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정부 임기 5년차에 접어듭니다. 돌아보면 지난 4년간 편안한 날이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힘든 날들이었지만,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우리 공무원들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마음 깊이 고맙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정부의 중심은 공무원입니다. 대통령도 여러 차례 바뀌고 수많은 정치·경제적 고비가 있었지만 대한민국은 제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공은 우리 공무원의 역량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올해는 대통령 선거로 외부 환경이 그 어느 해보다 어수선할 것입니다. 그럴수록 정부는 국정의 중심을 잡고 할 일을 해야 합니다. 아무리 임기 말이라도 옳은 정책이고 해야 할 일이라면 끝까지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기자실 개혁 문제도 그런 맥락에서 추진하는 것입니다. 원칙에서 벗어나 있는 관행을 원칙에 맞게 바로잡아 다음 정부에 제대로 넘겨주려는 것입니다.
기자실 개혁, 꼭 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이번 ‘취재지원 시스템 선진화 방안’, 즉 기자실 개혁의 핵심은 부처별 기자실, 부처 출입처 제도를 개선하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한 가지입니다. 잘못된 관행을 개혁해 정책 기사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부처에 고립된 기자실에서는 좋은 기사가 나올 수 없습니다. 정부 정책 중에 한 부처에 국한된 정책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의 정책이 국무조정실에서 조정하고, 관계 장관회의를 거치고, 민관이 함께 참여하는 각종 태스크포스(TF)의 검토를 거쳐 만들어집니다. 정부의 정책에 대해 수준 높은 기사를 쓰기 위해서는 부처 기자실의 울타리를 벗어나 정책의 현장을 발로 뛰고, 전문가들을 만나고 연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복잡한 정책의 핵심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고 숨어있는 문제점을 제대로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부처별 출입처 제도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기자들이 부처 기자실에 상주하면서 부처의 브리핑 내용, 이른바 ‘관계자’의 비공식 견해, 기자실 내부에서 오가는 정보 등을 가지고 기사를 쓰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식의 취재 관행은 언론사와 기자들 간의 경쟁을 가로막고 비슷비슷한 기사를 만들어내는 원인이 됩니다. 하루 종일 기자실 공간에서 함께 지내다보면 어떤 사안에 대한 시각마저 부지불식간에 비슷해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국민들에게 다양하고 깊이 있는 정보가 전달되기 어렵습니다.
이 문제를 언론계에서도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부처별 출입처 제도는 이미 오래 전부터 언론학자나 언론 단체는 물론 기자들 스스로 그 폐해를 지적해 온 문제입니다. 몇몇 언론사는 자체적으로 출입처 제도를 없애려고 했지만 다른 언론사들이 동참하지 않아 포기했습니다. 누구나 그 폐해를 알면서도 뿌리 깊은 관행이어서 없애기가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참여정부에서도 대통령의 중요 정책의 경우, 출입기자만이 아니라 관련 전문기자나 해당 부처 기자에게 취재를 개방하는 시도를 여러 차례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부처별 출입처 관행이 유지되는 상태에서는 효과를 거두기 어려웠습니다.
실제로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정부의 일이 아니라 언론 스스로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부는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필요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정부로서는 환경을 바꾸는 일밖에 할 수 없지만 그것이 정부의 책임이라면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오랫동안 생각한 끝에 결단한 일입니다
이 사안은 언론에 대한 호불호나 한 두건의 문제 사례 때문에 추진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현실과 미래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한 끝에 근본적인 결단이 필요해 시작한 일입니다.
권력은 이동하고 있습니다. 이제 대통령과 정부가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는 세상이 아닙니다. 시장의 힘이 커지고 있고, 그 시장은 여론의 영향을 받습니다. 더구나 본격적인 지식정보화 시대입니다. 정보의 양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고 정보의 속도는 빛의 속도만큼 빨라지고 있습니다. 관건은 정보의 질입니다. 그 사회에서 유통되는 정보의 품질에 따라 개인과 국가의 경쟁력이 판가름 나는 시대입니다.
한 사회의 여론과 정보의 수준을 좌우하는 것은 언론입니다. 이제 사회는 언론이 가는 쪽으로 갑니다. 언론의 수준만큼 갑니다. 지금은 언론이 정치권력의 압력이 무서워 할 말을 못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언론자유 못지않게 지금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과제는 언론의 수준과 기사의 품질입니다.
참여정부가 지난 4년 동안 언론과의 관계에서 일관된 원칙을 견지해 온 것도, 이번에 기자실 개혁을 추진하는 것도 이러한 인식 때문입니다. 과거의 낡은 관행을 깨고 정부와 언론이 건전한 긴장관계 위에서 신뢰경쟁, 품질경쟁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 과정이 일시적으로 힘들고 고생스럽기는 하겠지만 그렇게 가는 것이 민주주의 발전과 지식정보화시대에 반드시 필요한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언론의 품질이 높아져야 국가의 경쟁력도 높아집니다
다 좋은데 왜 하필 임기를 1년도 안 남긴 시점에서 추진하느냐고 묻습니다. 대통령도 힘이 듭니다. 언론의 반대를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닙니다. 기분에 따라 하는 일 같으면 임기도 얼마 안 남은 지금 이 일을 누가 하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참여정부는 지난 2003년 출범과 함께 1차 기자실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당시 개혁의 목적은 ‘특권과 유착을 배제’하는 것이었습니다. 폐쇄적인 부처별 기자실을 없애고 기자단에 대한 특혜를 폐지했습니다. 개방형 브리핑제를 도입하고 가판을 끊었습니다. 잘못된 보도에 대해서는 뒷거래가 아니라 공식적이고 공개적 절차를 통해 바로잡고 반론하는 시스템을 뿌리내렸습니다.
성과가 있었습니다. 정부와 언론은 ‘끈끈한 유착 관계’에서 ‘건전한 긴장관계’로 바뀌었습니다. 언론의 비판과 공격이 거세졌지만, 특권과 유착은 사라졌고 보도의 책임성도 전에 비해 나아졌습니다. 공무원은 언론과의 비공식적 친분 관계에 신경 쓰거나 기사를 빼달라고 사정하는 일을 하지 않게 됐습니다. 거기에 쓰던 힘을 정책의 품질과 정책 홍보의 수준을 높이는 데 쏟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옛날의 폐해가 되살아나는 조짐을 보였습니다. 일부 부처에서는 개방형 브리핑이 형식적으로 흐르고 기자실은 다시 폐쇄적 공간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사무실 무단 출입도 조금씩 되살아났습니다. 수많은 언론이 있지만 출입처 기자실의 좁은 시야를 벗어나는 다양한 보도는 좀처럼 찾기 힘들었습니다. 당시의 개혁이 불완전했던 탓도 있고, 시행 과정의 문제도 있었습니다.
이대로 가면 다음 정부에서는 과거의 폐쇄적 기자실이 다시 부활하고 개방형 브리핑제마저 무너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각 부처와 부처기자실 간의 '끈끈한' 인간관계가 정보의 흐름을 좌우하는 과거의 관행이 되살아 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부처별 출입처 제도의 폐해를 개선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힘들더라도 그간의 성과를 정리해 제대로 된 시스템을 다음 정부에 넘겨줘야 합니다. 그래서 어렵지만 결단을 한 것입니다.
‘부처 기자실 제도’가 국민의 알권리를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정부나 언론이나 변화에 따르는 불편함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익숙했던 취재방식과 관행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스템에 적응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를 언론탄압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직하지 않습니다. 정부는 언론을 탄압할 의사도, 능력도 없습니다. 이번 조치로 정부에 대한 언론의 비판 보도가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반문하고 싶습니다. 또 준비기간을 감안하면 이 제도가 시행되는 것은 임기 중 불과 몇 달입니다. 그 몇 달 동안 무슨 탄압을 하겠다고 시스템을 바꾸겠습니까?
지난 2003년 개방형 브리핑제를 처음 도입할 때도 ‘취재제한’ ‘언론통제 발상’ ‘신 보도지침’이라는 언론의 반발이 있었습니다. “언론사가 브리핑에만 의존할 경우 정부의 홍보기관으로 전락할 우려가 크다”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나보니 모두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자유로운 취재와 국민의 알권리를 제한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자실 전성시대였던 과거 독재정권 때 그 기자실에 자유로운 취재와 국민의 알권리가 있었습니까? 선진국 기자들은 우리나라 기자들이 부처 기자실에 하루 종일 상주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다고 합니다. 선진국 언론은 부처별 기자실에 안주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수준 높은 기사를 쓸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부처 기자실은 자유로운 취재와 국민의 알권리를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하루 종일 상주하면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해당 부처와 기자실이라는 좁은 공간의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상주 기자실에서 수많은 언론이 매일 비슷한 기사를 생산하는 낡은 관행이야말로 국민의 알권리, 언론의 품질에 도움이 안 됩니다.
정보공개 확대와 기자실 개혁문제는 별개입니다
정부의 정보공개 수준이 낮다는 이유로 부처 기자실을 고집하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 또한 낡은 관행에 안주하는 사고입니다. 참여정부의 정보공개는 과거와 비교해 양과 질 모두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정부의 정보 공개 수준은 계속 높아져야 하고 높아질 것입니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정부의 정보공개와 부처 기자실 문제는 별개입니다. 상주 기자실에서 정부가 공개하는 정보에 의존해서 기사를 쓰려는 것이 아니라면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정보공개는 그것대로 발전시키고 잘못된 취재 관행은 그것대로 고쳐 나가는 것이 옳은 길입니다.
어느 나라 공무원도 언론이 원하는 정보를 쉽게 내주려 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정부가 공개한 정보에만 의존해서는 깊이 있는 취재를 할 수 없습니다. 공개 정보를 단서로 삼아 관련된 현장을 발로 뛰고, 전문가를 만나고, 다른 기관을 취재하고, 연구를 해야 합니다. 그런 토대 위에서 공무원을 취재해야 공개 정보 이상의 깊은 정보, 공개하고 싶지 않은 정보를 내놓게 됩니다. 지금 우리 언론의 취재를 가로막는 것은 정부의 정보공개 수준보다는 부처 기자실 중심의 낡은 취재 관행입니다.
서로를 존중하면서도 좋은 기사를 쓸 수 있습니다
사무실 임의 출입을 허용하라는 주장도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부처의 사무실을 기자들이 임의로 출입하는 과거의 관행은 없어져야 합니다. 아무리 취재가 중요하더라도 공무원의 일상 업무를 방해하면서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대통령도 장관이나 차관에게 직접 전화할 일이 있을 때 웬만하면 절제합니다.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기자들이 무시로 출입하는 사무실에서 공무원들이 정상적으로 일하기는 불가능합니다. 대부분의 선진국 기자들은 사무실 임의 출입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정해진 절차를 거쳐 공무원을 만납니다. 그 선진국 기자들이 언론자유에 대한 의지가 약해서, 취재에 게을러서 그런 절제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정부와 언론이 서로 존중해야 할 기본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무실 임의 출입 문제 역시 언론자유나 취재 제한과는 관계없는 낡은 관행일 뿐입니다. 공무원 접촉을 막자는 것이 아니라 업무 중에는 업무에 방해되지 않게 정해진 절차에 따라 만나자는 것입니다. 그 외에 기자 개인의 역량에 따라 공무원을 취재하는 것은 누구도 막지 않고 막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편한 방식이라도 잘못된 방식은 버려야 합니다.
이번 개혁은 반드시 성공합니다
아무리 옳은 일이라도 이렇게 모든 언론과 다음에 대통령 되겠다는 사람들 대부분이 반대하는데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걱정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개혁은 반드시 성공합니다. 당장은 시끄럽지만 이렇게 하는 게 옳고, 세계의 보편적 기준에 맞기 때문에 이 방향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지난 4년 내내 참여정부가 해온 다른 일들도 그래왔습니다.
궁극적으로 언론과 언론인 스스로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이 방향으로 갈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정보 수준은 하루가 다르게 높아지고 있습니다. 부처별 출입처 관행에 안주하며 생산하는 기사로는 더 이상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에 적응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언론 스스로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이 제도가 시행되면 언론계 내부로부터 고민과 노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정부도 정책품질과 정책홍보의 수준을 더 높여야 합니다
새로운 시스템을 정착시키기 위해 정부와 공무원 여러분이 노력해야 할 일도 있습니다. 더 수준 높은 정책을 만들고, 더 설득력 있게 정책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공식 브리핑의 수준을 높이고, 새로 도입할 온라인 브리핑 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해 더 많은 역량을 쏟아야 합니다. 참여정부 들어 크게 나아졌지만 정보공개도 더욱 확대해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별 출입처 관행이 유지될 때보다 더욱 정확하고, 풍부하고, 깊이 있고, 책임 있는 정보가 흐르도록 해야 합니다.
업무도 늘고 새로운 일도 생기겠지만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을 또박또박 챙겨나가면 국민과 언론도 이러한 변화를 이해해 줄 것입니다.
이번 기자실 개혁은 정부와 언론 모두 선진화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입니다. 당장 부담스럽고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미룰 일이 아닙니다. 지난 4년 동안 가장 말이 많았던 것이 참여정부의 언론 정책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추진한 것은 그냥 ‘언론 정책’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정보와 정책의 품질, 민주주의와 공론의 수준을 선진화시키는 데 반드시 필요한 역사적 과제입니다. 훗날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공무원 여러분 자신의 일입니다
대통령은 임기가 있지만 정책은 임기가 없습니다. 공무원 여러분도 임기가 없습니다. 옳은 정책, 꼭 해야 할 일은 대통령의 일이 아니라 공무원 여러분 자신의 일로 만들어 주기 바랍니다. 흔들리지 말고 국민만 보고 앞으로 나아가기 바랍니다.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이 대한민국과 국민의 삶을 한 단계 발전시킬 것이라는 자신감을 갖고 일해 주십시오.
대통령도 임기 마지막 날까지 공무원 여러분을 믿고, 여러분과 함께 책임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07년 6월7일
대통령 노무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