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패러독스(paradox)’라 불리는 이론이 많다. 우리말로는 ‘역설(逆說)’이다. 그리스어 para는 ‘넘어선’, doxa는 ‘(일반적) 의견’을 뜻한다.
즉, 통설을 넘어선 견해가 역설이다. 역설은 모순(irony, 아이러니)과 혼용되기도 하지만 다른 개념이다. 아이러니는 핵무기가 오히려 평화를 유지시키는 것처럼 ‘가치의 반전’을 뜻하는 말이다.
이에 비해 패러독스는 ‘가치의 충돌’ 개념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아이러니는 “말이 안 된다”에 가깝지만, 패러독스는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되기도 한다”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얼핏 기존 인식과는 다른 듯한데 한편 곰곰 생각해 보면 어떤 의미가 찾아질 때 붙이곤 한다.
여기, 코로나 시대에 딱 맞는 역설이 있다. ‘스톡데일 패러독스’다.
제임스 본드 스톡데일(James Bond Stockdale, 1923~2005)은 미 해군 중장으로 예편한 사람이다. 그가 유명해진 건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가 8년간 포로수용소 생활을 견디고 돌아온 불굴의 스토리 때문이다.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스톡데일은 해군 폭격기 조종사였다. 그는 1965년 자신이 몰던 전투기가 격추돼 북베트남의 호아로 수용소에 갇혔다. 그는 포로 중 최고위 장교였다. 1973년까지의 수감 생활 중 절반을 가로세로 90㎝, 275㎝ 독방에 갇혀있었고 지독한 고문을 당했다.
전쟁이 끝나자 포로에서 풀려난 스톡데일은 최고 훈장을 받고 전쟁 영웅으로 미국인의 존경을 받았다. 1979년 군복을 벗엇고 1992년 대선에서 제3후보 로스 페로의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기도 했다.
그의 이름이 붙은 패러독스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성공하는 기업들의 8가지 습관’이라는 베스트셀러를 냈던 미국의 저명한 경영학자 짐 콜린스는 2001년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2002년 국내 출간).
그 책에서 그는 위대한 기업으로 성장한 회사들의 공통된 특징을 ‘스톡데일 패러독스’라고 이름 붙였다. 위기상황에 처했을 때 그 현실을 받아들이면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정면 대응한 회사는 살아남은 반면, 조만간 상황이 풀릴 거라는 낙관에 기댄 회사들은 무너졌다는 것이다.
그는 그 현상을 스톡데일에서 찾았다. “최악의 상황에서 당신이 살아 돌아온 비결은 무엇인가”라는 콜린스의 질문에 스톡데일은 이렇게 대답했다.
“가장 일찍 죽은 사람은 비관론자가 아니라 근거 없는 낙관주의자였다. 그런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전에는 나갈 수 있을 거라고 믿다가, 크리스마스가 그냥 지나가자 부활절이 되기 전에는 석방될 거라고 생각했다. 부활절이 지나면 추수감사절 전에는 나가게 될 거라고 또 믿었다. 근거 없는 희망을 지속적으로 가졌고 기대가 좌절될 때마다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그들은 점차 희망을 잃어가며 죽어갔다.”
스톡데일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낙관하지 않으면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의 끈은 놓지 않았다. 그러면서 현재 직면한 문제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는 부하 포로들에게 조만간 석방될 거라는 희망에 매달리지 말고 우선 현실에 적응하라고 말했다.
저자 콜린스는 그의 이름에 ‘패러독스’란 말을 붙였다. 낙관하지 않은 태도가 생존을 가능케 했다는 의미에서 ‘역설’이다. 스톡데일 패러독스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목표를 반드시 달성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동반한다는 점에서 막연한 비관주의나 낙관주의와는 다르다. 사람들은 이를 ‘합리적 낙관주의’라고 해석하며 ‘맹목적 낙관주의’와 대비했다.
콜린스는 스톡데일이 포로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로 상황에 맞서 스스로가 해낼 수 있는 능동적 대처를 주목했다.
북베트남 정권이 전쟁포로를 인간적으로 대우하고 있다는 선전 영상을 찍으려고 하자 의자로 자신을 내리치고 면도날로 베는 등 자해를 하는 방식으로 거부했다. 부하들의 고립감을 줄이기 위해 몰래 소통할 수 있는 내부 암호를 만들기도 했다. 그는 가능한 한 많은 포로들이 살아 나갈 수 있는 모든 방법을 현실에서 찾았다.
아유슈비츠 수용소에서 수감됐다 살아나온 유대인 학자 빅터 프랭클(1905~1997)은 1946년 그의 수용소 체험을 바탕으로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유명한 책을 썼다. 그는 전후 세계적인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자가 됐는데 실존주의 치료인 ‘의미치료’를 창시했다.
프랭클은 책에서 “사람이란 의미가 있으면 살아갈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수용소에서 더러운 물에 생선 머리 하나 떠 있는 수프로 매일을 버텨야 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이 더러운 수프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려고 노력했다.
그 의미란 막연한 희망이나 꿈같은 것이 아니라 ‘내가 나에게, 또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무엇이 될 수 있다’는 의미를 스스로 발견하고 그것을 창조해가며 살아나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절망이 오히려 극단적 선택을 보류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스톡데일에게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만 갖고는 안 된다는 걸 깨닫는다. 긍정적 생각이 긍정적 결과를 가져온다는 자기계발서의 단골 명제는 당연한 게 아닐 수 있다. 언제 어디서든 코로나 바이러스의 공격을 받을 수 있고 어려워진 생활과 취업난으로 힘든 청춘을 더 아프게 할 수 있다.
희망을 잃지 않는 것, 그러나 눈앞에 닥친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는 것, 그리고 가능한 일부터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것, 이 세 가지가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일 수 있다는 것을 스톡데일 패러독스에서 배운다.
어느 글에선가 읽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말이다. “나의 지식은 비관적이지만, 나의 의지와 희망은 낙관적이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주인공은 억울한 옥살이를 하지만 언젠가는 무죄방면될 거라는 막연한 희망에 빠져 있지 않았다. 그는 교도소의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며 매일 숟가락으로 벽에 구멍을 팠다.
◆ 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언론과 글쓰기를 강의했고, 언론중재위원을 지냈다. hkb82107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