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무역학과 졸업생들이 이 나라 경제를 책임질 것이다!”
나는 81학번 무역학과 졸업생이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 ‘무역론’을 담당하던 교수님이 한 말이다. 대학 졸업 후 나는 전공과는 다른 길을 갔지만 절친했던 학과 친구는 당시 종합무역상사(무역회사)에 입사했다. 친구는 입사하자마자 서류가방에 상품 카탈로그를 담아 세계 곳곳을 누비며 무역 최일선에서 뛰었다.
친구가 처음 바이어(무역맨)로 발을 디딘 곳은 아프리카다. 당시 아프리카는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친구는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가봉 등에서 한국 전자제품을 파는데 청춘을 바쳤다. 말라리아, 황열 등 풍토병에 시달리면서도 한국산 제품을 파는데 땀과 열정을 쏟아부은 덕분에 아프리카에 한국산 전자제품의 우수성을 알리는데 크게 기여했다.
지난 2010년에는 중국 상해 지점장으로 나가 중국 시장을 개척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지만 중국의 까다로운 수입 절차와 높은 관세벽에 부딪치며 좌절도 많이 했다. 그리고 2016년 젊은 무역맨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현역에서 은퇴했다.
1964년 제1회 수출의 날 기념식.(출처=국가기록원) |
우리나라 국토 면적은 10만363㎢로 세계 109위다. 인구는 5천1백만여 명으로 세계 27위다. 하지만 수출액은 지난해 기준 5739억 달러(약 645조 원)로 세계 6위다. 우리나라의 올해 무역액은 11월 16일 기준으로 잠정 집계한 결과 지난해에 이어 1조 달러를 돌파했다. 세계 8번째 쾌거다. 지난해 무역액 1조 달러 클럽에 가입한 국가는 미국, 중국, 독일, 일본,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한국 등 8개국 뿐이다.
좁은 면적에 부존자원도 없는 우리나라가 어떻게 이런 쾌거를 이룰 수 있었을까? 지난 11월 28일, 식품의약품안전처의 화장품 정책간담회에서 참석해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이날 간담회에는 아모레퍼시픽 등 15개 화장품 기업이 참가했다. 나는 우리나라 화장품의 대부분을 대기업에서 수출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올해 10월 현재 우리나라 화장품 수출은 53억 달러다. 최근 5년 간 연평균 14%의 고성장을 했는데, 이런 성장은 대기업 역할이 컸지만 그 중심에 중소기업이 있었다. 한국 화장품 수출의 80%를 중소기업이 담당하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 화장품 정책간담회에서 세계 25개국 190개 스토어에 화장품을 수출하는 팜스킨 곽태일 대표가 성공사례를 발표하고 있다. |
이날 혁신성장 사례발표에서 청년기업 팜스킨(Farmskin) 곽태일 대표의 발표를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 팜스킨은 우리나라에서 자원화되지 못하고 버려지는 국내 초유를 이용해 스킨 화장품을 만들어 수출하는 신생 기업이다.
곽 대표는 전 세계를 다니며 “2분만 시간을 내달라!”고 매달려 미국의 월마트 등 25개국 190개 스토어에 수출 계약을 하는 등 2019년에 약 200억 원의 수출을 예상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가 무역 1조 달러 클럽에 가입한 것은 대기업 역할이 컸지만, 내 친구같은 대기업 무역맨들은 물론 팜스킨처럼 중소기업 바이어들이 열정과 도전 정신으로 세계를 누빈 덕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은 지난 2015~2016년 무역액 1조 달러 클럽을 이탈한 이후 작년에 이어 2년 연속 재진입에 성공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 무역은 세계적인 보호무역주의 벽에 부딪치고 있다. 게다가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으로 잘못하면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게 생겼다.
2017년 기준 교역 상위 9개국.(2018년 4월 발표자료 출처=세계무역기구) |
WTO(세계무역기구) 월간 상품수출 통계에 따르면 올해 우리나라의 1~8월 누적 수출액은 3397억 달러로 세계 6위다. 수출액이 많은 나라는 중국으로 1조6402억 달러다. 이어 미국(1조1028억 달러), 독일(1조565억 달러), 일본(4905억 달러), 네덜란드(4775억 달러)가 뒤를 이었다. 하지만 최근 미국, 중국의 무역분쟁으로 수출 전선이 어려워졌다.
엊그제 친구를 만나 술 한 잔을 하면서 무역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친구는 지금의 무역 상황이 자신이 세계를 누비던 때와는 완전히 다르다고 했다. 국제무역의 불확실성과 각 국의 보호무역주의로 우리 수출이 무역 1조 달러 클럽을 앞으로도 계속 유지할 지는 의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가장 필요한 것이 시장의 다변화라는 것이다.
나는 친구에게 “시장 다변화를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친구는 “중국과 미국 시장은 이미 포화상태기 때문에 신(新)시장을 개척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신시장이 바로 13억 인구(세계 2위)를 자랑하는 인도라고 한다. 인도가 포스트 차이나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듣고 보니 나도 친구의 말에 고개를 끄떡일 수밖에 없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인도 국빈방문 중 노이다 공단에서 개최된 삼성전자 신공장 준공식에 참석해 공장을 둘러보고 있다.(출처=청와대) |
친구 얘기를 들으니 지난해 11월 한-아세안 정상회의 때 문재인 대통령이 발표한 ‘신(新)남방정책’이 생각났다. 신남방정책은 아세안 국가들과의 협력 수준을 높여 미국·중국·일본·러시아 등 주변 4강국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것이 핵심이다. 특히 중국 중심의 교역에서 벗어나 시장을 다변화하는 등 한반도 경제 영역을 확장하고, 안보 차원에서는 북한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아세안과의 북핵 공조와 협력을 이끈다는 구상이다.
지난해 12월 제54회 수출의 날 기념식에서 문 대통령은 “신북방정책과 신남방정책의 성공도 결국 무역인 여러분들의 손에 달려있다”며 “무역 1조 달러를 넘어 무역 2조 달러 시대를 향해 꿈을 키우고 이뤄나가자 ”고 강조했다. 또 지난 11월 아세안과 APEC 순방을 마친 후 “신남방정책이 경제협력 확대와 수출시장 다변화라는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성과를 내는데 최선을 다해달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신남방정책으로 한국 무역이 다시 한 번 도약하길 기대한다.(출처=뉴스1) |
신남방정책은 1년 만에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 지난 1년간 신남방정책의 구체화를 위해 문 대통령은 베트남, 싱가포르, 인도를 순방했고 그 결과 2018년 한-아세안 교역액은 1600억 달러를 상회할 전망이라고 한다. 아세안 시장이 무역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신남방정책의 거점으로 인도를 선택하고, 문 대통령은 인도를 방문할 때 정상회담을 통해 2030년까지 양국 교역액을 현재의 2.5배인 500억 달러로 늘리기로 합의하는 등 양국 간 경제교류가 탄력을 받고 있다. 친구가 얘기했듯이 미국, 중국 등 위주의 수출시장 다변화를 위해 신남방정책으로 아세안 국가들은 우리 무역이 다시 한 번 도약을 할 수 있는 신천지로 대두되고 있다.
12월 5일은 55번째 무역의 날이다. 세계를 누비며 한국 상품을 팔던 내 친구가 은퇴했지만 앞서 소개한 팜스킨 곽태일 대표처럼 후배 무역맨들이 지금도 세계 시장을 누비고 있다. 그 후배들의 땀과 열정이 헛되지 않도록 정부가 추진하는 신남방정책이 결실을 맺어 한국 무역이 다시 한 번 힘차게 도약하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