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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고 유감

2016.05.19 한기봉 국민대 초빙교수/언론중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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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부고(訃告)란을 늘 챙겨 보는 편이다. 안 보고 지나가면 마음에 걸린다. 혹시라도 아는 분이 돌아가셨거나 지인이 상을 당했는데 결례하는 일이 생길까봐 하는 노파심에서다. 물론 요즘에는 관혼상제의 알림도 편리해져서 카톡이나 문자로 부음이 날아오는 경우가 많다. 상주가 직접 보내는 경우도 있고, 동창회든 친목회든 커뮤니티의 총무가 단체 문자를 보내준다.
  
신문 부고를 유심히 살피면 한 가문이 눈에 보인다.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리나라의 신문 부고는 그런 형식이다. 돌아가신 분이 참 다복했구나, 딸만 몇을 두었구나(보통 빙부상 빙모상으로만 나오는 경우다), 이 집안과 사돈을 맺었네, 자식들이 다 잘되었구나에 이르기까지 고인을 중심으로 한 가족의 역사와 가족관계가 읽힌다. 일부러 알리려고 한 건 아니지만 부고에는 의외로 매우 많은 개인정보가 담겨 있다. 가장 눈길이 가는 건 고인과 유족의 직업이다. 평소 가까웠던 친구도 그의 아버지 생전 직업이 뭐였는지, 형제자매는 물론 그 집안의 사위 며느리까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처음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부고를 통해 우연히 친구 집안 내력을 다 알아버리게 되는 것이다.

부고를 보면서 또 자주 느끼는 게 있다. 이른바 한국 사회의 수저론이다. 돌아가신 분이 의사이면 자식이나 사위 며느리 중에 의사가 많고 교수, 법조계, 기업하는 집안 등은 가족 구성원이 같은 직업을 대물림하거나 혼사를 맺은 경우가 많다. 언젠가 전직 병원장의 부고를 본 적이 있는데 아들딸 네 명에 며느리 사위 손주까지 합해서 의사가 무려 열 명이나 됐다. 망자가 생전에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위나 직업을 가졌으면 유족의 면면도 ‘금수저’가 많다. 하지만 같은 배에서 태어난 형제끼리도 차이가 큰 경우도 있고, 부모는 평범했어도 자식들은 성공한 집안이 보이기도 한다. 한국식 부고는 어쩔 수 없이 부모자식 형제자매 간에 신분비교의 장이 되고 말았다.

보통 신문 지상의 ‘사람들’ 면에 게재되는 부고는 다 무료다. 하지만 아직도 돈을 내야 실어주는 걸로 아는 사람들도 꽤 있다. 그런데 누구나 이용할 수가 있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유족이 다니는 직장이나 단체가 구성원의 부고를 챙겨서 신문사에 보내주거나 출입기자가 있는 경우에는 어렵지 않다. 주로 공직자나 기업, 대학, 전문직종들이 그렇다. 그렇지만 신문사에 연고가 없는 일반 백성은 불쑥 신문사에 부고를 팩스나 이메일로 보내기가 주저된다. 결국 부고가 실리고 안 실리고는 고인이나 유족의 직업, 사회적 지위가 결정해주는 셈이다.

망자의 이름이 없는 부고도 무척 많다. OOO씨 부친상 모친상 빙부상으로 나오는 경우다. 망자가 내세울 만한 사회적 지위가 없었는데 자식들은 나름 잘되었을 경우에 그렇다. 이름 없는 부고가 가장 많은 경우는 모친상에서다. 우리의 많은 어머니들은 평생을 ‘OO엄마’로 불리다가 갈 때도 이름 없이 간다. 직업이 없는 딸들도 대체로 부고에 등장하지 않고 직업 있는 남편의 빙모상으로 대체된다. 주인 없는 부고에 대한 지적을 의식해서 요즘 신문들은 유족에게 물어서 돌아가신 분의 이름 석 자를 적어주는 경우(한겨레신문의 ‘궂긴 소식’이 가장 먼저 시작했다)가 늘고 있다 ‘OOO씨 부친상’ 대신 ‘OOO씨 별세’가 가는 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그래도 유족의 직업은 여전히 부고의 존재 이유다. 죽은 자의 이름보다 산 자의 지위가 중요시되는 부고 관행은 우리 사회의 조문 문화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고인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경우 유족을 보고 장례식장에 간다. 조문객 중 과연 몇이나 망자를 기억하고 이야기하고 애도할까. 산 자를 보고 절을 하고, 봉투를 내밀고, 육개장을 먹어주고, 소주잔을 기울이고, 산 자의 지위나 나와의 관계에 따라 조화의 단수와 봉투의 두께와 빈소에 머무르는 시간을 조절한다. 장례식장은 고인을 보내는 공간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의 사교의 장이자 나의 사회적 존재감을 확인하는 자리다. 한국의 신분사회를 민낯으로 볼 수 있는 곳이 장례식장이다.

김승희 시인이 이런 시를 썼다. 고인의 이름 없이 자식의 이름과 훌륭한 직위만 실린 어떤 신문의 부고를 그대로 옮겨 적고 말미에 ‘그런데 누가 죽었다고?’ 한 문장을 덧붙인 게 시의 전부다. 이 시의 제목은 ‘한국식 죽음’이다.

미국 신문의 부고란은 우리 신문과 완전히 다르다. 유료이고 기사체라는 점부터 다르지만 가장 큰 차이는 고인이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미국의 부고는 고인의 삶을 추억하고 기리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사모곡 사부곡 망부가요, 그들이 짓는 에피타프(묘비명)다. OOO의 부인, 엄마, 할머니라는 유족의 이름은 나오되 그들의 직업을 쓰는 일은 없다. 유족이나 고인을 사랑했던 사람이 써서 사진(고인의 젊은 시절 사진도 많다)과 함께 게재한다.

한 미국 동포가 쓴 글에 공감한 적이 있다. 미국 신문의 부고는 품위와 감동과 스토리와 위트가 넘쳐서 고인을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그의 삶의 궤적을 통해 오늘의 나를 깨닫게 하는 울림이 전해진다고 한다. 2013년 제인 로터라는 작가는 자신의 부고를 유머러스하게 직접 써서 시애틀타임스에 넘기고 안락사를 택했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찾아보니 1974년 진학문이라는 언론인 겸 사업가가 스스로 쓴 부고 광고를 신문에 냈다. 내용은 이랬다. “그동안 많은 총애를 받았사옵고 또 적지 않은 폐를 끼쳤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오늘 먼저 갑니다. 여러분 부디 안녕히 계십시오.” 그 옆에는 유족 이름으로 “여러분의 염려 덕분에 장례를 잘 마쳤습니다.”라는 광고가 실렸다.

죽음의 모습은 다 같으나 부고에는 급이 있다. 서거-타계-영면-별세-작고-사망은 표현의 격이 다르다.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의 죽음은 별도 기사로 다루어진다. 크게 있는 집안은 별도의 부고 광고를 모든 신문에 낸다. 그러나 장씨의 셋째 아들과 이씨의 넷째 아들(張三李四)은 신문의 공짜 부고란에 자신의 죽음을 알리고 가기도 어렵다. 죽음은 ‘예약’될 수 없지만 신문 부고는 생전에 예약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누어진다.

오랜 관행의 부고 양식은 당분간 어쩔 수 없다 치자. 그래도 가능한 한 가는 사람에게 부고의 주인공 자리를 돌려주는 배려가 있으면 좋겠다. 미국 신문처럼 돈을 받더라도 유족이 고인을 생각하며 마지막 러브레터를 부칠 수 있는 별도의 부고면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지면에 제약이 있다면 신문사마다 온라인 공간도 있다.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신문이라면 반향이 더 좋을 듯하다. 거기엔 가문의 위세를 떨칠 일도 없이 고인에 대한 사랑만이 오롯이 평등하게 넘칠 것이다. 이 세상 소풍을 끝낸 필부필부(匹夫匹婦)의 가는 길도 외롭지 않을 것이며, 보내는 불효자식의 마음도 조금은 위안이 되지 않을까.

한기봉

◆ 한기봉 국민대 초빙교수/ 언론중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주간한국 편집인, 인터넷한국일보 대표이사,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언론보도로 피해를 입은 사람을 구제하는 언론중재위원회 언론중재위원이며,국민대 언론정보학부에서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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