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는 여전히 무덥지만, 순하고 맑은 빛깔의 하늘을 보면서 9월, 가을이 시작되었다는 걸 느낀다. 이런 9월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수식어가 있다. 바로 독서의 달이다.
쇼츠와 릴스도 진득하게 보지 못하는 시대라고 하지만, 독서 문화가 붐을 일으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독서가 고리타분한 것이 아니고 소수가 즐기는 힙한 행위라는 의미를 지닌 ‘텍스트 힙’이라는 신조어가 새로 생겼고, 지난 6월 30일부터 5일간 열렸던 서울국제도서전은 2023년에 비해 2만 명 정도 증가한 15만 명의 관람객을 맞이하며 크게 흥행했다.
청년들은 다시 고전을 찾기 시작했고, 혼자만의 조용한 취미였던 독서는 공유 문화로 바뀌어 새로운 유행이 되었다. 독서의 지속 가능성을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나 역시 책을 꾸준히 읽는 독자다. 어릴 적부터 학교 도서관이든 지역 도서관이든 책이 있는 곳이라면 꾸준히 다니면서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책이 빼곡하게 들어선 서가에 서서 책 향기를 맡고 있으면 마음이 평온하게 가라앉았다.
무슨 걱정거리가 있어도 잠시 진정할 수 있고, 멀리 떠나지 않아도 책 속의 서사를 따라 흘러가다 보면 나만의 여행을 즐기고 올 수 있었다. 대학생이 된 뒤로는 한 달에 한두 번씩은 ‘북캉스’를 즐기면서 나만의 힐링 시간을 꼭 보장해주고 있다. 북캉스는 시원한 실내에서 책과 함께 여유로운 휴가를 즐기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나온 신조어다.
온라인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신간 도서를 잔뜩 구매해서 읽기도 하지만, 나는 온라인 서점에서 바로 책을 사기보다는 오프라인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서 책을 살펴보고 왔다가 마음에 오래 남는 책이 있으면 사 모은다. 인터넷에 사람들이 남겨 놓은 책 후기만 봐도 대략적인 줄거리를 알 수 있지만, 서점이나 도서관에서만 느낄 수 있는 고요한 분위기를 좋아해서 오프라인 책 탐방을 소소한 취미로 남겨두고 있다.
그러다보니 내 카드지갑 속에는 도서대출증 카드가 항상 들어 있다. 내 도서대출증을 본 친구들은 깜짝 놀라곤 한다. 도서관에 자주 다니느냐면서.
“그럼 너희는 도서관에 잘 안 가?”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과제를 해야 할 때나, 공강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학교 도서관에 가는 게 아니라면 도서관에 잘 다니지 않는다고 한다. 평소에 책을 잘 읽지 않을뿐더러, 재미있게 즐길 만한 공간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국제도서전이나 SNS 상에서 독서 문화가 흥하고 있다고 해도 아직 현실의 이야기와는 먼 것 같다.
책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무척 서운한 말이지만 내 친구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독서를 취미로 둔 사람들이 점점 늘고는 있다지만 ‘2023 국민 독서실태조사’만 봐도 요즘 독서율이 매우 저조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독서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성인 10명 중 6명은 1년간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았다고 한다. 성인 한 명이 한 해 동안 읽었던 일반 도서의 수를 알려주는 연간 종합독서량의 경우는 3.9권에 그쳤다. 책과 도서관을 지루하지 않게 느낄 방법이 있을까? 생각해보다가 이색적인 도서관을 소개해주면 어떨까 싶었다. 마침 얼마 전에 한국관광공사에서 북캉스를 즐길 만한 아름다운 도서관 몇 곳을 소개했다.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이색 도서관, 다양한 장르의 책이 보관된 이색 도서관, 여유로운 북캉스가 가능한 특별한 테마의 도서관들을 소개하고 있다고 해서 궁금한 마음에 한국관광공사의 ‘대한민국 구석구석’ 누리집(https://korean.visitkorea.or.kr/main/main.do)을 찾아 보았다. 서울 다산성곽도서관, 청운문학도서관, 의정부 미술도서관, 남양주 정약용도서관까지 총 네 곳이 소개되었다.
이번에는 다산성곽도서관과 청운문학도서관, 두 곳을 방문해보았다.
다산성곽도서관은 학교에서 가까워 수업이 끝나면 걸어가곤 했던 도서관이기도 하다. 3호선과 6호선이 지나가는 약수역이나, 6호선 버티고개역에서 내리면 찾을 수 있다.
다만 한양도성 남산 성곽길 옆에 있어 오르막길을 조금 걸어 올라가야 보인다. 싱그러운 녹음(綠陰)과 한양성곽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오르막길을 타박타박 여유롭게 올라가면 숲을 그대로 품은 듯한 도서관, 다산성곽도서관을 만날 수 있다.
다산성곽도서관의 가장 큰 특징은 싱그러운 실내 정원이 있다는 점이다. 도서관 1층에서 2층까지 길게 뻗은 웅장한 원형 서가와 서가 앞부터 도서관 입구까지 가로지르는 파릇한 실내 정원은 꼭 여름을 그대로 머금은 듯하다.
탁 트인 창가에 앉아 있으면 도심을 가로지르는 한양성곽과 함께 서울 도심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개방감 덕분인지 도서관에 서 있기만 해도 마음이 탁 트이는 기분이다.
원형 서가 옆에 마련된 라탄 의자에 앉아 집중해서 독서를 즐기는 사람도 있고, 원형 서가 앞에 서서 동행과 소곤거리며 책을 고르는 사람도 보인다.
소리 한 점 허락하지 않는 열람실 같은 분위기라기보다는 여유를 느끼면서 즐겁게 힐링할 수 있는 공간이다. 나도 책장을 둘러보다가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들고 의자에 앉아서 즐겁게 독서를 하다 왔다.
여름을 쏙 빼닮은 공간에서 좋아하는 이야기를 천천히 읽어나가는 고요한 기쁨이 좋다. 사락거리며 책장 넘어가는 소리와 식물의 싱그러움은 마음을 평온하게 만든다.
유아어린이자료가 모여있는 서가에서는 매트와 방석 위에 앉아 동화구연을 듣는 아이들이 보였다. 책에 몰입한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창을 열고 넓은 야외테라스로 나가보았다. 선선한 바람을 느끼며 빈백에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아직 한낮은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곧 다가올 가을이면 빈백에 누워 바람도 느끼고 독서도 즐기는 공간으로 아름답게 꾸며질 것 같아 기대가 된다.
운영시간은 평일 및 주말 오전 9시부터 오후 22시까지다. 매주 월요일과 일요일을 제외한 법정 공휴일에는 휴관한다. 유아어린이 자료와 청소년 자료부터 일반 도서 자료까지 총 17,127권의 도서를 보유하고 있어 독서를 즐겁게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청운문학도서관으로 가볼까? 청운문학도서관은 서울 종로 자하문로에 있다.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 설과 추석 연휴에는 휴무지만,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21시까지, 토요일과 일요일, 그리고 공휴일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19시까지 운영한다.
이 도서관은 독특하게도 한옥으로 지어진 공공도서관이다.
도서관의 뒤쪽으로는 폭포가, 사방으로는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공간을 거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평온해지는 곳이었다.
한옥 내부의 작은 책장을 들여다보니 여러 문학 도서가 가지런히 꽂혀 있는 게 보였다. 신발을 벗고 마룻바닥에 앉아 독서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을 지나가면 열람실과 세미나실이 보인다.
독특한 점은 작가의 방이 마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한옥 끝에 마련된 창작 공간은 문학인들의 모임과 창작 활동을 지원하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공간을 들여다보니, 여러 권 쌓인 책들과 종이 위를 바쁘게 오가는 펜촉, 그리고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글씨를 써내려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지하 1층으로 내려가면 사락사락, 책장 넘어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조용히 독서하는 사람들을 보며, 책을 즐기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전에 비해 정말 많아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도서관에 마련된 대부분의 좌석이 가득 차 있었고, 모두 조용하게 책장을 넘기며 집중하는 것을 보았다. 청운문학도서관은 문학 도서를 비롯해 대략 3만 권의 자료가 가득 꽂혀 있는 서가가 있고, 다양한 좌석이 마련되어 있어서 편안하게 독서를 즐길 수 있다.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보았던 곳은 대나무 중정과 한옥 창밖의 폭포였다. 지하 1층에서 책을 읽다가 선선해진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를 바라보며 고즈넉함을 느낄 수도 있었고, 한옥에 앉아 창밖으로 쏟아지는 맑은 폭포를 보며 늦여름과 초가을 사이의 시원함도 느낄 수 있었다.
눈을 감고 폭포 소리를 듣는 사람들부터 폭포 소리를 배경으로 독서 삼매경에 빠진 사람들까지. 저마다의 방식으로 도서관이 주는 힐링을 느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데일 카네기는 “짧은 시간의 휴식일지라도 회복시키는 힘은 상상 이상으로 큰 것”이라고 말했다. 오늘 두 도서관을 방문해 평소라면 허락하지 않았을 쉼표를 찍고 오니, 오늘의 기억을 바탕으로 다시 일상을 힘차게 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도서관 주변으로 조성된 산책길을 걸으며 왜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라고 했을까,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어느 계절이든 책을 읽기 나쁘다는 의미가 아닐 것이다. 다만 날이 선선해지고 나다니기 좋은 날씨에 책도 가까이하며 글을 손에서 놓지 말라는 의미일 것 같다.
야생동물들은 차디찬 겨울이 다가오는 걸 대비하여 가을에 양식을 모으거나 에너지를 비축한다. 창고에 야금야금 쌓아놓은 것들로 기나긴 겨울을 버틴다. 그들처럼 우리도 가을에 곡식과 채소류, 과일을 차곡차곡 쌓아놓고 겨울을 난다. 그러니 머릿속 창고에 지식을 담아두기에 적절한 시기도 가을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책장을 넘겨 마음에 드는 구절 하나를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울림을 얻을 수 있다. 크고 작은 울림이 모이고 모여 어느 날 우리가 힘든 일을 견딜 때 잘 버텨낼 힘을 주리라고 믿는다.
자, 그러면 이제 가까운 도서관으로 찾아가 마음에 끌리는 책 한 권을 찾아 마음에 드는 자리에 앉아 나들이를 떠나볼까?