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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시간 15분 전

2018.05.30 한기봉 언론중재위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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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지인과 점심 약속이 있었다. 나는 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편이지만 이날따라 차가 필요해서 차를 끌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남산터널에서 꽉 막혀 족히 15분은 늦을 거 같았다. 문자를 보냈다. 바로 답이 왔다. “저도 그 정도 늦을 거 같네요. 천천히 조심해서 오세요.” 나중에 종업원을 통해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사실 이미 도착해 있었다. 그것도 15분 전에. 소소한 일이지만 상대를 배려하는 그 마음씀씀이에 나는 적잖이 감동을 먹었다.

이날은 예외였지만 나는 확실히 지키려는 생활습관을 하나 갖고 있다. 젊은 시절에는 쉽지 않았지만 나이를 먹어가며 더 굳어지게 됐다. 바로 약속 시간 15분 전에 도착해서 기다리는 거다. 사전에 앱을 통해 대중교통편과 걸리는 시간을 확인한다. 요즘의 길찾기 앱은 걷는 시간, 버스나 지하철이 도착하고 내리는 시간까지 정확히 말해주니 실수할 일이 거의 없다. 예식장이나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갈 때는 시간을 더 앞당긴다. 그래야 혼주하고 덕담을 나눌 시간이 생기고, 스테이크 먹는 테이블도 차지할 수가 있고, 그날의 참석자들과 골고루 여유 있게 인사를 나눌 수가 있다.

이 바쁜 세상에 10분 전도 아니고 15분 전은 좀 심한 거 아니냐는 사람도 있다. 아니다. 불과 5분 차이지만 그 여유는 한 시간 정도의 효과가 있다. 정말 마음이 느긋해진다. 덩달아 기분도 좋아진다. 좋은 자리를 선택할 수 있고, 메뉴판을 미리 보고 음식을 작정해놓을 수 있고, 미리 화장실에 다녀올 수도 있고, 옷매무새를 고칠 수도 있다. 반대로 약속 시간에 늦을까봐 헐레벌떡 달려오면 뭐든 꼭 하나 실수하는 일이 생긴다.

무엇보다 좋은 점은 만날 상대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보는 일이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인연으로 만났는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그리고 그의 신상에 관한 자잘한 기억들을 되살려본다. 지위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간 무슨 변화가 있었는지 검색도 해본다. 그 기억들을 꺼내면 상대는 “아, 그것도 기억하고 계시냐”며 당연히 좋아한다. 친밀감이 더 든다. 나눌 말에 대해서도 미리 가다듬는다. 첫 인사를 어떻게 할까에서부터 내 근황 설명, 서로의 하는 일, 만남의 목적에 대한 것에 이르기까지 머릿속에 그려본다.

기다리는 시간 15분은 결국 그날의 약속을, 인간관계를 더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다. 스스로도 그 만남에 대해 진정성을 갖게 된다. 특별한 용건이 있는 만남이라면 일도 잘 풀린다. 상대는 먼저 나와 있는 나에게 미안해하면서 기대하지 않았던 것까지 내놓을 수도 있다. 약속 상대가 후배이거나 부하, 또는 나에게 부탁할 용건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 깊은 인상을 받을 것이다. 저절로 점수를 따는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에 대해 이렇게 전파할 것이다. “그 분은 참 매너가 좋고 여유가 있어요.”

휴대폰이 없던 시절, 기다린다는 건 지루했고 불안했다.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그대 올 때를 기다려 봐도, 8분이 지나고 9분이 오는데, 1분만 더 지나면 가버릴까, 불덩이 같은 가슴은 엽차 한 잔에 식혀 봐도 속은 탄다(펄시스터즈, 김추자 노래 ‘커피 한 잔’). 휴대폰이 있었다면  ‘애수’의 비비안 리는 워털루 브리지에서 몸을 던지지 않았을 것이다. 휴대폰은 그런 대책 없는 기다림과 오해, 궁금함과 그리움을 앗아갔지만, 대신 지각과 약속불이행에 대한 변명과 거짓도 통하지 않게 만들었다. 문명은 약속시간을 더 엄격하게 옥죄었다.

‘약속을 지키는 최선의 방법은 약속을 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격언도 있지만 약속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첫 번째 신뢰를 가늠한다. 슈퍼리치들은 어떤 약속이든 약속 시간 15분 전에 도착한다는 조사도 있었다. 약속시간에 대한 태도를 보면 대체로 습관성이다. 주변 친구들을 봐도 늦는 놈은 늘 늦는데, 그런 친구들의 공통점은 짜안하며 거창하게 입장한다는 것이다. (썸 타는 관계에서 여자가 약속 시간에 늦게 나타나는 것에 대해선 다양한 분석이 있으니 예외로 하겠다.)

우리는 평생 수많은 약속 속에서 살아간다. 스스로에 대한 다짐 같은 약속이나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약속, 정치인의 공약 같은 거창한 걸 말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사람끼리 얼굴을 마주하는 면대면 약속 말이다. 나는 겪어봐서 잘 안다. 15분 앞서 상대를 기다려봐라. 작은 행복을 느낄 것이다.

기다린다는 건 여우가 어린왕자에게 말한 것처럼 마음치장을 하는 것이다. 상대가 소중해지는 건 그 시간에 비례한다.
“언제나 같은 시각에 오는 게 더 좋아. 이를테면,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갈수록 난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그러다 네 시가 되면 나는 마음이 들떠서 어쩔 줄 몰라 할 거야. 하지만 네가 아무 때나 온다면 난 언제 마음의 치장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잖아. 그래서 저마다의 의식이 필요해. 네 장미꽃이 그토록 소중하게 된 건 네가 그 꽃을 위해서 소비한 시간 때문이야.”

한기봉

◆ 한기봉 언론중재위원/칼럼니스트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부국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글쓰기와 한국 언론에 대해 강의했다. 언론보도로 피해를 본 사람과 언론사 간 분쟁을 조정하는 언론중재위원이다. hkb8210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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