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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문화잔재 바로알고 바로잡기

5.16후 정부가 오히려 국민들 마음속 일제 잔재 불러내

재건체조·애국조회·교육헌장·국기 맹세 등 곳곳에 산재

[기고]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2005.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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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용(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오까네가 나이?
“오까네가 나이.”
갓 국민학교에 들어갈 무렵(그때는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라 불렀다), 아버지가 어머니와 얘기하시던 중에 뭔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시며 하신 말씀이었다. 오까네가 나이? 무언가 비밀스런 말씀이겠거니 생각은 하였지만, 그 뜻은 도통 알 수 없었다. 나와는 관계가 없었기에 구태여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말은 알아들었다.
“한용아, 오차를 곱뿌에 담아 오봉에 내어 와라. 그리고 덴뿌라랑 다꽝과 닌진 그리고 다마네기랑 삼마 두 마리 사와라. 주리는 주봉 보겟또에 잘 챙겨오고. 참, 주리는 야마시이 하면 안된다.”
우리 말로 풀자면 이런 뜻이었다.
“한용아, 차를 잔에 담아 쟁반에 내어 와라. 그리고 어묵과 단무지와 당근 그리고 양파와 꽁치 두 마리를 사와라. 거스름돈은 바지 주머니에 잘 챙겨오고. 참, 거스름돈은 속이면 안된다.”
나는 이것이 일본말인줄 몰랐다. 그렇다고 학교에서 이 말을 배운 적도 없었다. 그저 ‘부산 사투리라서 학교에서 가르치나 않는가 보다’ 라고 생각했다.
내 부모님은 일제시기 국민학교를 다니셨고, 일본어를 모국어로 배우셨다. 그것이 그분들의 학력 전부였고, 그분들이 사용하던 일제의 언어는 고스란히 내게로 전수되었다. 난 그 일본어를 부산사투리로 알고 배우며 자란 것이다. 1960년생인 내가....
학교를 다니면서 내가 익숙하게 들었던 일본말은 점차 내게로부터 멀어져 갔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곳곳에서 일제 잔재를 만났고, 그것은 나와 함께 자라왔다.

어린 시절의 추억과 자라난 일제의 흔적들

어린 시절 밤이면 동생과 함께 어머니가 가르쳐 준 ‘오재미’ 놀이를 즐긴 적이 있었다. 긴 겨울밤에는 징용에 끌려가신 외할아버지가 여자로 둔갑한 ‘다누끼’(너구리)와 깊은 산속에서 살았다는 믿지 못할 얘기를 어머니 턱 밑에서 눈을 깜박이며 들었다. 우리나라 여우는 둔갑을 하더라도 꼬리를 감출 수 없듯이, 다누끼는 사람으로 둔갑해도 사람과 달리 뒤꿈치가 없다는 것도 알았다.‘다방구’,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장께이뽀’(가위바위보), ‘도시락고 헤이’와 같은 놀이를 즐겼지만, 그것이 우리 부모님들이 일제 강점기 일본 아이들로부터 배운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일제시대 아침조회 모습
약주를 즐기신 고모님은 가끔 내게 일본 동요를 가르쳐 주시기도 했다. 뜻도 모르고 따라 부르다 외었던, “유야게 고야게떼 히가구레떼. 야마노 오떼라노 가네가에루···”라는 일본 동요를 내가 일본인 유학생에게 불러주면, 일본인 학생은 대번에 놀라곤 했다. ‘어떻게 1930년대 일본 동요까지 알고 있나요?’ 라며. 차마 일제 때 유치원을 다닌 고모한테 배웠다는 소리는 못하고, 일제 강점기를 연구하다가 알게 되었다고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추억은 좋든 나쁘든 성장하면서 사라져가는 법이고, 그리움이라는 안개 속에 뒤섞여 버린다. 부모님들도 이젠 칠순이 훨씬 넘어 더 이상 그때를 되새길 여력이 없으시다. 골목길 놀이 문화가 사라진 지금 나도 더 이상 내 아이들에게 어린 시절 내가 배웠던 일본 아이들의 놀이를 가르치지 않는다. 아아, 이렇게만 되었다면 일제 잔재는 그 시대를 살았던 노인들의 추억 속에서, 그리고 그 흔적만을 어렴풋이 이어받은 우리 세대에서 하나의 잔재로 끝났을 것이다. 이른바 세월의 잔영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 잔재는 이런 동심의 세계에서 소박하게 남아있는 것보다 더 심각하게 우리 사회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나고 재생산되고 있었다.

국가가 나선 일제 잔재 재건운동

우리 사회에서 세월의 잔영으로 사라질 운명에 처했던 일제 잔재는 박정희시대에 오히려 국가 통치 시스템으로 확고하게 되살아나고 뿌리박았다. 5·16쿠데타가 일어난 후 ‘재건운동’이란 게 곳곳에서 벌어졌다. 동네 사람들은 아침 일찍 마을회관 앞이나 학교 운동장에서 라디오에서 나오는 “재건체조”를 따라해야 했다. 이 재건체조란 게 일제 때 의무적으로 했던 ‘황국신민체조’(흔히 라디오체조라 불렀다)를 부활시킨 것이었다. 재건체조의 순서를 그린 전단 또한 일제 때 만들어진 ‘황국신민체조’의 그것과 똑같은 형식이었다. 재건체조를 만든 이들은 일제 때 교사나 군인을 했던 자들이었다. 그들에 의해 일본 군국주의 문화는 국가 재건이란 미명으로 되살아났다. 국가재건은 일제 잔재 재건이었다!

재건체조.
국민학교라는 일제 때의 학교 명칭이 그대로인 채, 우리는 ‘애국조회’ 시간에 운동장에 줄을 선 채로 ‘교육칙어’ 대신 ‘국민교육헌장’을 외어야 했다. 종례 시간에 담임선생은 국민교육헌장을 다시 외우게 했고, 미처 다 외우지 못한 아이들은 옥수수빵을 배급받지 못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중학생이 되자 ‘유신체제’ 아래 좀더 강도 높게 일제식 교육을 받아야 했다. 그때 눈이 아프게 보았던 “방공방첩”이란 표어가 일제 때 처음 만들어졌던 것이란 것을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민방공훈련이 실시되고 공습경보 발령이 나자, 어머니는 당신이 어릴 때 “규쥬께호(공습경보)” 훈련을 받았던 시절을 회상하시곤 했다. 아둔한 나였지만 가끔 상장을 받았다. 대부분 상장에 적힌 글귀는 “위 학생은 품행이 방정하고 학업성적이 우수하여 이에 상장을 수여함” 따위였다. 성적만 좋았을 뿐인데 품행도 좋다는 게 (기분은 좋았지만) 이해는 안 되었다. 후일 내가 일제시기 상장을 구해 읽어보니 내용이 똑 같았다. 다만 품행 대신 조행(操行)이란 글귀가 대신했다. 일제시기 조행이 불량하면 상급학교 진학이 어려웠다. 일제에 그만큼 충실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발상 아래 만들어진 상장이 해방 후 아무런 반성 없이 그대로 사용된 것이다.

국민교육헌장보다 짧아서 한숨을 돌렸지만, “국기에 대한 맹세”는 일제시기 “황국신민의 서사”를 본떴다는 점에서 여전히 지금도 불쾌하다. 그러나 나는 마흔 여섯이 된 지금도 “국민교육헌장”과 “국기에 대한 맹세”를 욀 수 있다.

국민교육헌장.
세뇌 교육이란 게 이렇게 오래 가나보다. 후크를 찬 교복과 비듬이 생기는 교모가 답답하던 학창시절, 머리 가운데 ‘경부고속도로’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던 ‘두발검사’와 군대 내무검사를 방불케 한 ‘용의검사’ 등이 청춘을 욱죄었다. 일본 제국해군의 세일러복은 여학생 교복(세라복)으로 부활되었고, 오늘도 중년 여성들은 세라복의 추억에 잠긴다. 일제시기 황국신민교육이란 명목으로 자행된 수많은 교육범죄들이 유신이란 이름 아래 되살아나 학생들을 복종하는 기계로 만들었고, 우리는 그것이 일제 잔재인지도 모르는 채 그저 ‘추억’으로 흘러버렸다.

'애국반'·'도나리구미'는 '반상회'로 부활

어른도 예외는 아니었다. 주부는 반상회로 집결되었다. 반상회는 일제 때 만들었던 “애국반” 또는 “도나리구미”에서 나온 것이었다. 행락철이 되면 ‘창경원 벚꽃놀이’가 시골사람들에겐 큰 화제였다. 너도 나도 갔다 오면 구경 자랑에 입이 쉴 새가 없었다. 노인들은 일제 때의 벚꽃놀이를 회상하며 감개에 휩싸이기도 했다. 냇가에 천렵이라도 가면 으레 돗자리 위에서 화투(하나후타)판이 벌어졌다. 화투야 세종 때 양녕대군이 즐겼다는 기록도 있지만, ‘육백’이 우리의 놀이일 리는 만무하고 그림 또한 우리 것은 아니었다. 남정네들은 술 한잔 걸치면 “십팔번”을 뽑아댔고, 일본식으로 어깨띠를 대각선을 맨 포대기로 아이를 업고 있는 젊은 아낙네의 찌푸린 모습도 눈에 선연하다.

한국적 민주주의, 민족적 민주주의를 외치고 유신을 외치던 그들은 “조국근대화”란 미명 아래 일제의 잔재들을 국가주의 통치 시스템을 활용하기 위해 부활시켰다. 국가에 의해 일제잔재는 제도화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용되면서 어느덧 우리 것인지 남의 것인지도 모르게 우리 사회에 자리 잡고 있으니, 이를 과연 잔재라 할 수 있겠는지.

◎ 박한용: 고려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 수료,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한성대학교 역사문화학부 강사,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
한국 근현대사 특히 민족해방운동사와 한국 민족주의 분야 연구. 아울러 역사바로잡기 운동의 하나로 한일 과거사청산과 친일문제 진상 해명 활동에 종사. 대학에서는 오래 동안 전통문화와 관련해 강의 중.
논문으로는 '1931년 경성제대 반제동맹사건 연구' '1930년대 민족통일전선과 반제동맹 연구' '근대를 넘어 선 근대' '한국 민족주의의 신화와 현실'이 있다.
공저 '빼앗긴 조국 끌려간 사람들' '시와 이야기가 있는 우리 역사 1·2 ' '우리 민족해방운동사' '밀양독립운동사' 사진집 해설 '일제 침략 아래서의 서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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