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정부가 용산 시대를 열었다. 용산은 어떤 도시일까?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와 <나의 아저씨> 등 K-드라마와 영화 속 용산을 둘러봤다. 과거와 현대를 품고 있는 용산이다. 지면을 통해 용산을 ‘재발견’하는 작은 기쁨을 느껴보길.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
이태원
“해외여행 온 듯 착각하게 하는 예쁜 건물들”, “세계 각국 다양한 인종”, “세계를 압축해놓은 듯한 거리”, “자유로운 사람들”.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 ‘오수아’(권나라)의 대사를 빌리자면 이태원은 대략 이런 세계다. 이태원은 낮보다 밤이 화려하다. 수많은 술집과 수많은 사람이 있다. ‘박새로이’(박서준)와 ‘조이서’(김다미), 오수아가 밤에 뛰어 달리던 장면에서도 느낄 수 있다. 이 장면은 이태원 최고의 번화가로 통하는 ‘세계음식거리’ 해밀톤호텔 뒷골목에서 촬영했다.
웹툰 원작을 바탕으로 만든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는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 국가 넷플릭스 서비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드라마로 꼽힐 만큼 한류 확산에 크게 일조했다. 7월에는 <이태원 클라쓰>의 일본 리메이크 드라마 <롯폰기 클라쓰>가 일본 대표 지상파 방송사 TV아사히에서 첫 방송된다.
<이태원 클라쓰>는 이태원 곳곳을 무대로 한다. 지하철 녹사평역과 이태원 거리를 이어주는 육교는 <이태원 클라쓰>뿐만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의 단골 촬영 명소로 유명하다. 육교에 올라서면 해방촌과 이태원을 가로질러 남산으로 이어지는 녹사평대로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녹사평대로의 끝에는 남산과 남산서울타워가 서 있어 이곳을 배경으로 극적인 인생사진을 남길 수도 있다. 드라마의 인기를 타고 이태원을 찾는 사람들이 꼭 들르는 명소로 인기가 높다. 특히 야경이 아름다워 밤에 방문하면 더 색다른 서울의 풍경을 즐길 수 있다.
육교 옆 언덕길. 드라마에서 새로이와 친구들이 거닐던 골목 장면 대부분을 여기서 촬영했다. 그 길모퉁이에 새로이가 차린 술집 ‘단밤’이 나온다. 실내 포차 단밤은 녹사평역 앞 언덕의 가게를 빌려 촬영했다. 이태원 중심가로 연결되는 길목에 있는 만큼 이태원의 정취를 느끼기에도 좋다.
조이서가 잠든 박새로이에게 입맞춤해 시청자의 마음을 심쿵하게 했던 장면은 경리단길 중턱의 칵테일 바에서 촬영했다. 남산서울타워가 내려다보이는 시원한 경치 덕에 명소가 된 곳. 경리단길은 비좁은 비탈길이지만 서울 도심을 내려다보는 전망 좋은 가게가 많다.
경리단길에서 출발해 이태원어린이공원, 녹사평역 언덕길, 세계음식거리, 우사단로로 걷기를 추천한다. 오르막길을 피할 수 있다. 1시간이면 충분히 돌아본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
백빈건널목
가벼운 포옹을 한 뒤 돌아서서 철길을 건너려는 ‘동훈’(이선균)에게 ‘지안’(이지은)은 주먹을 쥔 왼팔을 들어 보이며 나직이 말한다. “파이팅!”
2018년에 방영된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한 장면이다. 동훈이 고단한 하루를 끝내고 집으로 발길을 돌릴 때면 지안이 나타나 작은 위로를 건네던 장면을 찍은 곳은 놀랍게도 서울 한복판이다.
“땡땡땡.”
용산역 1번 출구로 나와 한강 방향으로 10여 분을 걸으니 귀를 먹먹하게 울리는 경적 소리와 함께 기차가 나타났다. 차단기가 내려가고 철도 건널목 관리원들이 주위를 살피며 차량과 보행자를 통제한다.
도심에서는 보기 드물게 기찻길과 도로가 맞닿아 있는 이곳은 ‘백빈건널목’이다. 조선시대 백씨 성을 가진 빈(嬪·내명부 정일품 품계)이 나들이하던 길에서 이름을 땄다. 지금은 수시로 울리는 건널목 경고음으로 붙여진 ‘땡땡거리’라는 별칭이 더 유명하다. 바로 이 건널목에서 <나의 아저씨>를 촬영했다.
기찻길 주변에는 세월의 흔적이 역력하다. 지상 1, 2층의 낮은 건물들뿐이다. 역 주변에 병풍처럼 우뚝 솟은 수십 층짜리 주상복합건물들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다.
그중 건널목 바로 옆 ‘용산방앗간’은 땡땡거리의 상징물(랜드마크)이다. 녹슨 붉은 간판이 세월의 흐름을 짐작하게 한다. 시골 동네에서 봤을 법한 간판들도 짧은 구간에 다닥다닥 붙어 있다. 1960∼1970년대로 시간 여행을 온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서울 한복판에 아직도 이런 곳이 있나 싶을 정도다.
이런 아늑한 풍경에 땡땡거리는 드라마 촬영지로도 익히 유명하다. 대표적인 작품이 <나의 아저씨>다. 배우 라미란·서현진 주연의 <블랙독>(2019. 12.~2020. 2.) 역시 이곳의 한 국숫집이 극 중 배경으로 등장했다. 그 밖에도 <펀치>(2014. 12.~2015. 2.), <시그널>(2016), <경찰수업>(2021)이 각각 이곳에서 촬영됐다.
한겨울 같은 혹독한 세상 속에 맨살 드러낸 단화 하나 신고 내던져져 이리 뛰고 저리 뛰는 힘겨운 청춘 지안과 고단하게 하루하루를 버티며 무심한 듯 그 길을 오갔던 아저씨 동훈. 지안과 동훈이 날마다 건너오고 건너갔던 그 길에서 오늘의 고단함을 떨쳐본다.
★드라마 <밤이면 밤마다>
국립중앙박물관
폐관 이후 박물관. 복면을 쓴 무리가 옥상 난간을 타고 빠르게 움직인다. 환기구를 열고 박물관 안으로 숨어드는 복면들. 보안장치를 풀고 금관을 훔치려는 순간 보안 시스템이 작동한다. 경보음이 울리고 광역수사대 형사들과 문화재청 단속반원들이 그들을 추격한다. 추격전 끝에 복면 무리를 검거한다. 이것은 모두 모의 상황이다. 박물관 보안실장이 안정성을 자랑하려는 순간, 문화재청 단속반 요원 ‘허초희’(김선아)가 유유히 밧줄을 타고 내려온다. 배우 김선아·이동건 주연의 드라마 <밤이면 밤마다>(2008)의 첫 회, 첫 장면이다.
문화재 보호라는 다소 생소한 주제를 전면에 내세운 이 드라마의 주 배경이 국립중앙박물관이다. 극 중 김선아가 활동하는 복도, 작업실, 사무실 입구 등 평소 박물관 관람 시에는 볼 수 없던 장소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지하철 4호선 이촌역에 위치한 국립중앙박물관은 13만여 점의 소장 유물 중 4500점의 유물을 18개의 상설 전시실과 2개의 기획 전시실에 시대별·종류별로 전시하고 있다. 소장 유물은 우리나라의 역사·고고학·미술사·민속 등에 관한 자료가 주류를 이루고 그 밖에도 일제강점기에 평양 지방에서 발굴, 수습된 낙랑 유물과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수집된 서역 유물이 소장돼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2005년, 현재의 용산으로 신축 이전했다. 1909년 창경궁 제실박물관의 개관으로 시작된 국립중앙박물관의 기원을 생각하면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명실공히 한국의 문화를 대표하는 공간이다.
★영화 <파괴된 사나이>, <초능력자>, <올드보이>
용산 전자상가
우민호 감독의 영화 <파괴된 사나이>(2010)의 한 장면. 조그만 작업실에서 일하는 기술자(오광록)가 GPS(위성위치확인시스템)에 자동 저장된 정보를 찾아내 ‘주영수’(김명민)가 범인을 추적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곳은 전자랜드 건물에 있는 오디오 전문점이다.
용산전자상가에는 이런 사무실 겸 작업실이 층마다 빼곡히 들어차 있다. 용산전자상가의 이런 분위기는 김민석 감독의 영화 <초능력자>(2010)에서도 잘 보인다. ‘초인’(강동원)을 추적하는 ‘규남’(고수)의 친구들이 사제 조명탄을 만들어 공격하는 장면, 높지 않은 허름한 건물로 둘러싸인 곳이 바로 원효전자상가 4동과 6동 사이 공간이다.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의 쾌거를 이룬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보이>(2003)의 첫 촬영을 한 곳도 바로 용산전자상가다. ‘오대수’(최민식)와 그의 어린 연인 ‘미도’(강혜정)가 함께 등장했던 장면. 오대수가 자신의 몸 구석구석에 박혀 있는 도청기를 제거하기 위해 상가를 찾아 “도청당하고 있습니다. 검색을 부탁합니다”라고 쓰인 종이쪽지를 카메라 앞에 들이댄다. 대사 없는 눈빛과 표정 연기만으로도 영락없이 억울하게 갇힌 오대수의 분노와 회한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코리아’라는 이름을 세계에 널리 알린 일등 공신으로 전자산업을 빼놓을 수 없다. 우리나라의 전자산업을 대표하는 곳이 바로 용산전자상가다. 지금은 그 위용이 많이 꺾이기는 했지만 전자·전기제품에 관한 한 용산전자상가에 가면 무엇이든 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