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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효인생, 부패인생

2019.01.21 한기봉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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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고등학교 친구에게 빚졌다. 시인인 그가 얼마 전 동창회 밴드에 ‘발효와 부패’라는 글을 올렸다. 우리는 대다수 은퇴한 나이다. 무척 많은 친구들이 공감하는 댓글을 달았다. 아직도 교편을 잡고 있는 한 친구는 학생들에게 들려줬다며 고마워했다. 그 친구 글의 요체는 이거다.

“시간이 지나면 무엇이든 원형이 무너진다. 꽃도 사람도 마찬가지다. 기왕에 피할 수 없는 변질이라면 잘 변해야만 한다. 변질의 종류엔 두 가지가 있는데 부패와 발효다. 우리 모두 나이 먹어가며 썩은 음식처럼 악취 풍기며 살면 안 된다. 툭하면 남 탓하고 세월 핑계대고 젊은이들 욕하는 노년이 되지 말자. 구수하고 이로운 발효식품처럼 살자. 이제부터라도 향기로운 와인 같은 멋진 발효는 아닐지라도 잘 묵힌 김치에 시원한 막걸리라도 되어 지친 인생들에게 쉼을 줄 수는 없을까? 나는 지금 과연 발효 중일까, 부패 중일까?”

우리 식탁에 발효식품은 늘 풍년이다. 된장, 간장, 고추장부터 다양한 김치류와 젓갈류, 장아찌, 식초, 청국장, 곶감, 말랭이, 막걸리에 이르기까지 셀 수 없을 정도다. 발효 저장식에 관한 한 우리 조상은 탁월했다. 된장 간장 김치류만큼 영양 좋고 독특한 발효식품이 세계 어디에 또 있겠는가. 지금은 보기 힘들지만 벽돌 같은 메주덩어리를 새끼줄로 묶어 처마 끝에 대롱대롱 매달고, 아랫목에 이불로 고이 싸서 띄울 때, 그 이상한 광경과 퀘퀘한 냄새. 어릴 땐 왜 일부러 곰팡이를 피워 먹을까, 참 이상하게 생각했다. 내 아버지는 잘 삭아 코를 톡 쏘는 홍어 한 접시에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는 걸 평생 사랑하셨다. 난 이제서야 그 맛을 안다.

물론 서양에도 발효식품은 많다. 빵이나 치즈 버터 요구르트 맥주 와인 등은 다 발효다. 프랑스에서 매년 11월 셋째 목요일 자정에 출시되는 보졸레 누보는 그해 수확한 포도로 빚은 햇포도주로 풋풋하고 상큼한 맛이 있지만, 수십 년 긴 세월 오크통에서 숙성과 발효를 거친 와인의 깊고 중후한 맛을 결코 따라갈 수는 없다. 역사가 기원전 3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포도주를 누가 발명했을까. 자연이다. 자연이 자연스럽게 발효시켜 빚어낸 걸 사람이 발견하고 맛을 보고 대량생산했을 뿐이다. 발효는 인간의 식생활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발견이다.

발효(醱酵)란 농·수·축·임산물 같은 재료에 효모나 박테리아 같은 미생물이 작용해서 다른 물질로 바뀌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 재료가 갖고 있던 맛과 향이 바뀌고, 미생물이 영양 성분을 분해해 우리 몸에 좋은 포도당 아미노산 비타민 등을 만들어내고 식품의 저장성이 향상된다. 부패(腐敗)는 주로 단백질 유기물이 미생물의 작용에 의해 각종 아민이나 황화수소 같은 악취를 내며 분해되는 현상이다.

‘썩다’와 ‘삭다’처럼 발효와 부패는 정말 한끝 차다. 동사 ‘삭다’는 ‘썩다’에서 나온 게 확실하다. 국어사전은 “물건이 오래 되어 본바탕이 변하여 썩은 것처럼 되다”라고 설명한다. 생물학적으로도 미생물에 의한 유기물 분해라는 점에서는 같다. 다만 특정한 조건과 환경을 갖추면 이로운 물질이 만들어지는 발효가 되고, 그게 아니면 부패로 진행돼 해로운 걸로 변한다. 우유가 상하는 것은 부패고, 요구르트로 변하는 것은 발효다. 식빵에 곰팡이가 생기면 버려야 하지만 메주에 곰팡이가 피면 좋은 거다.

발효하면 구수하거나 시큼한 향기를 풍기지만 부패하면 고약한 냄새가 난다. 발효의 맛은 깊고 풍부하다. 혀에 묵직하게 내려앉으면서 풍부한 미각을 준다. 우린 그걸 보통 ‘진국’이라고 한다. 부패한 음식은 배탈이나 식중독을 일으킬 뿐이다. 

발효와 부패의 과학적 차이는 그만 하자. 우리네 인생에 대입하려고 한 거니까. 자, 모든 육신은 부패한다. 자연으로 돌아간다. 그 전에 누구는 이 세상에 자신이나 타인의 삶에 풍미를 더해주는 발효의 사이클을 거치고, 누구는 악취를 풍기며 부패를 재촉하는 시궁창에 빠진다. 누구는 묵은지처럼 살고, 누구는 식중독균처럼 산다. 그 차이는 어디서 올까.

숙성이 아닐까 싶다. 식품의 제조나 가공 과정에서 맛이나 성분이 불충분한 것을 일정 조건 하에서 얼마간 방치해 완성시키는 게 숙성이다. 숙성은 시간이자 기다림이다. 발효엔 숙성기간이 있지만 부패에는 없다. 오욕칠정과 이기심, 분노, 미움, 폭력, 절망을 마음 속에 꾹꾹 눌러 세월과 사색과 긍정이라는 향신료를 치고 기다려야 발효가 된다. 우리는 분노가 가라앉는 걸 ‘분이 삭다’라고 말한다. 기침도 시간이 지나면 ‘삭아’든다. 모닥불은 ‘사그라져’ 재가 된다.

문학이란 것도 결국은 발효다. 신달자 시인은 어느 인터뷰에서 “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몸 혹은 정신에서 괴어오르는 함성을 내 언어로 오래 묵혀 발효시킨 한잔 술”이라고 대답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사랑도 변한다. 소멸하지 않는 것도 없다. 과정만 다를 뿐이다. 어떤 소멸이 빛나는 가치를 남기는가? 어느 것은 발효를 거쳐 천천히 삭아 소멸하고 어느 것은 바로 부패해 소멸한다. 누군가는 썩지 않으려고 방부제를 몸에 두르지만, 정직한 빵은 시간이 지나면 푸른곰팡이가 핀다는 걸 사람들은 다 안다.

‘썩은’ 음식은 모두에게 바로 피해를 주지만, ‘삭은’ 음식은 오랜 기간 많은 이에게 깊은 맛과 여운을 준다. 안도현 시인의 그 시가 생각나 이렇게 패러디해본다. “나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삭은 음식이었을까.”,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삭히는 일.”

한기봉

◆ 한기봉 칼럼니스트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부국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글쓰기를 가르쳤고, 언론중재위원을 지냈다. hkb8210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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