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차봉 씨는 “기초연금을 받으면서 생활의 부담을 덜어 작품 활동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됐다”면서 “대를 이은 옻칠장이인 아들과 함께 전시회를 꼭 열고 싶다”고 말했다. |
“오늘은 일을 쉬어요. 젊을 때랑 몸이 다르니까 아프고 피곤할 때는 쉬려고 해요.”
경기 구리시 외곽에 사는 옻칠장이 김차봉(76) 씨를 만났다. 그곳은 그의 집이자 공방. 움막 같은 미로를 지나 세 사람이 겨우 앉을수 있는 작업실에 들어섰다. 작업실의 절반은 옻칠한 그릇을 말리는 장롱이 차지하고 있어 공간은 비좁았다. 나무마루 대신 종이상자를 깔아놓은 이곳에서 김 씨는 60년째 옻칠을 해오고 있다고 했다. 옻칠 하고 말리기를 십여 차례 반복해야 완성되는 옻그릇처럼 그의 말투는 침착하고 조심스러웠다.
“거제도에서 태어나 살았는데요. 먹고살기 어려우니까 중학교 2학년 때인가 통영에 가서 나전칠기를 배웠습니다. 사촌형이 목수여서 이것저것 만들어보기도 했고, 친형이 나전칠기를 해서 저도 하게된 거지요. 어머니가 한 달에 쌀 서 말인가를 그 댁에 드리면서 3년 정도 배웠습니다. 재미를 느꼈다기보다는 먹고살기 위해서 했지요.”
이후 서울시 무형문화재 나전장 14호 고 민종태 선생, 중요무형 문화재 칠장 고 김태희 선생에게 사사한 그는 제3회 한국예술대전 전통공예 부문 특선(1982년), 제1회 전국전통공예 공모전 입상(1986년), 서울시 우수문화상품 공모전 공예 대상(1996년), 경기도 공예대전 동상 및 특상(2007년)을 수상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삼성그룹 중앙개발부 공예칠부 칠부 책임자(1965년), 한양대 전통미술원 연구원(2000년)으로도 활동했지만 무형문화재가 되지 못한 채 옻칠장이로 생계를 이어가긴 어려웠다.
“2남 2녀를 두었는데 키우기가 만만치 않아 밤에 일도 많이 했어요. 일당 10만 원을 받으려면 최소한 그릇 500개를 칠해야 했지요. 옻그릇은 나무에 따라, 용도에 따라 칠하는 횟수가 다른데 열 번 이상 바르고 말리기를 반복해야 하니까 공력이 많이 들어갑니다. 물론 옻칠한다고 다 옻그릇이 되는 건 아니에요. 마르는 과정에서 흠이 생기면 상품으로서 가치가 없으니까 그런 것들은 누구 주지도 못하고 버리지도 못했지요.”
“옻칠장이들이 사라져가고 있어 아쉽다”는 그를 위로해주는 이는 아들 형준(45) 씨다. 10년 넘게 아버지와 함께 옻칠을 해온 그는 현재 몸이 좋지 않아 쉬는 상태. 김 씨는 아들과 함께 전시를 하려고 만든 도록을 보여주며 “힘을 합쳐 전시를 하고 싶었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하지 못해 아쉽다”면서 “아들과 함께 전시할 날이 오길 바란다”고 했다.
이런 그에게 부인 이소지(74) 씨와 함께 정부에서 매월 받는 기초연금 32만 원(부부 합산)은 ‘든든한 버팀목’이다. 기초연금을 얼마 받는지, 어떻게 쓰는지 모른다는 그가 부인을 불러와 자리를 내주자 이 씨는 “기초연금 덕에 공과금도 내고 병원도 갈 수 있어 좋다”면서 웃었다.
“내가 도와주지 못해 이 이가 명장이 못 된 건가 싶어요. 기초연금으로 살림 걱정을 줄였으니 이제는 이 이에게 아들과 함께하는 전시회를 열어주고 싶어요. 나라에서 노인들 생각해주는 것처럼 숨어있는 명장도 생각해주면 더욱 고맙지요.”
[위클리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