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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모 문화재청장 |
남겨진 것들을 통해 역사를 복원하려는 분주한 손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근래에는 조사와 연구의 충실도는 물론이고 더욱 사실에 가깝게, 해상도가 높은 복원과 재현이 문화재와 문화유산을 다루는 우리 부처의 과제가 되고 있다.
스토리텔링이 더해진 역사 이야기, 다양한 연구분야 간의 협업, 4차 산업 기술이 더해진 최첨단의 전시기법은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일이 아니다. 과제의 목표는 당연히 국민들이 우리의 역사를 보다 알기 쉽게 느끼도록 하는 것이겠다. 전국의 수많은 고고학 조사 현장에서 이 모든 시도와 노력이 지금도 이뤄지고 있다. 역사의 시간을 지나온 ‘현장’에서 얼마나 온전한 자료를 획득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우리가 찾는 새로운 역사의 장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019년 봄에 언론을 통해 새로운 그림 한 장이 공개됐는데 이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그림의 제목은 ‘5세기 어느 여름의 월성 해자’ 였다. 5세기는 지금으로부터 1600년 전이고, 때는 바야흐로 신라다. 해자는 월성이라고 하는 신라의 천년 왕궁을 방어하는 긴 도랑이름이다.
문화재청의 학예사들은 이곳을 발굴조사하면서 그 당시의 씨앗과 동물뼈, 나무들을 많이 출토했다. 이러한 자료들은 신라시대의 당시 자연환경을 이해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과거에는 그리 전면적으로 다루어지는 않았던 것들이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모험을 시작했다. 해자 내부의 흙 전체를 섬세한 체로 하나하나 걸러내는 체질을 하면서 작은 자료 하나하나들을 다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해서 무려 60종이 넘는 식물의 씨앗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환경부가 지금은 멸종위기종으로 지정해 거의 구경하기도 힘든 가시연의 씨앗을 무려 2만점 가깝게 확인하는 성과를 거뒀다.
60여 종의 씨앗들은 해자 주변과 내부의 수생식물을 상상속에 그릴 수 있게 해주었고, 함께 이뤄진 꽃가루 조사를 통해서는 일정 거리 밖의 숲까지 복원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꾸게 해줬다.
가시연꽃은 의심의 여지없이 5세기 신라의 월성 해자를 풍성하게 만들어 줬을 것이다. 최근에는 가시연꽃을 기증받아 생육환경을 관찰하여 신라의 자연 환경을 역으로 추정해가는 실험고고학 방법론까지 도입했다. 향후 우리가 상상속에 그린 그림 한 장은 ‘신라 5세기의 경관 복원’이라는 큰 꿈을 이룰 수 있는 단초가 될 수도 있다.
물론 경관·환경을 복원하는 연구의 개념은 유럽에서 일찍부터 성립됐고, 환경변화의 역사와 문화진화를 연결시키는 시도도 끊임없이 발전해왔다. 단순히 유적과 유물을 ‘발견’해 내던 방법론에서 확장하여 당시의 사람들이 살아가던 경관과 세계를 모두 내포할 수 있는 연구가 점점 개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영향은 1960년대 국내의 고고학 연구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는 유적의 환경과 고대인들의 삶(의 구성요소들)을 조화롭게 이해하기 위한 시도로 이어졌다. 그러나 국내 고고학조사의 여건은 이러한 심화된 연구의 발판을 마련하기에는 부족하였던 한계가 있었다.
문화재청은 복원과 재현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다른 발굴조사에도 연결될 수 있도록 제도 마련에 주목하고 있다. 고고학적 조사에 연결되는 법률의 개정을 통해 발굴조사 현장에서 출토되는 많은 유기물 자료들, 특히 식물의 씨앗과 동물의 유체, 더 나아가서 옛사람들의 뼈에 대한 연구를 법적인 테두리 속에서 지원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나아가 대학교 강의실에서 이뤄지는 전공 수업 이외에도 발굴조사 현장을 통해 실질적인 고고학 교육이 이뤄져 연구세대의 두터운 확보를 꾀해야 할 것이다.
환경이란, 과거에도 현재에도 고정돼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환경의 역사는 고대의 사람들이 밟고 섰던 땅위에 수 없이 만들어지고 사라진 인류 활동의 기록이다.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경관’, 우리가 미래에 전하고자 하는 ‘역사의 순간’의 채색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