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오후(현지시간) 말레이시아 세렘반 파로이 투안쿠 압둘 라흐만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최종예선 시리아 대 대한민국 2차전. 시리아 골키퍼 아브라힘이 그라운드에 앉아 시간을 끌고 있다.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이겨도 비긴 듯했고 비겨도 진 듯했다.
한국 축구가 역대로 월드컵 본선행 최종 관문에서 이처럼 고개를 떨구는 묘한 무패로 출발한 것도 드물다. 그만큼 축구팬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준 불안한 시작이었다.
9월 뚜껑을 연 2018 국제축구연맹(FIFA)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A조에서 한국은 중국에 3-2로 진땀승을 거두고 시리아전에서는 ‘침대축구’의 덫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득점 없이 비겨 조 3위로 추락했다.
조3위 추락은 처음…10월 위기설 대두
본선 32강 체제가 도입된 1998년 월드컵부터 두 개조로 나뉘어 양 갈래로 본선행을 가린 이후 한국이 초반 두 경기를 치르고 조 3위까지 처진 것은 처음이다.
무엇보다 FIFA랭킹 48위의 한국이 약체로 평가되는 중국(78위), 시리아(105위)를 상대로 승점 4밖에 얻지 못해 상대적으로 2연승의 우즈베키스탄(55위), 1승1무의 이란(39위)과 본선행 가이드라인인 조 1,2위 경쟁에서 불리한 처지에 놓인 게 우려를 낳는 대목이다.
울리 슈틸리케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은 시리아전을 마치고 K리거 4명과 함께 귀국하면서 “승점 1을 얻은 게 아니라 승점 2를 잃었다고 표현하는 게 맞다”며 험난해진 레이스를 인정했다.
나머지 8경기를 무패로, 그것도 홈경기는 4전 전승을 거둬야 러시아에 안착할 수 있는 가시밭길로 내몰린 것이다.
경기 내용이 불안감을 키운다. 지난 2년 동안 ‘슈틸리케호’에 신뢰를 보냈던 팬들의 시선도 차갑게 돌려놓을 만했다.
나머지 8경기 무패·홈경기 4전 전승 거둬야
38년 동안 한국과 30번 맞붙어서 1승만을 건진 중국에 ‘공한증’을 강요할 만큼 압도적이지 못했다.
먼저 3골을 넣고도 70분이 지나자 급격한 체력 저하로 집중력이 떨어지며 2골 반격을 허용했으니. ‘축구굴기’를 외치는 중국의 자신감만 살려놓은 셈이다.
중국전에서 뼈아픈 실책이 겹치고 전방으로 향한 침투 패스가 7번밖에 안 나왔던 것으로 볼 때 단조로운 공격의 반대급부치곤 한 골차 승리는 행운이 아니었을까.
“최종예선에서 실수는 곧 패배”라며 선수들을 다잡은 슈틸리케는 시리아전에서 ‘직선 축구’를 타개책으로 내세웠다.
중국전처럼 횡패스와 백패스로 볼 점유율만 높이는 실속 없는 내용에 반전을 꾀하고자 했지만 여전히 공수 간격이 벌어진 채 밀집수비를 뚫어내지 못했다.
충돌만 하면 넘어져 교체해달라고 벤치에 사인을 내는 골키퍼와 번번이 이를 외면하고 시간 지연을 부추기는 시리아 감독이 합작한 침대축구에 짜증만 내다 빈손으로 돌아서야 했다.
슈틸리케호의 아킬레스건인 풀백도 적임자를 찾지 못해 매 경기 실험만 해오다 보니 상대 측면을 허무는 빠른 오버래핑이 실종됐다.
결국 시리아는 한국의 중원-전방 연결고리 차단에 집중하면서 날카로운 역습으로 한국 수문장 김승규의 세이브를 시험했다.
중추세력인 유럽파가 살아나지 못했던 게 치명적이다.
지동원·구자철·이청용…문제는 중원 유럽파 공간파괴 능력
중원의 핵 기성용이 여전히 무거운 몸 놀림 속에 공격 연결이 힘에 부쳤고 지동원 구자철 이청용도 좀처럼 활력을 찾지 못해 공간 파괴에 한계를 드러냈다.
중국전서 교체돼 나올 때 땅을 걷어차는 것으로 부진한 플레이에 대한 감정을 폭발해 비난받았던 손흥민의 공백이 아쉬웠을 정도다.
올림픽 와일드카드 차출에 소속팀 토트넘이 협조하는 대신 손흥민을 3,9월 A매치에서 일부 제외하는 ‘신사협정’이 부메랑이 된 꼴이다.
10월 위기설.
반환점도 돌기 전에 최대 고비를 맞았다. 슈틸리케호의 명운이 달려 있는 카타르, 이란과 10월 2연전에 대한 우려감이 몰고 온 한국축구의 난기류다.
수원서 FIFA 랭킹 80위 카타르를 꺾고 난 뒤 2무4패로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는 ‘원정팀의 무덤’ 테헤란에 들어가 이란을 제대로 공략해야 러시아행 정상궤도에 오를 수 있다.
카타르는 2연패로 조 최하위에 떨어져 있지만 막대한 투자를 한 2022년 월드컵 개최국으로서 자존심 회복을 위해 사생결단으로 나설 것이다.
더욱이 두 팀은 4년 전 최종예선서 침대축구로 한국을 괴롭혔던 중동팀들이 아니던가.
당시 4차전서 한국은 후반 추가시간 5분 동안 이란 골키퍼의 시간 지연에 발만 동동 구르다 끝내 한 골 차로 분패했다.
5차전서는 후반 동점골을 내준 뒤 카타르의 침대축구에 조바심을 내다 후반 전광판 시계가 멎은 뒤 6분 만에 손흥민이 가까스로 결승골을 넣어 진땀승을 거뒀다.
월드컵 최종예선은 상대를 잘 아는 지역간 전쟁이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울리 슈틸리케 감독. 앞으로 남은 카타르와 이란전을 대비해 이른바 ‘침대축구’를 허무는 다양한 공략법이 필요하다.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슈틸리케는 시리아전 뒤 공식 기자회견에서 “시간만 계속 끌고 축구다운 축구를 안 하는 팀이 월드컵 본선에 나가는 것을 원하는가”라고 반문했지만 시리아 감독은 “시간 지연도 강팀을 상대하는 전술의 일부”라고 맞받아쳤다.
침대축구 허무는 다양한 공략법 서둘러 내놓아야
유럽 예선서도 약팀이 ‘텐백’을 쓴다든지, 수비라인에 ‘버스’를 세우는 극단적인 수비로 ‘안티풋볼’이라는 비난을 부르지만 홈 앤드 어웨이로 벌어지는 리그 방식의 지역예선에서는 강자를 상대로 승점 1을 목표로 하는 극단적인 전략은 약자의 생존법이다.
2차 예선서 수준이 낮은 아시아팀들을 상대로 8연승에 무실점 행진을 이어온 슈틸리케가 최종예선 들어 쓴 오답노트는 벌써 두꺼워졌으리라.
시리아전에서 지불한 수업료로 침대축구를 허무는 다양한 공략법을 서둘러 내놓아야 러시아 가는 길에서 밀려나지 않게 된다.
B조의 일본은 UAE와 1차전서 역전패한 뒤 첫 판에서 진 팀이 본선에 오른 경우는 없다는 ‘0% 위기론’ 속에 태국전에서 첫 승을 신고했다.
하지만 14명이나 되는 유럽파를 보유하고도 압도적인 경기력을 끌어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바히드 할릴호지치 감독의 경질설이 대두되고 있는 게 최종예선 무대의 냉엄한 현실이다.
그래서 10월은 슈틸리케호에 ‘골든타임’이다.
슈틸리케도 10월에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하면 입지가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다.
21세기 들어 2년 넘게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사령탑은 2010년 남아공 월드컵서 첫 원정 16강을 달성한 허정무 감독과 슈틸리케뿐이다.
지난 2009년 6월 17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10 남아공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B조 8차전 한국 대 이란의 경기에서 후반 한국 박지성이 동점골을 넣은 뒤 동료들과 기뻐하고 있다.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8년 전 최종예선 첫 경기에서 북한과 비긴 뒤 유럽파 박지성에게 주장을 맡겨 팀의 새로운 구심점으로 삼은 뒤 과감한 세대교체를 통해 위기를 정면 돌파한 허 감독의 성공은 슈틸리케에게는 좋은 반전 메시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슈틸리케로서는 9월 2연전에서 3명을 비워둬 논란을 부른 ‘엔트리 20명 축소’부터 정상으로 돌려놓아야 팀의 동력을 되찾을 수 있다.
원톱 자원도 모자란 터에 시리아전처럼 잔디가 안 좋은 환경에서 고공전의 유력한 공격카드인 석현준을 터키의 새로운 팀 적응을 위해 제외한 ‘배려’는 더 이상 미덕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2차 예선 때까지는 누구든 소속팀에서 꾸준히 뛰며 경쟁력을 보여주는 선수에겐 해외든 국내든 가리지 않고 문호를 개방하면서 평등주의 선발원칙을 지켜온 게 팀 내에 긴장을 주고 경쟁을 유도하는 활력소가 됐다.
하지만 정작 경기에 뛰지 못하는 선수들의 소외감을 걱정해 지난 6월 유럽원정 멤버를 20명으로 축소하는 등 지나치게 배려를 앞세우다보니 ‘대표 발탁은 곧 출전’이라는 어긋난 등식이 주전 경쟁을 느슨하게 만든 게 아닐까. 경쟁 원칙이 회복돼야 1년 장기 레이스를 버틸 힘도 생긴다.
‘지더라도 제대로 지면서 배우자’며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유럽원정 평가전에서 테스트한 비유럽파들을 활용하는 ‘플랜B’도 그런 경쟁 원칙에 따라 제대로 마련되는지도 지켜볼 대목이다.
더 늦기 전에 혼란스런 원칙을 바로 세우는 동시에 유럽파가 살아나야 한국 축구가 활로를 찾을 수 있다.
유럽파는 한국의 최대 강점이다. 전력의 구심점이다. 슈틸리케호는 월드컵 최종예선을 출발할 때의 역대 한국 대표팀 중에서 해외파가 17명으로 가장 많다. 유럽파가 6명이 주류이고, 중국파와 일본파는 5명씩 포진하고 중동파도 1명이다.
A조에선 최다 해외파를 보유한 한국이다. 카타르는 스페인 히혼에서 뛰는 아크람 아피프가 유일한 해외파다. 이란은 해외파 11명 중 유럽서 뛰는 멤버가 8명인데 러시아, 네덜란드, 그리스, 포르투갈 클럽 소속으로 빅리거는 없다. 우즈베키스탄은 러시아파 2명, 중국은 네덜란드파 1명이 있을 뿐이다.
슈틸리케호 유럽파 중에서 구자철만이 올 시즌 주전으로 활약하고 있고 나머지 5명은 모두 생존경쟁을 벌이고 있다. 유럽파는 소속팀에서 저마다 출전시간을 더욱 늘려야 대표팀 경쟁력을 높이는 중심축이 될 수 있다.
물론 모두 주전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로테이션 멤버라도 꾸준히 경기에 출전하는 게 중요하다.
지난 시즌 막판 감독과 갈등으로 출전기회를 못 잡던 이청용이 이번 시즌 연속 출전으로 크리스털 팰리스 ‘8월의 선수’ 후보에 오른 게 그런 긍정적인 신호다.
중원의 열쇠를 쥐고 있는 주장 기성용도 예전의 폼을 되찾아 ‘스완지의 키’로 부활할 수 있도록 더욱 집중해야 대표팀 허리도 살아날 수 있다.
분데스리가 복귀설 끝에 잔류하게 된 손흥민은 프리미어리그, 챔피언스리그, 컵대회 등을 가리지 않고 출전시간을 늘려 공격 감각을 끌어올리는 게 중요하다.
프리미어리거는 아시아팀 선수들에는 경외의 대상이다. 소속팀에서 꾸준히 출전해야 대표팀에서도 ‘경기체력’을 발휘해 상대를 압도할 수 있다. 단순히 이름값이 아니라 피치에서 부딪혀보면 ‘확실히 클래스가 다르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도록 강해져야 하는 것이다.
박지성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어디 풀타임 주전이었던가. 대회 성격에 따라, 상대에 따라 로테이션 멤버로 희생하는 ‘헌신의 아이콘’이었다.
단 몇 분을 뛰든 언제나 100%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경기체력을 준비해 맨유의 파랑새가 됐고 대표팀에서도 그 열정 바이러스를 퍼뜨렸다.
좌충우돌 정면돌파 ‘일당백’ 박지성 처럼 뛰어달라
박지성은 아시아팀 수비수들의 수많은 거친 태클도 당당히 이겨내면서 좌충우돌 공간을 정면 돌파하고 직선 패스도 연결해냈다.
상대의 집중마크가 몰릴수록 동료에게 더 많은 찬스를 열어주는 일당백의 활약은 ‘허정무호’의 원정 월드컵 첫 16강 약진까지 이끌었다.
손흥민도 경기체력이 좋을 때 4년 전 카타르전 후반 추가시간을 비롯해 절체절명의 순간 결정타를 날리지 않았던가.
소속팀에서 더욱 절실하게 뛰어 강인해져야 침대축구도 뚫고 10월 위기설도 극복할 수 있는 유럽파들이다. 모두들 박지성처럼만 뛰어준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 김한석 스포츠기자
스포츠서울에서 체육부 기자, 체육부장을 거쳐 편집국장을 지냈다. 스포츠Q 창간멤버로 스포츠저널 데스크를 맡고 있다. 전 대한체육회 홍보위원이었으며 FIFA-발롱도르 ‘올해의 선수’ 선정위원으로 활동했다. 제21회 이길용 체육기자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