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후반인 내가 어렸을 때, 학교에서는 공상과학 그리기 대회를 종종 개최했다. 가정에 전화나 TV, 자가용이 있는지 조사를 하던 시절, 아이들의 도화지에 미래 모습으로 등장하던 소재들은 운전자 없이 달리는 자동차,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는 모습, 가만히 앉아서 버튼만 누르면 집 안의 모든 것들이 알아서 척척 움직이는 모습들이었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지금, 당시 먼 미래 얘기로 여겨졌던 일들이 현실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자율주행으로 움직이는 교통수단이 등장하고, 가만히 앉아 명령어 한 마디를 던지면 집안 환경이 내가 원하는 대로 모습을 바꾼다. 우리는 인간이 아닌, AI와 경쟁해야 하는 미래를 걱정하게 됐다.
판교 일대를 주행하는 자율주행 제로셔틀. |
급속한 경제부흥이 일어났던 한강의 기적만큼이나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사회의 변화도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신형 디지털 기기가 나오면 흥분된 마음으로 먼저 반응하는 얼리어답터(early adopter)의 체감속도가 아니다. 디지털 사회 속에서 여전히 아날로그의 향수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더 이상 이런 시대적 조류를 피해갈 수 없게 됐다.
책 읽어주는 로봇. 판교어린이도서관 내부에는 로봇전시관이 별도로 마련되어 VR, 드론 체험, 코딩 교육 등이 제공된다. |
디지털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했던 1인이지만 올 한 해는 유독 4차 산업혁명과 관련된 다양한 현장에 노출됐다. 크게 의도하지 않았지만 생활 속에서 자주 이런 현장을 접하게 된다는 것은 그만큼 스마트한 미래 사회가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는 뜻인 듯하다.
저녁 산책길에 전동킥보드를 탄 퇴근 무리들이 곁을 지나쳤다. 자전거보다 부피가 작아 보행자들의 이동을 크게 방해하지 않는 전동킥보드. 꽉 막히는 도로 옆으로 시원하게 달리는 모습이 경쾌했다.
2019 경기도 정책축제에서 만난 전동킥보드. 지자체 주도형 규제 샌드박스 성공사례로 11월부터 동탄, 시흥 일부 구간에서 공유 퍼스널 모빌리티 서비스를 시행 중이다. |
몇해 전부터 자율주행차에 관한 사람들의 관심이 뜨겁다. 아직은 시범단계에 머물러있지만 IT 대기업들이 밀집한 판교테크노밸리 일대엔 운전자 없이 전기로 운행되는 제로셔틀이 판교역 신분당선 일대 5km를 주행한다.
처음 이 자율주행차를 보았을 때의 충격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어릴 적 그 공상과학 그리기 대회가 떠올랐다. 편리한 발전이라는 반가움과 동시에 급변하는 속도감에 두려움이 엄습했다. 이 속도대로라면 인간의 많은 활동 영역을 AI에게 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난 11월에는 판교 일대에서 자율주행 모터쇼가 진행됐다. 대기업과 대학생들이 협력하여 개발한 자율주행차를 직접 시승할 기회가 시민들에게 주어졌다. 사전 신청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자율주행차를 탑승해 보았다. 안전지대 안에서 비록 16km/h로 움직이는 잠깐의 체험이었지만 자동차가 사람이 입력한 정보대로 스스로 움직이는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판교 자율주행 모터쇼 현장에서 만난 자율주행차. 시승을 원하는 시민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
핀테크를 활용한 금융제도, 다양한 신기술이 융합된 신산업 분야가 사회에 빠르게 속속 등장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규제 샌드박스의 영향이 상당할 것이다.
규제 샌드박스는 기존 시장에 없었던 창의적, 혁신적 상품이나 서비스를 출시하려 할 때 기존 규제에 가로막혀 무산되는 일이 없도록 기존 규제를 적용하지 않거나 유예해 시장 출시를 허용해 주는 제도를 말한다.
2018년 3월, 규제혁신을 위한 법안이 발의되고 2019년 1월부터 순차적으로 규제 샌드박스가 시행됐다. 2019년 2월, 도심 수소충전소 설치와 유전체 분석 건강증진 서비스 등이 규제 샌드박스 1호 사업으로 선정됐다.
콩 VR테마파크 강남점. 전기용품 안전확인 및 전파적합성 평가 등의 항목에서 실증특례를 받아 빠르게 강남점을 오픈했다. |
지난 7월, 잠실과 해운대에 이어 강남과 부산 서면에 오픈한 콩 VR테마파크 이종찬 대표는 “나에게 ICT 규제 샌드박스는 가뭄의 단비다”라고 말했다. 산업의 특성상 체험 기계가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이뤄져 기존 공산품 심의기준을 일일이 통과하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규제 샌드박스의 실증특례를 받은 것이다.
규제 샌드박스는 이처럼 스마트한 도시 조성에 필요한 새로운 산업들이 우리의 생활로 진입하는데 가로놓인 장벽들을 유연하게 제거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스마트시티 발전을 위한 아시아 법제 전문가 회의 현장. 아시아 스마트시티 현황과 관련 법제 정비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 |
규제 샌드박스로 가속이 붙은 스마트한 도시 변화를 보며 문득 이전과 다른 생각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전 유비쿼터스 시대가 기술적인 인프라 구축에 집중했다면 스마트시티는 사람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계적인 편리함에 집중하기보다는 지속가능하고 친환경적인 개발, 사람의 가치와 안전을 최우선으로 유지하기 위해 기존에 산재한 다양한 도시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스마트한 도시 변화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그 변화들을 좀 더 유연하고 다양하게 조성할 수 있는 토대가 바로 규제 샌드박스였다. 올 한 해 규제 샌드박스의 승인 목표는 100건이었으나 이미 180건의 승인을 넘은 상태. 규제개선 효과는 지켜봐야 하겠지만 이대로라면 지금 우리가 머릿속으로 그리는 미래 모습들이 불과 몇 년 만에 현실이 되는 것은 아닌지 기대감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