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이 한글을 창제하자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가 반대했다. 최만리는 상소문에서 “글자가 너무 쉬우면 백성들이 국법을 쉽게 생각하여 업신여기고, 문자를 공부한 선비를 함부로 여길 것입니다”라고 간했다. 글과 문자는 수천 년간 지체 높은 분이나 학자만의 전유물이었다. 조선의 양반과 선비들은 어려운 한자로 학문과 정보를 독점하고 그들끼리 전수하며 글에 우매한 백성을 지배했다.
수백 년 전까지 가지 않더라도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글을 둘러싼 환경은 불평등했다. 글은 저작이나 공적 목적, 언론 보도, 지식 전수 수단으로서의 기능이 더 컸다. 대다수 글을 읽고 쓸 줄은 알았지만 글을 쓰는 사람과 이유와 목적은 제한적이었다. 아마도 일기와 편지를 빼고는 말이다. 글을 유통하고 소비하는 데도 비용이 들었다. 출판과 구독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누구나 글을 쓰는 세상이다. 글의 유통과 소비는 수직적에서 수평적 구조가 되었다. 돈 한 푼 안 들여도 내 글을 퍼뜨릴 수 있다. 책을 내지 않아도, 신문에 기고하지 않아도, 오늘 내가 SNS나 디시인사이드에 올린 글 하나를 수백 만 명이 읽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 목적이 어떻든 간에.
글을 쓰기 위한 환경도 간편해졌다. 언제 어디서나 쓸 수 있다. 의관정제하지 않아도, 책상에 앉지 않아도 된다. 지필묵은 모니터나 액정화면, 키보드나 손가락이 대신한다. 글쓰기는 완전히 민주화했다.
더 나아갔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는 세상을 넘어서 이제는 글을 써야 먹고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글은 기호품이나 사치품이 아니라 생필품이 된 것이다. 나는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글을 (잘) 써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세 가지를 말한다. 첫째는 자아 성찰, 자아 완성, 자기 해방을 위해서, 두 번째는 사회적 소통과 인간관계의 도구이기 때문에, 라고 했다.
첫 번째 이유는 예나 지금이나 비슷할 것이다. 그건 글의 영원한 본령이다. 그런 글은 사적이거나 문예적 글에 가깝다. 사유와 통찰, 감수성에서 나오는 글이다.
두 번째 이유는 현대적이고 현실적인 동기를 갖고 있다. 십수 년 전만 해도 예측하지 못한 커뮤니케이션 환경과 도구의 급속한 발전이 그렇게 만들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음성 대신 문자가 주된 소통 수단이다. 메일, 블로그, 카페, 인터넷커뮤니티, 페이스북, 트위터, 카톡, 밴드를 통해 우린 서로를 묶고 있고 묶여 있다. 길든 한 줄짜리든 이젠 문장을 쓰지 않으면 불통이 되고 소외된다. 말 대신 글이 지배하는 세상인 것이다. 어느 문학평론가는 “글은 말이 침묵하는 지점에서 출발하며 말로 할 수 없는 걸 쓰고자 하는 것이 글쓰기의 최초의 욕망”이라고 했지만, 그건 글을 쓰는 첫 번째 이유에나 해당할 것이다.
문제는 세 번째 이유다. 나는 ‘밥벌이의 수단과 출세를 위해서’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 세 번째가 아마도 학생들에게는 가장 피부로 다가왔을 것이다. 세종대왕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세종은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제 뜻을 능히 나타내지 못하는 사정을 가엾이 여겨 사람마다 쉬이 습득해 날마다 편리하게 사용하라’고 한글을 만들었다. 그 덕에 쉬이 습득해 편리하게 사용하게 되었지만, 글이 사람의 성공과 출세를 결정짓는 중요한 평가 항목 중 하나가 되리라곤 몰랐을 것이다.
글이 젊은이들의 명줄을 잡고 있다. 얼마나 잘 쓰냐, 못 쓰냐가 대학에 합격하고, 취업의 바늘문을 뚫고, 직장에서의 평가를 좌우하는 세상이 되었다. 암기주입식 교육의 폐단을 개선하려는 입시제도가, 창의적이고 전인적인 인물을 뽑고자 하는 기업이 만들어낸 것이다. 학생부종합전형에서의 자기소개서, 논술전형의 경쟁을 거쳐 상아탑에 들어가면 취업을 위한 또다른 자소서가 기다린다. 취업에 성공하면 평생 기획안과 보고서와의 전쟁이다. 자소서나 논술이나 보고서나 글의 소재와 성격은 다르지만, 결국은 단어와 문장과 표현으로 이뤄지는 글쓰기이다.
좋은 대학에, 더 나은 직장에 가려는 이들에게 스펙 쌓기란 결국은 자소서 항목을 잘 채우기 위한 글감으로 전락했다. 대학생활은 자소서 설계도에 맞춰 선제적으로 짜여진다. 기업이 원하는 덕목을 위한 내 삶의 연출이 시작된다. 자기소개서 안에 묘사된 나는 질풍노도 속을 걸어가는 미완의 존재가 아니다. 이미 다 깨우치고 총체적으로 업그레이드된 레디메이드 수퍼히어로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열정 끈기 희생 봉사 도전 헌신 극복 협력, 그런 거다.
그게 참이든, 거짓이든, 과장이든, 미화든 상관없다. 살아남기 위한 참으로 눈물겹고 고단한, 대학과 기업이 주관하는 백일장 경연이며, 이 시대 청춘들이 가장 절실하게 매달리는 청년문학 신춘문예다. 그 장르에는 시는 없고 소설만 있다. 감동적인 휴먼스토리들로 가득하다. 평범하면 안 된다. 나는 선택되어져야 하니까.
학교는 인문학적 문예적 글쓰기보다는 자소서 잘 쓰기를 가르친다. 점점 빨라져 중학교부터다. 그 나이에 무슨 ‘체험 삶의 현장’이 그리 많고 인생의 내공이 쌓였겠는가. 그 감당은 교사, 부모, 사교육으로 돌아간다.
글쓰기가 아니라 글짓기를 강요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내가 아니라 그들이 바라는 나를 살고 있다. 그리고 글짓기의 품질에 따라 인생의 시작이 달라진다.
◆ 한기봉 국민대 초빙교수/언론중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언론보도로 피해를 본 사람과 언론사 간 분쟁을 조정하는 언론중재위원이며, 국민대 언론정보학부에서 글쓰기와 한국 언론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hkb82107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