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미국 뉴욕에서는 제2회 한지 세계화 전략 국제 세미나 ‘천년 한지, 세계와 만나다’가 개최됐다. 이 자리에서 세계 각국의 서적복원가, 예술가, 소재디자이너 등 전문가들이 한지의 소재자원으로서의 가능성, 국제적 소비 확대방안 등을 논의했다. 특히 한지만이 지니는 가치와 예술성의 표현, 한지의 짜임과 질감 등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서양 지류문화재 보존처리 분야에 한지를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 등을 점검했다.
우리 정부는 전통문화기술의 창의 선진화 전략을 수립하고 국가 차원에서 새로운 출구를 마련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서울에서 한지의 미래 가치를 논하는 장으로서, 제1회 한지 세계화 전략 국제 세미나 ‘천년 한지, 세계와 만나다’를 마련한 것도 그래서다.
우리는 한지를 단순히 질기고 강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종이라는 수사로 설명하곤 한다. 한지는 우리나라 자생의 닥을 이용해 재래의 초지도구로 전통기법에 따라 한 장씩 손으로 떠서 만든 고유의 ‘수초지(手抄紙)’로서 우리 민족의 중요한 전승 유산이다. 우리 땅에서 자란 닥나무 속껍질을 물에 불려 찧어 질기고 긴 섬유를 얻은 다음 닥풀(황촉규라는 초본의 뿌리에서 얻은 점질물)을 풀어 통물을 만들고 대나무 발로 섬유를 떠 올려 물을 빼고 햇볕에 말린 얇은 판상 종이로, 만드는 과정 자체만으로도 우수하다.
하지만 이런 제조 과정과 배경만으로는 한지가 발전할 수 없다. 한지를 조명하는 행사가 잇따라 열리는 것은 한지 응용 분야에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열린 세미나에서 한지의 서화용지로서의 부활, 보수용지로서의 세계 시장 진출, 소재로서의 한지 활용 등을 논의하며 한지의 발전 가능성을 공유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지난해 12월 서울에서 제1회 한지 세계화 전략 국제 세미나 ‘천년 한지, 세계와 만나다’가 열렸다. |
뉴욕 한지 세계화 전략 세미나
한지의 발전 가능성 공유
발제자로 참여한 미국 해버퍼드대 미술학과장과 이탈리아 플로렌스 국립도서관 도서 보존 전문가, 프랑스 국립자료원 보존 전문가, 미국 의회도서관 고서 보존 전문가, 영국 테이트갤러리 보존 전문가, 일본 고치현 종이산업연구소장 등 전문가들은 ‘해외에서의 미술작품용으로서 한지의 접근, 해외 고문헌 및 명화 보수를 목적으로 한 보수용 한지의 사용’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며 한지의 미래 가치에 주목했다. 실제로 이 행사는 한지의 기록 영역, 예술·문화 영역에서의 역사를 재발견하고 한지의 세계화를 시도한 자리로 평가된다.
물론 현재도 한지를 활용한 작업은 다방면에서 진행되고 있다. 최근 한지가죽은 친환경 소재로서의 가치뿐 아니라 디자인 및 신산업 소재로서 국내외에서 관심을 받고 있다. 한지가죽이란 한지를 가죽 대용으로 만든 소재로, <인조실록>에 ‘종이옷은 가볍고 따뜻하고 얇고 부드럽지만 여러 겹이면 화살도 뚫지 못할 정도로 강하다’라고 기록돼 있을 만큼 조선시대에도 한지가죽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한지산업지원센터의 기획전에서 선보였던 조현진한지연구소의 한지가죽은 한지의 질적 우수성과 활용 가능성을 입증해 보인 대표적인 예다. 조현진한지연구소는 한지가죽에 과학기술, 디자인을 접목해 가볍고 질기게 특수보강 처리를 한 핸드백, 백팩, 지갑 등을 개발했다.
한지를 가죽 대용으로 만든 소재인 ‘한지가죽’은 친환경 소재로서 국내외에서 관심을 끌고 있다. |
한지가죽, 고급 의류 소재로 활용
한지 스피커 음악 애호가 큰 관심
이와 함께 한지는 친환경 생활용품으로 가공돼 인기를 끌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은 아티스트, 전통 한지 장인들과 함께 한지의 고유 특성에 현대의 미적 디자인을 더한 생활용품, 공예용품 등을 개발하는 협업의 장을 마련한 바 있다. 2015 프랑크푸르트 페이퍼 월드에는 이 협업의 결과물인 한지 트레이(접시), 한지 모듈 조명, 한지 보자기함 등을 출품해 세계인의 눈길을 끌었는데, 특히 한지에 옻을 반복해 칠한 ‘한지 트레이’의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한지는 문화상품뿐 아니라 산업 신소재로도 개발되고 있다. 한지를 얇게 잘라 꼬아 만든 한지사는 항균성, 소취성, 통풍성 등 한지의 재료적 특성을 이용한 고급 의류 소재로 거듭나고 있다. 이런 한지의 특성에 주목해 한지가 공기 필터, 자동차 필터, 에어백 등의 소재로 개발되기도 했다. 또한 한지의 고밀도, 흡음 특성을 이용해 스피커의 진동판 소재로 사용한 한지 스피커도 음악 애호가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한지는 로봇 분야에서도 신소재로 응용되고 있다. 한지를 구성하는 닥섬유의 셀룰로오스에 전극을 가하면 미세한 진동이 발생하는데, 이러한 원리를 이용해 한지를 탐사용, 군사 정찰용 로봇 제조에 이용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닥섬유의 높은 절대분자량과 중합도 특성 등을 이용해 여성용 위생용품, 고강도 안전용품 등을 만들기도 한다.
전통 한지를 제작하는 과정인 도침 공정(왼쪽)과 흘림뜨기(오른쪽). |
한지는 수천 년을 끄떡없이 견딜 수 있도록 백 번의 공정을 거쳐 만들어진 종이라는 뜻에서 백지(百紙)이면서 흐르는 맑은 물에 헹구고 우려내 티를 골라 닥나무 속껍질의 흰 섬유만으로 만든 순백의 종이라고 해서 백지(白紙)라고 불리기도 한다. 선조들이 전해주는 한지는 단순한 전통 문화유산이 아니라 창조적 전통 과학기술이다.
이제 우리는 이런 의미를 지닌 한지를 통해 우리 민족정신에 내재된 부드러움과 강인함의 조화, 매끄러움과 거침의 조화, 고요와 울림의 조화라는 감성 자산의 승화를 도모해야 한다. 문화기술을 혁신해 미래의 창의 자산으로 발돋움시켜야 한다. 정부 또한 제도적 틀을 재정비하고 통합 관리하고 자원화해 한지의 혁신성을 높이는 정책을 이끌어가야 한다. 세계기록유산으로 남아 있는 한지를 새로운 창조물로 이끌 시점은 바로 지금이다.
글, 사진 · 김형진(국민대 임산생명공학과 교수)
[위클리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