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환걸 아로마빌 대표의 꿈은 장애인들을 위한 안정적인 일터를 만드는 것이다. |
“이렇게 미인을 만나게 되니 기분이 좋으네요~ 반갑습니다!”
노환걸(51) 아로마빌 대표가 칭찬으로 첫인사를 건넸다. 그의 유쾌한 모습에 일순간 주위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노 대표는 ‘망막색소변성증’을 앓고 있는 시각장애인이다.
이 병은 오래 전 개그맨 이동우 씨가 시력을 잃으면서 알려지게 된 질환이다. 야맹증, 시야협착 등의 증상으로 시작해 점차 시신경이 손상되면서 시력을 상실하게 되는 퇴행성 유전질환이다. 노 대표는 탁자 너머에 앉은 사람의 형체만 간신히 볼 수 있다.
노 대표는 현재 중소 커피제조회사인 아로마빌을 이끌고 있다. 그는 20여 년 동안 커피와 관련된 일을 해 왔다. 노 대표의 첫 직장은 커피 전문업체인 대기업이었다. 그는 주로 마케팅 분야에서 근무했다. 광고를 기획하고 마케팅 방향을 결정하는 일이 그의 주업무였다.
시력에 문제가 생긴 것은 2002년이었다. 당시 마케팅 팀장이던 그는 포장지 시안을 보고 글씨를 빨간색으로 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갑자기 회의실 안에 정적이 맴돌았다. 이미 글씨는 빨간색으로 돼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지하철 선로에 떨어져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그는 회사를 그만뒀다.
한창 활발하게 일할 40대 초반의 가장에게 앞을 볼 수 없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다. 그는 “장애인이 됐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며 “좌절, 분노, 원망 등의 과정을 겪어야 했다”고 말했다. 혹시나 두 딸에게 상처를 주게될 것이 두려워 그는 동네에서는 지팡이를 짚고 돌아다니지도 않았다.
하지만 노 대표는 절망에만 휩싸여 있지 않았다. 시각장애인 등산 모임, 마라톤 모임 등에 나가 다른 이들과 어울렸다. 그는 “앞이 보이지 않아도 긍정적으로 살고 있는 분들을 보며 자극을 받았다”고 말했다.
“시각장애인들 중에는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평생 힘들어하는 분들이 많아요. 집 밖으로 나오지 않고, 혼자 고립돼 살아가는 경우도 많죠. 하지만 그러다 보면 건강도 나빠지고 우울증도 오게 돼요. 악순환이 반복되는 거죠.”
노 대표는 ‘할 수 없다’며 포기하는 대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그 일은 ‘커피를 만드는 일’이었다. 그가 가장 오래, 그리고 최선을 다해 매달려 온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루에 수십 잔 커피 마셔가며 제품 개발
그때부터 노 대표는 아내가 운영하던 소규모 커피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곳이 현재 그의 일터다. 그는 자신의 전공을 살려 신제품 개발에 몰두했다. 가장 좋은 맛을 내는 커피의 배합 비율을 찾기 위해 하루에도 수십 잔의 커피를 마셨다. 평소 커피를 즐겨마시던 그에게도 고된 일이었다.
“그렇게 커피를 많이 먹으면 속이 느글느글해요. 그래도 어떡하겠어요. 예전처럼 마케팅 업무를 할 수는 없잖아요(웃음).”
그의 노력이 빛을 발한 것은 3년 전이다. 대형 마트의 한 임원이 지방 식당에서 자판기 커피를 마신 게 계기가 됐다. 그 임원은 아로마빌에서 만든 커피 맛을 보고 감동해 이 회사를 수소문했다.
노 대표가 운영 중인 회사에서 생산하는 제품. 이 회사 제품은 대형 마트에 납품되고 있다. |
또한 노 대표는 시각장애인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컵커피도 개발했다. 현재까지 10여 건의 커피 관련 지식재산권을 갖고 있다. 그는 “원래 자동차 오토 기어도 지체장애인들이 편리하게 운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개발됐는데 이제는 많은 운전자들이 오토 기어를 사용하지 않느냐”며 “시각장애인들의 눈높이에 맞게 만든 제품도 시간이 지나면 시각장애인뿐 아니라 여러 소비자들이 이용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노 대표는 회사일뿐 아니라 틈틈이 등산, 마라톤 등의 취미생활도 즐긴다. 그는 “예전에 눈이 잘 보일 때는 회사일을 하느라 취미생활을 즐기지 못했는데 요새는 짬을 내 운동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2012년 싱가포르 마라톤대회 하프구간(21킬로미터)에 출전하기도 했다. 당시 한국장애인재활협회가 주관해 장애인들에게 국제마라톤대회 출전 기회를 제공하는 ‘감동의 마라톤’ 프로그램에 나가 4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선발됐다.
최근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장애인들을 위한 일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시각장애인들 중에 안정된 일자리를 갖지 못해 힘들어하는 이들을 많이 봤기 때문이다. 노 대표는 “시각장애인들 가운데는 자신의 한계를 넘기 위해 도전하기보다 시간이 빨리 지나 삶을 마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시간을 보내는 이들이 많다”며 “이들이 마음을 붙이고 일할 수 있는 일터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꿈은 10년 이내 장애인 1천명을 고용하는 사회적기업을 만드는 것이다.
“시력을 잃게 된 것을 원망한 적도 많습니다. 아직도 여전히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는 않죠. 도전하고 실망하고, 그런 일들이 반복됩니다. 그럼에도 장애인들을 위한 일터를 만드는 게 제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는 제 꿈이 이루어지는 날이 꼭 오겠죠?”
[위클리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