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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독립운동가 후손으로 산다는 것은~

독립운동가 후손 재일교포 3세 이순애 씨 인터뷰

2019.08.15 정책기자 진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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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인 올해, 참 소중한 인연을 만났다. 올 봄 3.1운동을 주제로 한 음악 공연을 보러 갔을 때였다. 무대 위 대한독립만세여섯 글자의 외침이 마음을 쿵쿵 울려대던 순간이었다. 옆 자리에 앉은 여자 관객 한 분이 조용히 눈물을 훔치고 계셨다. 공연 내내 눈물을 닦는 그의 손동작은 쉴 틈이 없었다.  

공연을 마치고 조심스레 인사를 건넸다. 뜻밖에 그는 독립운동에 참가했던 외증조할아버지를 둔 재일교포 3세 이순애 씨였다. 일본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는 그는 3년 전부터 자신의 뿌리를 찾아 한국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재일교포 3세인 이순애 씨의 외증조할아버지는 3.1운동 때 독립운동을 한 강표인 선생이다.
재일교포 3세인 이순애 씨의 외증조할아버지는 3.1운동 때 독립운동을 한 강표인 선생이다.


그의 외증조할아버지는 강표인 선생이다. 
진주농업학교 재학 시절, 3.1운동에 참가했다가 투옥됐다. 출소 후에도 할아버지를 향한 일제의 감시는 더 심해졌다. 삼엄한 감시에 할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어린 자녀와 부인과 함께 일본행을 감행했다.  

이순애 씨는 일본에서 할아버지의 생활은 구사일생의 연속이었어요. 관동대지진 때에 겨우 살아남으셨는데 조선인이라고 심문을 많이 받으셨다고 해요. 폭격 때에도 운 좋게 살아남았지만 일본인들의 차별이 심해 입에 겨우 풀칠하는 것도 어려웠어요라며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순애 씨가 일본에서 태어난 것도, 일본에서 여전히 한국 이름을 갖고 재일교포 3세로 살아가게 된 것도 모두 할아버지의 영향이다. “할아버지는 비록 일본에 살더라도 민족성 하나만은 갖고 살아야 한다며 우리나라 이름과 한국말을 계속 쓰게 하셨어요. ‘왜놈도 아닌데 유카타 같은 건 입지마라고 하셨대요.” 

이순애 씨 외할머니의 결혼식. 일본에서 치러진 결혼식이지만 신랑은 사모관대를 신부는 족두리에 연지곤지를 찍은 전통복식 차림이다.
이순애 씨 외할머니의 결혼식. 일본에서 치러진 결혼식이지만 신랑은 사모관대를, 신부는 족두리에 연지곤지를 찍은 전통복식 차림이다.


당신 딸에게 한시도 조선인임을 잊지 말라 했던 외증조할아버지의 소신은 할머니 결혼식 사진에도 담겨있다
. 일본에서 치러진 결혼식, 이순애 씨의 할머니는 곱게 연지곤지를 찍고 족두리를 쓴 조선 새색시의 모습이다. 외증조할아버지의 모습이 담겨있는 유일한 사진에서조차 할아버지는 뼛속 깊이 우리나라 사람이었다.    

죽어서도 고향의 흙이 되겠다던 할아버지는 광복 이후 고향인 남해로 돌아가 그곳에서 눈을 감으셨다. 광복 이후 한국에서 표창장이 수여되었다고 하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아쉽게도 유품은 남아있지 않았다.  

재일교포 3세로 여전히 한국 이름을 갖고 일본에서 살고 있는 이순애 씨! 그의 삶도 녹록지 않았다. “어릴 때는 싸움도 많이 했어요.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왜 일본에 사냐는 얘기는 숱하게 들었죠. 취업할 때도 학교를 진학할 때에도 한국 사람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많이 받았어요.”

이순애 씨의 외증조할아버지 강표인 선생은 진주농업학교 재학시절 3.1운동에 참여해 옥고를 치렀다.
이순애 씨의 외증조할아버지 강표인 선생은 진주농업학교 재학시절 3.1운동에 참여해 옥고를 치렀다.

어릴 때 인상 깊은 일화가 있어요. 친구가 일본인 동급생과 싸움이 붙었는데 너 여기에서 기다려그러더니 집으로 가는 거예요. 한복을 입고 돌아온 그 친구는 일본인 친구와 치고받고 한바탕 싸웠죠. 그 친구에게는 한복이 전투복과 같은 존재였던 것 같아요.”

차별 받는 일상이었지만 친구들과 당당하게 살자. 한국말을 하자고 약속을 했다. 지하철에서 한국말 대화를 들은 일본 사람들이 일부러 부딪쳐오는 일도 다반사였다. 자전거를 타고 가면 자전거 바퀴에 우산을 들이밀어 넘어뜨리던 동급생도 있었다.  

재일교포 2세인 어머니가 겪은 차별은 생활이 힘들 정도로 더 어려운 것이었죠. 빵집을 열면 조센징 빵집이라고 사람들이 안 오고, 쓰레기를 가게 앞에 두고 가는 일이 허다했어요. 그래도 세월이 지나며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해 어머니 때보다는 제 삶이 더 수월해졌죠.”

한국인 유학생 제자들과 함께.
한국인 유학생 제자들과 함께.


그의 학교에는 한국인 유학생이 여럿 있다고 한다
. 최근 한일관계가 악화되며 불미스런 일이 있기도 했다. 그는 한 일본인 선생이 수업 시간에 일본이 한국을 근대화 시켰다. 위안부도 그들이 희망해서 자원한 거다라고 말해 유학생 아이들이 울면서 찾아온 적이 있었어요.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부분이 있어 그럴 때 참 속상하기도 합니다라며 담담히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관광도, 쇼핑도 목적이 아닌 한국행을 매년 한두 차례 이어오고 있다. 할아버지와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박물관도 돌아보고 올봄에는 서대문형무소도 다녀왔다. “글로만 보았던 참상이 눈앞에 보이니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그렇지만 과거를 잊지 않도록 잘 보존해온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웠습니다. 100여 년 전 선조와 제 자신이 이어져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어요라고 소감을 전하기도 했다.

이순애 씨의 눈으로 바라본 서대문 형무소. 이순애 씨가 올 봄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해 찍은 사진이다.
이순애 씨의 눈으로 바라본 서대문형무소. 이순애 씨가 올 봄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해 찍은 사진이다.

광복절을 맞아 그는 다시 한국에 온다. 우연히 맺어졌지만 너무나 값진 이 인연에 감사하며 그와 광복절 주간을 어떻게 특별하게 보낼까 고민 중이다.  

차별 속에서 지지 않으려 버텨왔고, 공격 받더라도 당당하게 한국인으로 살아와서 좋았다는 그의 마음이 너무나 고마워서, 꿋꿋이 감내해온 그의 인생 전체에 감히 작은 위로라도 건네고 싶어서 이번 일정을 더욱 고심하고 있다.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바쁜 일상 속에 그 의미를 자주 잊고 살지만 여전히 100여 년 세월의 흔적 속에서 누군가는 그 세월의 결을 버텨내고 살아왔음을기억하는 8.15 광복절이 되었으면 한다.

 

대한민국 정책기자단 진윤지 ardentmitrh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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