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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구 배재대학교 일본학과 교수 |
수십년 간 자유민주주의체제와 시장경제가치를 공유했던 한일관계는 돌이키기 힘든 루비콘강을 넘어 섰다. 진작 두 정상이 만나 출구전략을 통해 연착륙 했더라면 양국 모두가 손해 보는 일은 없었을 텐데하는 아쉬움만 가득한 채 이제는 일본의 ‘경제적 폭력’이라는 손익계산서를 따져야 한다. 그러다 보니 구한말 데자뷰를 떠올리는 분들도 있다.
기술패권 싸움
일본이 무역규제조치를 강하게 밀어붙이는 이유는 한국의 경제 성장을 더 이상 좌시하지 않겠다는 기술패권에서 비롯됐다. 한국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일본 경제의 파트너에 불과했고 한국의 지분이 그렇게 많지 않았지만, 오늘날 한국은 130년 전 과거와는 다르다. 향후 변경될 수는 있겠으나 현재 국가신용등급은 일본보다 두 단계 높은 AA이며, 군사력 역시 공식적으로는 일본(9위)보다 한국(7위)이 한수 위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 과거 식민지를 지배한 경험이 있는 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국민소득 3만 달러에 인구 5000만이 넘는 ‘30-50 클럽’ 7개국에 대한민국이 속해 있다.
일본은 어떤가? 아베가 집권한 2012년 12월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아베노믹스 정책을 실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단 한해도 경제성장률 2%를 넘지 못하는 경제둔화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한국과의 무역수지는 흑자지만 총합에서는 무역적자다. 더구나 두 달 후인 10월부터 소비세가 8%에서 10%로 오르면 일본 내수시장은 활력을 잃고 아베노믹스의 허상이 드러날 것이다. 한마디로 ‘Japain’(Japan+Pain) 상황에 빠진 일본 입장에서는 한국의 글로벌 성장세를 용납하지 않으려는 기저가 깔려 있다. ‘식민지배를 받았던 국가가 감히’ 라는 우월의식을 바탕으로, 지금 아니면 때를 놓칠 것이라는 정치적 돌파구를 찾기 위해 대한민국을 표적삼아 Japan First를 내세운 것이 무역보복조치의 핵심이다.
일본의 변명
국가간 협정은 불가역적(irreversible)인가에 대해서도 일본은 할 말이 없다. 일본은 1858년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맺으면서 관세자주권을 박탈당했는데, 그로부터 53년 후 근대화에 성공하고 한국을 침략한 다음해인 1911년 미국과 재협상을 통해 관세자주권을 찾아 왔다. 한일간 맺은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 이후 강제징용노동자의 개인청구권에 대한 대한민국 사법부의 판단까지도 정확히 53년이 걸렸다. 일본이 과거 미국을 상대로 잘못된 국제법을 재협상한 시간과 일치하는 역사의 아이러니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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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18년 10월 30일 고 여운택씨 등 강제징용 피해자 4명이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의 재상고심 선고 공판에서 피해자들에게 1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일본은 국가간 조약을 맺은 국제법을 원상복구 해 놓은 ‘원죄’를 갖고 있으면서 한국의 사법부 판단에 대해 국제조약과 신뢰 운운하며 이중잣대를 들이대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중국과 미국의 강제징용노동자의 청구는 명백히 받아들이고 보상해 주면서 한국만은 안 된다는 일관성 없는 모습에서는 신뢰감을 상실하게 만든다. 그러니 한일관계를 파국으로 몬 책임이 전적으로 일본에게 있다는 말은 틀린 표현이 아니다.
한국의 대응
다가오는 8월 28일부터 일본의 백색국가 제외로 인한 한국 경제의 불확실성은 높아만 간다. 1200여개에 해당하는 품목이 건별허가로 전환되고, 그 중에서도 대일의존도가 높고 대체가능이 어려운 159개 품목의 엄격한 심사는 한국 경제 전반에 타격을 줄 것이다. 소재·부품·장비산업에서 절대적 우위에 있는 일본과의 갑을관계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기업들은 국제분업시스템을 믿고 전환비용(switching cost)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일본 기술에 경로의존 해 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급변하면서 대한민국은 자의반 타의반 새로운 기술혁신을 통해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에 앞장서야 하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이 호된 과정에서 몸살을 앓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어떤 기업은 도산할 수도 있겠으나 또 다른 어떤 기업은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우뚝 설 수도 있다. 경제는 생물이고 돈 만큼 정직하게 움직이는 게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격동이 아니었으면 뒤로 미루었을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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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무역마찰로 기업들의 일본산 소재 수입이 영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기업들의 애로사항을 해소하기 위해 서울 상공회의소에 차려진 소재부품 수급 대응 지원센터에서 5일 직원들이 회의하며 의견을 나누고 있다.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남겨진 숙제
최근 KAIST 교수단 100여명의 전·현직교수와 서울대 기술자문특별전담팀이 일본의 백색국가 제외로 공급에 타격을 입을 것으로 예상되는 소재·부품·장비에 대한 공급 안정화를 지원하기 위해 전면에 나섰다. 예상컨대 이러한 산학관(産學官)의 협력하는 모습은 불꽃처럼 타대학과 연구소로 번질 것이며 이에 더하여 정관재(政官財)도 하나가 되는, 그래서 지금껏 보이지 못했던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의 역량과 저력이 눈앞에 펼쳐질 것으로 기대가 된다.
우리는 일본의 경제보복조치에 대한 항의 표시로 시작한 불매운동을 통해 지금까지 우리 스스로가 한국제품을 가치함정(Value Trap)에 묶어 두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국제품이 일본산보다 못하다는 착시현상을 바로 잡을 수 있게 된 것도, 그래서 대체 소비재를 찾아내는 현명한 소비문화를 체득한 것도 하나의 소득이다.
이제 우리는 일본 탓하는데 시간을 소모하기 보다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이제껏 뒤돌아보지 못했던 부분들을 하나씩 짚어 가면서 전반적인 시스템을 수정해 나아가야 한다. 지금은 경제적 이익 몇 푼 얻기 위해 고개 숙이고 들어갈 수는 없는 시점에 와 있다. 우리의 국격과 국민들의 자존감을 위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에 승부를 걸어야 할 때이다. 시간이 지나면 승패는 갈릴 것이다. 그때 누가 이겼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누가 이겼다고 믿게 만들어야 하는가? 이 숙제는 결국 우리가 풀어 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