다. 유명한 수의학자였기 때문에 후원이 들어왔습니다. 본인도 가난했음에도 후원받은 돈을 모두 어려운 사람을 위해 쓰셨습니다.

그리고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독일의 경제가 어려웠습니다. 이때 할아버지는 몇 개 차량분의 옷을 모아서 독일로 보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사람과 상황이라면 한국인뿐만 아니라 전 세계 어디든 도우려고 하셨습니다.

증조할아버지가 지금 살아계셔서 21세기의 한국에 오셨다면 여러 가지 활동들을 싫어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는 돈이 생기기만 하면 고아들에게 나눠주고 그랬죠.
    
- 마지막으로 현재 대한민국은 빠르게 성장했지만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잘못된 풍조가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대한민국 청년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해주세요.

캐서린: 며칠 전 대통령께서 말씀했듯이 사회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교육이 중요하고 지금의 한국을 있게끔 만든 것도 교육의 힘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얼마 전 현대미술관에 갔는데 국제투쟁에 대한 학생들의 역사를 봤습니다. 증조할아버지가 평생 강조하신 것도 그러한 투쟁 정신처럼 3·1정신을 살려나가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이러한 정신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과거에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을 인식하고 그 정신을 살려서 포기하지 않고 어려움을 극복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딘: 어른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수고를 인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젊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포기하지 않고 지켜나가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할아버지는 개인의 육체적인 아픔과 가족의 아픔이 있었지만, 한국에 있을 때나 고국에 있을 때나 비록 더디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노력해서 무언가를 일궈냈습니다. 이러한 그의 정신이 한국 청년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김재현(사진) 호랑이 스코필드기념사업회 사무총장.
김재현 호랑이 스코필드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정책브리핑은  딘 케빈 스코필드와 알렉사 캐서린 스코필드에 이어 김재현 호랑이 스코필드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을 만나 그와 관련된 사업에 대해서도 들어봤다.

- 스코필드 박사는 어떤 분이셨나요? 한국에 남다른 애정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요?

박사님은 수의학과 의학교과서에 나오는 세계적인 수의학자였습니다. 혈액 응고 방지제(디쿠마린)의 원초적인 기술을 개발할 정도로 탁월한 수의학자였습니다. 아울러 기독교 선교사이자 민족 독립의 영웅입니다.

그냥 독립을 도운 것이 아니라, 34번째 민족대표라고 불렸습니다. 독립선언서를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봤던 유일한 외국인입니다. 그 정도로 민족 대표들이 그를 믿었고 3·1운동의 홍보맨으로 중책을 맡겼습니다. 그 결과 국립현충원의 애국지사 묘역에 외국인으로서 유일하게 묻히게 됐죠.

마지막으로 다음 세대를 기르기 위해 힘쓴 사람입니다. 가난한 사람, 여자, 과부, 고아 등 어려운 사람들의 인재 양성 기금을 모으기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하루에 1시간 이상씩 매일 편지를 썼습니다.

한국은 박사님이 여덟 살 때 영국에서 살고 있을 당시 신학과 교수인 아버지의 제자 ‘여병현’이라는 한국 청년이 찾아와 처음 접하게 됐습니다. 그때 들은 한국에 대한 이야기가 평생 떠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후 한국 기독교 초기 의료선교를 했던 에이비슨 박사의 부탁을 받고 세브란스 병원에 오게 됐는데, 일제 강점기에 한국 사람들이 일본인들에게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국인의 삶의 여건에 분노하고 한국인을 도와줘야겠다고 다짐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이것이 한국인에 대한 사랑을 뛰어넘어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발전했습니다.

- 올해는 스코필드 박사가 내한한 지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특별히 준비된 사업이 있나요?

캐나다 정부가 2009년 ‘민족의 영웅’으로 공식 인정했습니다. 이에 올 9월 30일 구엘프대학교에 기념조형물을 세우게 돼 의미가 남다릅니다.

또한 12월부터 두 달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스코필드 특별전시회가 열릴 예정입니다. 이때 캐나다 온타리오 주 수상과 정부 관계자가 참석할 예정이며 국가보훈처가 후원을 합니다.

지난 1년 동안 아모레퍼시픽 재단에서 지원을 받아 작업했습니다. 지난 100년 동안 출간을 못 했던 중요한 자료를 런던에서 구매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부터 박정희 대통령 때까지 출간하기로 한 귀중한 자료가 있는데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 자료의 일부를 사 온 것입니다.

- 현재 스코필드 박사와 관련된 사업은 어떤 것이 있나요? 앞으로의 계획은요?

지난주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장학재단을 출범시켰습니다. 또한 2년 후는 3·1운동 100주년입니다. 이를 기념해 ‘스코필드’를 주제로 영화를 제작하려고 준비 중입니다. 영화를 통해 한국 국민들과 소통하고 싶습니다. 아울러 100주년을 기념해 3·1회관을 지어 3·1정신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박사님은 3·1정신으로 대한민국이 일어나길 평생 바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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